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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잃어버려 정신없었던 상동시장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by 자봉

은퇴 후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옛 생각도 많이 난다

어느 누구나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해 보면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슬프거나 가슴 아픈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경기도 부천시 중동역과 가까운 전통재래시장인

상동시장은 어렵고 힘들었던 신혼시절과 어린 지녀들을 키우면서 애환이 많았던 곳이다


열아홉 살부터 예순 살이 지나도록 앞만 보면서 고생했던 탓인지 이제는 힘들고 머리 아픈 일은 하기 싫다.

은퇴 후에는 시간적인 여유도 많아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불러 식사와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도 빨리 가고, 돈도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노후는 현금이 없으면 더욱더 외롭고 힘들다고 어르신들과 선배님들의 말씀에 귀 담아진다.

하루라도 더 젊고, 걸을 수 있을 때 살아왔던 지난 추억들을 회상해서 과거에 살아왔던 그곳들을 찾아 탐방해 보기로 했다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어 글을 써 보고자 38년 전 스물아홉 살 때 전세로 살았던 상동초등학교 근처의 신혼집과 주변들을 탐방해 보기 위해 국철 1호선을 탔다.



평일이라 지하철 내에는 검은색 옷을 입은 어르신들이 많았고, 신혼생활을 했던 경기도 부천 중동역에

내려 점심 한 그릇을 사 먹고 상동시장길을 걸어가 본다.

오후 1시께 찾은 부천 상동시장은 평일 낮인데도 장을 보러 온 손님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입구에 들어서자 주전부리, 식당부터 옷과 신발까지 물건을 깔끔하게 진열한 각양각색 가게들이 고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장 내부의 높은 아케이드는 시원함을 높여줬고, 넓은 통행로 덕에 많은 사람이 오고 가도 불편하지 않았다.


부천 상동시장(부천시 석천로 61번 길 51)은 1986년 포도밭과 복숭아밭 등 논밭에 주택가가 들어서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시장으로 발전했다. 1980년부터 상동 지역이 개발되면서 상가와 아파트가 형성돼 1985년부터 시장은 점점 커져 현재의 상동시장이 모습이 됐다고 한다.

이후 중동신도시 개발과 함께 아파트단지, 다세대주택이 형성돼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부천 중심지 전통시장으로 성장했다. 현재 158개의 점포에서 농수산물, 생활용품, 잡화류, 식료품, 먹을거리 등을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신혼방은 650만 원으로 바로 길옆에서 부엌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타일이 부착된 부엌에서 연탄불로 난방을 하면서 부엌 겸 샤워를 하고 살았다.

이곳에서 큰 애를 낳아 키우다가 계약기간 1년이 지나 인천 주안으로 이사를 갔다가 서너 번 더 이사를

다닌 후 두 자녀들이 유치원에 다니기 전에 전셋값도 저렴해 17평 주공아파트에 다시 이사 왔다.


작은아이는 어려서 유치원에도 입학 못했지만 큰 애는 집 근처 중동유치원에 입학해 똑 부러지게

생활하고 공부해 원장님과 담임선생님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부부는 시골 농촌이 고향이었기에 얼마 되지 않은 월급으로 대출금까지 매월 갚다 보니 쥐꼬리만 한

급료에서 이것저것 공제하면 항상 쪼들리게 생활했다.

그래도 살림을 근검절약하게 잘하고 유아교육학을 전공한 아내의 덕택으로 생활비는 항상 아끼고,

아이들 교육은 아내가 전담했기에 자녀들을 모범적으로 키운 것 같다.


어느 날 인가!

두 자녀들이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 아내는 어느 날 어린 자녀 2명을 데리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동시장 양쪽 점포를 구경하면서 필요한 생필품도 구매하기 위해 건어물점과 야채가게, 떡을 파는

가게를 들렸다.

(상동시장)


그래도 일곱 살 된 큰딸은 엄마인 아내뒤를 졸졸 잘 따라다녔지만 다섯 살 된 작은딸은 건어물가게에서

주인아주머니가 착하고 예쁘다고 오징어포를 주닌까 그것이 맛있었던지 아내와 큰 딸을 따라오지

않고 먹는 것에 푹 빠졌었나 본다.


뒤 따라온 줄만 알았는데 다섯 살인 작은딸이 보이지 않자 아내와 큰딸은 당황해서 인파가 붐비는

시장골목을 두 세 차례씩 작은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봤지만 못 찾았다.

아내가 당황을 하면서 파출소에 아이 분실신고를 하려고 하자 큰 딸은 울면서 꼭 동생을 찾아야 한다고

난리가 났고, 아내는 자식을 잃어버렸으니 혼절부절 난리가 났었나 본다.


작은아이를 잃어버려 너무 당황해하다가 건어물 점포에 들어가 보니 그래도 다행히 주인 아주머님께서는

침착하게 작은딸이 당황하지 않도록 간식을 주면서 데리고 있어서 잃어버렸던 딸을 몇 시간 만에 찾았다.

지금도 그 당시를 순간순간 생각하면 아찔하고 간담이 서늘하다

만약에 찾지 못했다면 우리 부부는 물론이고 큰딸까지 큰 고통 속에 살았을 것이다


30여 년 전 작은딸이 유아였을 때 잃어버렸다면 나는 자녀를 그리워하다가 찾지 못했다면 화병으로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잃어버렸다가 찾은 딸이 초등학교 때는 남자아이들을 당당히 제치고 반장과 회장을

하면서 공부도 잘해 장학금도 타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해 언론정보학을 전공하고 캐나다에 유학을

다녀온 후 국내 언론사와 방송사에서 취재활동을 하면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으니 대견스럽기도 한다.

(상지초등학교와 신혼적 살았던 집)

지금도 거의 30여 년 전의 당시를 생각해 본다.

회상하면서 막내를 잃어버리고 찾기 위해 난리가 났던 상동시장을 쭈욱 돌아보면서 박봉에 쪼달려 힘들게 생활했던 30여 년 전 상동시장 근처에서 살았던

그 시절들을 더듬어 본다


힘들고 어려웠고 아이를 잃어버려 아찔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과거가 되어버린 그곳을 찾아 추억을 더듬어 본다.


37년 전 신혼살림을 하고 큰 아이를 출산해 키웠던 단독주택은 이제 온 데 간데없고 현대자동차

정비업소가 들어서있다.

그때, 젊은 청춘과 어려움도 많았던, 자녀들이 어릴 적 살았던 그 동네와 주택을 방문해 보니

감개무량하고 우리가 살던 LPG가스점도 없어졌고 근린공원도 생기고 참 많이 변해 있다


결혼을 한 후 30대 초반에 살았던 부천 중동 상동시장,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던 이웃 신용석 형님

나보다 두세 살 아래이지만 운동도 잘하고 자가용을

소유해 차가 없는 나를 승용차에 태워 어디론가

종종 콧바람을 쐬러 야외로 함께 나갔던 충남 공주가

고향이었던 김명규 씨.


내 아이들이 똑똑하고 예의 바르다고 예뻐해 주셨던

중동유치원 원장님과 한국통신에 다녔던 강화도

출신의 지희 아빠.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했던

1층 이웃 재준이 아빠,


3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다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나이도 다 비슷한 또래 이웃들이었는데 순수하고

정이 많았던 80년대 상동시장 근처에서 전세를 살았던 젊은 이웃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노년의 삶은 나이로 사는 게 아니라 추억과

그리움으로 사는가 본다

박봉의 월급과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던

월세와 전세살이 삶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힘들었던 젊은 날들의 시절들이 잊어지지 않고

어른이 된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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