"회 싱"
육십을 넘기고 칠십을 향해
그동안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걷는다.
직장생활 은퇴한 지도 어~언 7년,
가 보지 않은 인생 2막 열다 보니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인생 전반기에 산전수전 다 겪고
아쉬움과 그리움 추억이 되어 간직되네
40여 년 동안 몸 담았던 정들었던 동료들과
작별하고 .
수많은 사람들과 오고 떠난 이웃들.
이제는
가 보지 않은 인생 후반기 길을 걷다 보니
고단하고 힘들었던 일 들도 추억이 되어
그리움으로 변한다.
이제는 하얀 종이 위에 수많은 추억들을 그려보고
힘들고 어려웠던 오십여 년 전 빛바랜
자식들 흑백 사진과 새마을 운동을 펼쳤던
지난 시대 시간들을 회상한다.
20대 초반에 현역 사병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아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에 배치되어 젊은 청춘 3년을
국가에 몸 바치고 빈손으로 전역하여 개구리(예비군) 복을 입고 그리운 고향으로 달려오니
부모 형제와 일가친척들이 따뜻하게 반겨준다.
지금처럼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고 잘 사는 나라이었으면 사병들 봉급도 많이 받고, 휴가비와
전역비도 수령했을 것인데 그 당시는 가난한 국가 이어서 그런지 휴가비도, 전역비도 지급받지
못했다.
버스는 할인이 되고 열차는 통일호에 딸린 군용 칸을 타고 TMO(여행장병지원센터)를 통해
일반 국민들과 다른 열차칸을 무료로 이용해 고향을 내려가고 15일간의 정기휴가를 받아
부대에 복귀하는 가난하고 힘든 병영 생활이었다.
자주 병영비리가 적발되어 투명하지 못한 징병제도 시국에 56kg의 허약하고 167cm 신장의
나는 힘도 백도 가방끈도 짧고, 아무런 권력이나 배경도 없는 가난한 집의 자식이라 간신히
졸업장을 받아 징병신체검사 1급을 판정받아 논산 훈련소에 징집되었다.
훈련소 수용연대에 대기하다 보니 허약한 내가 1급 징집자라고 공수부대(특전단) 요원으로 차출되고
여산에 있는 하사 후보생(하후생)으로 차출되어 도저히 체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징집관에게
사정해 일반 사병으로 분류되어 4주 동안 훈련을 받고 강원도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억수룩하게 눈이 내리면 눈을 맞고 밤새도록 제설작업을 하고
간첩이 침투하면 초소와 진지, 참호에서 매복 근무를 하면서
무더운 삼복더위 여름에는 유격훈련과 att훈련, 사격, 팀 스프린트 훈련 등 젊은 청춘을
불 살랐다.
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짜다고 생각하면 짧은 3년 이 자만 돈 없고 가난한 집안의 아들은
고통스럽고 힘든 나날이었다.
나중에 전역하여 사회에 나와보니 부잣집 아들이고 좋은 대학 들어가고 키도 크고, 신체도 좋은
동창들은 안경을 사용했다고 병역면제와 방위병으로 짧게 병역의무를 마친 친구들이 많은걸
보니 병역비리가 여전하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보이는 것은 하늘만 보이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오지 산골에서 태어나고 10리 길 산 고개를
검정 고무신을 신고, 보따리에 교과서를 묶어 어깨 등 뒤로 메고, 비 오는 날이면 비닐로
만들어진 비료포대 양쪽을 가위로 잘라 양손을 넣고 비옷을 만들어 결석하지 않기 위해
먼~길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통학했던 어린 시절과 영양실조로 몇 번씩 쓰러졌던 지난 일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간다.
병역 복무 후 전역을 하였으나 방 얻을 돈도 없고, 취업도 하기 어려워, 고층건물 지하와
지상에서 24시간 교대로 주차정리와 경비, 음식점에서 일을 하면서 연탄난로에 온몸을
의지한 체 사설독서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공부에 미련을 두고 그 얼마나 고생했던가!
여러 해를 고생하면서 공개적으로 채용하는 공채시험에 합격해 3~40년간을 앞만 보고
일하면서 은퇴 후 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일을 하면서 인생 70여 년을 보낸다.
이제는 가보지 않은 미지의 남은 시간들을 의미 있고 보람차게 보내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