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에 일요일 대체휴일 3일 동안 연이어 쉬는
휴일이다
은퇴 이후 나이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오전에
8 천보 걷고 오후에는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평생학습관 도서실에 책 한 권 들고 나와 좌석을
자동으로 배정받아 책을 읽는다
잠시동안 두 눈을 지그시 감고 60년 전과 비교
불 가능한 현재를 살아가면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음에 무조건 고맙고 감사하다
하루 세끼 먹는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상으로 도서실과 컴퓨터를 이용하는 현실이
얼마나 좋은가!
1970년대에는 삽과 괭이 리어카. 지게, 일간
저녁신문을 배달하면서 학교에 다녀야 했고
민주화운동에 최루탄가스를 피해 가까운 거리도
멀리 돌아다녀야 했다
비가 오나 폭우가 쏟아지거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도
어린 나이에 신문배달을 하였건만
마음씨 나쁜 신문보급소장은 두세 달 급료도 주지
않고 도망을 쳐 배달 급료도 못 받고 그 얼마나
10대 소년시절에 고생했던가!
1979년 4월에는 백 없고 돈 없고 많이 배우지 못해
56 킬로그램의 왜소한 체격으로 무조건 징집검사를
거쳐 현역 1급 판정을 받고 단기하사와 공수부대
사병으로 차출 호명되어 대답을 않고 현장을 피해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에 배치되어 매월 2,700원을
받으면서 3년 동안 나라를 지켰다
전선이 전방이다 보니 각종 지뢰사고와 총기. 차량사고로 전사한 동료들은 전투 중 사고가
아니라 전사처리도 안되고 국가유공자로 지정도
되지 않은 군부 독재 잔해가 심한 시기였다
월급이라기보다는 한 달 용돈인 2천 원 3천 원으로
공무원준비 수험서도 한 권 제대로 사보지 못하고
전방에서 병영생활을 보내야 했다
전역 후 경비원과 이삿짐센터 공장에 임시로 취직을
해서 삽으로 시멘트를 비벼가며 허리가 부러지도록
전신 전봇대 형틀에 맞춰보고 시멘트를 찍어내는
형틀에 힘이 부쳐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어 그래도
힘이 들지 않은 음식점에 취업해 공무원이 되고자
주경야독으로 독학했다
서울에서는 툭하면 대학가에서 민주화를 위한
데모와 시위가 계속되어 최루탄가스 냄새가
자욱했고 경찰 기동대와 의경들은 데모진압을 위해
두꺼운 진압복과 곤봉으로 다리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시위진압 훈련을 했다
시골 촌놈이 안정된 직장에 하루라도 빨리 취업을
하기 위해서 군 복무 3년을 마치고 명예롭게 전역하여
데모 없는 경기도 경찰 공무원인 순경시험에 응시하여
필기시험에 합격하여 면접과 최종신체검사를 했더니
시험관이 발바닥을 보자고 하더니 평발이라고 최종
불합격시켜 버려 낙방되었다
55~56 킬로그램의 허약한 체질을 빽 없다고 징병검사에서는 1등급으로 판정해서 현역 1급으로
판정 여산 단기하사 후보와 공수부대 사병으로
차출하더니 전역 후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니 체력
미달로 필기합격자를 최종 신체검사에서 평발이라고
불합격시키니 병역 부조리가 얼마나 많았던가!
나중에 동창들을 만나보니 일류대를 졸업하고
권력과 배경 빽이 있는 동창들 여러 명 들이 키도 크고
신체도 좋은데 현역으로 징집되지 않고 단기간 복무하는 방위병이나 병역면제를 받은 걸 보니
실망감과 그 당시 병역비리가 어찌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제2국민역 제도를 악용한 대상자들도 있었지만
빽 없는 부모나 나 자신을 원망한들 무엇하랴!
이래 저래 고생만 하다가 하위직공무원이라도 하면서
야간대학에 진학하고자 어떤 일이 있어도 책을 놓지
않고 틈틈이 꾸준하게 공부해 왔다
검찰 7급 9급과 국가직과 지방직 7급에도 도전했으나
실력이 부족해 낙방을 하다가 법원직 9급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했다
원주에 발령받아 그 지역에 소재하는 s대 야간에
진학하기 위해 그 당시 인기직장이던 한국통신에
도전했으나 보기 좋게 탈락하여 국가직 공무원 2개
직종에 합격하여 발령을 받아 근무하다가 경상도가
고향인 용기 형님이 나보다 4살 더 연배이지만 건국대 법대를 졸업하여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계속 떨어져
우연챦게 나와 함께 시험을 치러 직장 임용동기가 되어
버렸다
용기형이 7급 행정직 시험에 접수하러 가면서
혼자 가면 심심하니 같이 가자고 해 우연챦게
따라가 그분은 7급에 접수하고, 나는 9급에 접수했는데 7급에 접수한 용기 형은 낙방해 훗날
법무사 시험에 합격해 과천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부화뇌동이라고.
남을 따라 시장을 가듯
직장동료 용기 형님을 따라 시험접수처에 가서
우연챦게 응시하여
최하위 말단인 9급 행정공무원에 합격해 발령을 받아보니
공개채용으로 임용된 정규직 행정직 공무원은 행정업무를 보다가 상급기관에서 환경정비 검사나
무허가건물 전수조사가 있으면 옆에 앉은 여직원
동료들에게 업무를 맡기고 작업복을 갈아입고
창고에서 리어카와 장갑을 끼고 주민들이 몰래 버린
쓰레기와 타이어 심지어는 동물사체까지 치워가며
주간에는 노동자. 퇴근시간 이후 야간에는 주간에
하지 못한 행정업무들을 처리했다
이렇게 백 없어서 죽도록 공부해서 공개경쟁채용
시험에 합격해 정규직으로 임용된 직원들은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고생을 하는데 친척이
나 숙부 백부 외삼촌이 국장이나 과장인 사람들은
시험도 거치지 않고 고용직이나 기능직으로 많이들
임용하여 주변 배경은 공개경쟁도 없이 행정직으로
전직이나 전환되어 고생도 하지 않고 진급도 했다
집안이나 주변 배경 즉 백이 있어 임용되어 권한과
편한 부서인 총무과나 감사실에서 타이프나 치다가
행정직으로 전환되어 시험을 거쳐 임용된 행정직보다
승승장구하다 은퇴한 선배들이 많아 빽 없는 게 얼마나
원통했던가!
이러한 설움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평소에는 맡은 일을 하고 방송강의를 들으면서 대학을 다니고. 그것도
부족하면 비어있는 테이프에 방송강의를 녹음하면서
대학교를 늦깎이로 다녔다
야간대학은 학비가 비싸 방송으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면서 50대 초반에 하루일과를 마치고 모 대학
지방자치대학원에. 다니고 은퇴 후를 생각해 50대에
또다시 노인복지와 청소년. 아동복지를 공부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학교에 가서 3년 동안 공부하니
은퇴할 날이 다가왔다
비싼 학비를 내고 50대에 공부하기보다는 차라리
자녀들에게 그 교육비를 투자하는 게 현실에 맞을 것 같아 그 비용을 자녀들이 공부하도록 지원하고
대신 장학금을 받아 적은 금액으로 늦깎이 공부를
했다
우리가 소년이었을 때 버스토큰 한 개가 없어서
먼 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고.
돈이 없어 점심밥 대신 운동장 가장자리와 실내화장실에 딸린 수도꼭지를 틀어 수돗물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현직 경기도 김동연 지사나. 더불어 민주당 대표인
이재명 의원님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어렵게 공부해서
행정고시와 사법고시를 합격해 한 분은 변호사가
되어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다른 한분은 덕수상고를 졸업하여 행정고시에
합격 후 경제관료인 경제계획 부총리까지 역임하고
민선에 의해 경기도지사로 활동하는 유능하고 머리 좋은 천재이다
50년 전에도 현역사병들에게 지금처럼 월급인지
용돈인지를 매월 100만 원 200만 원씩 아니 절반인
50만 원이라도 지급했었더라면 그 돈을 받아 저축하고
책을 사서 공부하고. 입대 전 대학에 합격해 놓은
회계학과에 복학해서 다녔을 것인데 ᆢ
지나온 과거와는 비교될 수 없는 현실이지만
핸드폰과 유튜브 방송강의 학점은행 등 공부하기가
얼마나 좋은가?
장학제도도 좋아졌고
요즘은 장교로 임용하는 ROTC도 미달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경쟁률도 높았고 b학점이상 유지해야만
했었다
장교로 임관하기 전에는 비록 통제된 불편한 생활을
했지만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니면서 졸업 후
장교로 임용되는 좋은 제도였다
이제는 모든 것들이 지나간 과거에 불과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난 젊은 시절에 하지 못했던
일들이 미련이 남아 머릿속을 맴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원 없이 공부해서
행정고시나 지금은 없어진 사법고시에 도전해
내 인생의 목표도 달라지게 할것인데 ᆢᆢ
하기야. 어찌 되었건 긴 세월 근무하면서
행정사무관으로 승진해 은퇴는 했지만---
아쉽게도 미련이 많이 남아있다.
잊어버릴 것은 빨리 잊어야 되는데
쉽게 잊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흘러가 버린 과거에 비하면
너무 좋은 세상이고
열심히 부지런하게 살면 그만큼 보상받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너무 좋은 세상이다
군대 군 복무기간도 우리 때는 34개월이었는데
지금은 18개월이고
사병 월급도 100만 원 200만 원 지급하는
과거와 너무 다른 좋은 세상인데
돈 없다고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지금은 아주 좋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