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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은사님들!

by 자봉

6.25 전쟁이 끝나고 혼란한 시국에 베이붐세대로 태어난 1950년대 생 우리들!

먹고 살아가기 바빠 경제건설 부흥기에 잘 먹고 잘살아 보자는 새마을운동과 국토 재건 사업, 치산치수

등 4월 식목일이면 학교에 나와 삽과 곡괭이를 들고 단체로 산으로 가서 나무를 심고, 소나무에서

기생한 해충을 잡고, 집안에 우글거리는 쥐를 잡아 쥐꼬리를 잘라 학교에 내야 했던 우리 세대들!


어디 그뿐이던가!

농번기가 되면 봄방학을 해서 농사짓는데 도움이 되는 퇴비증산 사업에 도움을 줘야 했고,

5월 6월이면 보리베기와 보리이삭 줍기 등으로 농촌벌판에 나가 고사리 같은 어린 시절부터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건성건성 다니면서 일손이 부족한 부모님의 일손을 도우면서 학업보다는 일을 많이 하면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학창생활에 대한 즐거운 추억은 별로 없다


낚은 자전거와 누렁소가 끌어주는 구르마(달구지) 뒤를 따라 시골 재래식 5일장에 부모님을 따라

시장에 가서 검정고무신과 다우다바지를 사주면 그 얼마나 좋아했던가!


1970년대 농촌에서 모두가 다 “잘살아보자”라고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농촌 외딴곳에서 태어나 힘들고 어렵게 공부했던 나는 농촌생활이 당연히 지긋지긋했다.

너무 도회지가 그립고, 그래서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안 되는 모험을 저질렀다.

집은 가난하고 7남매의 장남인 나는 돈이 없어 누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고향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는데 시골에서 일하기도 싫어 무조건 조건 없이 동경하는 대도시인 광주광역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연합고사를 치르러 난생처음으로 광주시 땅을 밟았다.


집안의 형편도 무시하고 부모님 말씀도 안 듣고 무작정 광주 시내 고등학교로 진학하다 보니 자취하기 위한 방 얻을 돈도 없어 학교 진학을 포기할까 생각했다. 그러다 다행히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분의 자제인 김백중 친구가 광주에 자취방을 얻어 혼자 생활한다기에 함께 자취 생활을 하면서 같은 고교를 다니게 되었다


어떻게 간신히 학교를 다녔지만, 팍팍한 자취 생활을 하다 보니 연탄불은 항상 꺼져 있고, 툭하면 밥을 굶어 점심시간이면 친구들 몰래 수돗가로 가서 수돗물로 굶주린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이런 학교생활은 계속됐고 수업료를 내지 못해 수시로 교무실로 호출됐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려니 정말 힘들었다. 이렇게 먹지도 못하고 돈도 없으니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고 성적도 좋을 리가 없었다.

한창 성장할 나이에 굶주림을 참고 모든 것을 혼자서 극복해 나가야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든 못하든 나중에 면에서 근무하는 면서기 공무원이라도 하려면 어떻게 하든 고교는 졸업해야 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석간신문인 전남일보를 배달하면서 힘겹게 3학년 1학기까지 마쳤다. 서울에 가고 싶어 담임 선생님께는 취업이 돼 서울에 간다고 거짓말을 한 후 광주역에서 용산역까지 야간 완행열차를 10시간씩 타고 서울에 올라왔다


꿈과 희망의 도시이고, 우리 농촌 촌놈들에게 동경의 도시인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에 입성한들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는 타향에서 어느 누가 직장을 알아줄 리도 없고, 반겨줄 리도 없지만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도전했다.


이렇게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신문 배달과 음식점에서 일을 하며 현역입영 영장이 나와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국민의 5대 의무인 국방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빡빡머리를 깎고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현역으로 강원도 전방에서 군 복무 3년을 보내면서 5.18 민주화운동 계엄시국에 정신교육차

삼청교육대로 끌려오는 민간인들의 모습을 봐 왔고, 남과 북이 대치하는 최전방 철책선이 뚫려 간첩이

침투하면 모든 장병들이 간첩을 잡기 위해 험준한 전선으로 투입하여 모기와 추위와 싸우면서

매복근무를 하면서 나라를 지켰다.


이렇게 힘든 군 복무 3년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니 취직할 데가 없어 행사장이나 전시장, 백화점에서 주차안내 등 임시직 일자리를 전전했다. 그러다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지방 행정직 공무원에 합격했다.


연탄난로로 난방을 해결하는 사설 독서실에서 숙식을 하면서 근처 식당에서 500원짜리 국, 밥으로

식사를 해결하면서 늦게나마 30대 중반에 방송통신대와 학점은행제로 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받고

50대에 대학원을 다니면서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70이 코앞에 다가온다.


가난 때문에 학창 시절이라야 추억은 별로 없고 너무 아픈 기억들만 많았던 초, 중, 고등학교 생활이었지만 70고개 근처에서 지난 세월들을 가만히 회상해 보면 학비를 납부하지 못했다고 강제로 퇴학을

시키지 않은 선생님과 담임선생님들께 고맙고 감사하다.


10대 후반에 서울에 올라와 온갖 고생을 하면서 50여 년을 이곳에서 살다 보니 그 옛날 다녔던 모교

교정들이 생각나 50여 년 만에 조용히 혼자서 배낭을 메고 내가 다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근처

자취를 했단 단독집들을 한 곳 한 곳 씩 방문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멀리 다른 곳으로 이전해 버리고, 그 자리에는 공동주택이 들어서 아파트단지가 되었고,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어 없어져 버렸다.


연탄을 떼면서 친구와 자취생활을 했던 단독집들도 재개발로 모두 다 아파트 단지로 변해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인생전반기를 끝내고 2막 후반기를 살아가면서 지나온 날들을 잠시나마 기억해 보고, 추억해 보고자

고향과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를 가 봤지만 세월도 흐르고 나도 늙어 가는 것인지 모든 것들이

변해있으나 마음과 추억은 옛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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