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손은 힘들어!

by 자봉


할머님은 늘 나를 “우리 집 종손”이라 불렀다.

말속에는 특별한 기대도, 대단한 부탁도 없었지만

그래도 부담스럽고 무겁게 들렸다


다만 밥 한 숟갈을 더 얹어 주시며 웃어 주시던 그 눈빛 속에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려서부터 할머님 곁에 있으면 괜히 어깨가 펴지고 즐거웠다.

종손이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나

본다


40대에 자치행정과에서 근무하던 시절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승용차요일제 인센티브 사업담당했다

결과는 우수한 성과로 평가받고 포상으로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등 서유럽 5개국을 6박 8일동안 견학하는 방문이었다

선진국들의 우수사례들을 비교분석하기 위해 포상휴가를 받은것이다


내 돈이. 한 푼도 들어가지 않은 두번째 해외출장 포상휴가가 하필이면 할머님 장례기간과 겹쳐서

고향 근처에 차려진 장례식장으로 내려가 조문을

하고 조문객을 받다가 내일 프랑스로 출국하기 위해 어머님한테 조용히 말씀 드리고 장례식장에는 아버지와 형제둔 그리고 아내를 두고 저녁 늦게 서울로 올라와 인천공항으로 갔다


해외공무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니 할머님의 장례식은

다 끝났고 산소는 고향 근처 선산에 모셔져 있었다

장례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할머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더 이상 “왔냐” 하고 부르시던 할머님의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밤마다 늦게야 찾아왔다.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할머님 산소를 쓰는데 돈이

부족하지 않았느냐 고 여쭈어보니 삼 사백만원이 부족했다기에 사무실로 들어온부의금 삼백만원을

남동생통장으로 입금시켜 주고 현금도 얼마를 더

드렸다


장례를 치른후 연금공단에 알아보니서 직계가족이 사망하면 사망조위금을 지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략 삼백만 원 정도였다. 서류신청을 한 후 그 돈을 손에 쥐고 나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생활에 보탤 수도 있었고, 남겨둘 수도 있었다. 그러던중 아내가 할머님이 당신을 예뻐했으니 좋은곳으로 가시도록 절에가서 49제를

해 드리자고 제안을 했다

아내가 먼저 이런 제안을 히니 그져 고맙고 두말할 필요없이 우리 부부는 처갓집 동네 가까운 절을 찾았다. 그리고 할머님을 위한 사십구재를 올리기로 했다. 사십구일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들려 기도를 드리고, 공양을 올리는 일. 비용은 생각보다 컸다. 연금으로 받은 돈만으로는 모자라 사비를 보태야 했다. 그래도 망설임은 없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건 종손이어서가 아니라, 손자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했다


매주 절에 들릴때 마다 할머님 얼굴이 떠올랐다.

젊은 날의 모습도, 늙어 병약해진 모습도 아닌, 늘 부엌에 서 계시던 그 평범한 얼굴. “밥은 먹었냐” 하시던 그 한마디가 그렇게 큰 말이었는지, 그때서야 알았다. 사십구재가 끝나던 날, 우리부부와 둘째 작은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누나와 남동생이 함께했다.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빌었다.

할머님, 편히 가세요.

그날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종손답게 잘했다. 하늘이 내린 종손이다.”라고 칭찬했고

그 말에 고개를 숙였을 뿐, 마음이 들뜨지는 않았다.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너, 할머니 사십구재를 남들에게 잘 보일려고 한 거 아니냐?”

나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할머님 49재를 자발적으르 순수하게 내 돈으로 해 드렸더니 고모님은 잘했다고 칭찬했다

종손은 역시 뭔가 다르다고 극구 칭찬해 주

다른 작은아버지는 자식들도 못하는 할머님 49재를 큰 조카가 자발적으로 해주니 고맙다고 격려와 칭찬을

해주는데 막내 숙부만 칭찬은커녕 재갈을 물렸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라

구차하게 설명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마음으로 한 일을 마음으로 보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어떤 말도 변명이 된다.

그 뒤로도 일은 이어졌다. 아버지는 어느새 모든 재산을, 장남인 나도 모르게 비밀리에 아들을 낳은 내 남동생 부부에게 몰아주었다.

나는 그 사실을 1년후에야 알았다.

서운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더 큰 감정은 허탈함이었다. 손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해 온 시간들이, 그렇게 가볍게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이후 집안의 시선은 점점 이상해졌다.

내가 무언가를 하면, 항상 의도가 따라붙었다. 부모님이 시골집에서 편히 지내시라고 집수리를 해 드렸을 때도 그랬다.

오래된 한옥이라 화장실 문턱이 높아 불편해 보여 손을 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두고 “할머니를 모시기 싫어서 구조를 바꿨다”는 말이 돌아왔다.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하던 작은아버지의 목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결정적인 상처는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슬픔에 잠겨 있던 와중에, 장례를 치르며 들어온 부의금을 세는 장면을 작은아버지가 보았고, 그게 곧 소문이 되었다. 돈을 세던 사람은 여동생의

권유로 여동생과 내 아내가 둘이서 장례식 마지막밤에

정리를 하느라 부의금함에서 돈운 꺼내 정리를 했나본다


그런데 어떻게든 종손과 종부를 뒤 흔들려고 작은아버지는 나쁘게 이웃들에게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비난은 종손인 나와 아내에게로 향했다.

“욕심이 많다.”

그 말은 칼처럼 돌아다녔다. 해명할 힘조차 없었다. 슬픔 위에 억울함을 얹고 살라는 말처럼 들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집안의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사랑도 아니었다. 역할만 남고, 존중은 사라진 자리가 문제였다. 누군가는 여전히 종손의 의무를 요구했지만, 그에 따르는 신뢰와 인정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어느 날 고향집에 갔을 때, 이웃 어른이 내게 말했다.

“나이 먹으면 내려놓을 줄도 배워야 하는데, 여긴 아직도 싸우고 있구나.”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나는 싸운 적이 없었다. 다만 지키려 했을 뿐이다. 할머님의 기억을, 부모님의 편안함을, 집안의 마지막 예의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종손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는 권력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부담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부담을 너무 오래, 너무 진지하게 끌어안고 살아왔다. 그렇다고 후회는 없다. 할머님 앞에서, 그리고 나 자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자기 마음이 아는 만큼만 산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살았다. 그걸로 충분하다. 누가 뭐라 하든, 할머님을 떠올릴 때 고개를 들 수 있다면, 그걸로 내 몫의 삶은 다한 셈이다.

종손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세월이, 이제는 조금씩 내 이름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저 한 사람으로, 누군가의 손자로, 아들로, 남편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게 지금 내가 배운, 늦은 내려놓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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