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가난부터 꺼내야 한다.
그 가난은 한때의 형편이 아니라, 성장의 바탕처럼 삶 전체에 깔려 있던 것이었다. 부모님은 늘 고향에 계셨고, 아내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그곳에서 마쳤다. 머리는 좋았지만, 공부를 계속하기엔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성적이 아니라 돈이 길을 막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때, 아내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조용히 짐을 쌌다. 충남 대전에 있는
충남방직 섬유업체에 취업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를 다녔다.
하루가 이틀 같았고, 이틀이 하루 같았다. 기계 소음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밤이면 교실에 앉아 졸린 눈을 비비며 책을 펼쳤다.
몸은 늘 피곤했지만, 배움을 놓지는 않았다.
그렇게 3년을 버텼다.
성적은 좋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아내는 중경공업전문대학 유아교육과에 진학했다. 아이들을 좋아했고, 아이들 앞에서는 유난히 표정이 밝아지는 사람이었다. 유치원 정교사 자격증을 따냈고, 교회 부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때의 아내는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그 길 역시 온전히 평탄하지는 않았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아내는 자취 대신 이모 집에 얹혀살았다.
그 선택은 생계를 위한 것이었지만, 마음에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모는 보험회사를 다니며 겉으로는 사교적이고 능숙한 사람이었다. 남들에게는 “조카를 데리고 살며 돌봐준다”라고 말했고, 때로는 아내를 마치 집안일을 돕는 사람. 식모처럼 남에게 소개하며 자신을 넉넉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집 안에서 아내는 가족이 아니었다.
밥 한 끼에도 눈치를 봐야 했고, 난방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말은 늘 쌉쌀 맞았고, 인정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내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 냉대가 노골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겉으로는 친척의 체면을 유지하면서, 안으로는 조카를 철저히 타인으로 대하는 태도. 그것이 아내를 더 지치게 했나 본다
아내는 그 시절을 거의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 “그때는 참 조용히 살았어”라는 말만 남긴다. 조용히 산다는 말속에는, 하고 싶은 말도 삼키고 울고 싶은 순간도 넘겼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로는,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처 이모부가 이모를 나무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정도였다는 말이,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결혼을 했고, 아내는 가정을 꾸리며 또 다른 삶의 무게를 짊어졌다.
아이들을 키우고, 시댁 식구들을 돌보고, 말없이 집안을 지탱했다. 아내는 늘 앞에 나서지 않았다. 대신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냈다.
시조카가 눈 수술을 했을 때, 며칠씩 집에 데려와
부모대신 데리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친동생 자식처럼 정을 쏟았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고, 생색을 낸 적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이모는 장례식장에서도 말이 많았다.
왜 떡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
장모님이 “잘 돌아가셨다”는 말까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나는 그 말을 처 이모님을 내 차 뒷좌석에 모시고 운전하면서 똑똑하게 들었다ㆍ
내 귀를 의심했다
처갓집 큰 이모님이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인지
오히려 의문도 했다
정상적인 어른이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아내는 그 자리에서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침묵을 선택했다. 그러나 침묵은 약함이 아니었다. 아내의 침묵은 삶을 건너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내는 왜 이렇게 강해졌을까.
아마도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 노동, 냉대, 이용. 그런 것들을 견디며 사람을 쉽게 미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지금도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거리를 둘 뿐이다. 쉽게 기대하지 않고, 쉽게 원망하지 않는다. 그 태도는 오랜 세월의 결과다.
나는 그런 아내를 존경한다.
세상이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세상에 함부로 굴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상처를, 또 다른 상처로 돌려주지 않았다.
아내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기 삶을 지켜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집을 지탱해 온 진짜 중심은, 언제나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던 아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