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은행나부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면 길가에 뒹구는 빛바랜 낙엽들 사이로 유독 마음을 붙잡는 것이 있다.
이제는 수명을 다해 바닥에 내려앉은 노란 은행잎이다.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는 그 흔한 잎사귀 하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시간은 수십 년 전 우리 집 마당, 늠름하게 서 있던 네 그루의 은행나무 아래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그 시절 우리 집 마당의 사계절은 은행나무의 빛깔로 흐르곤 했다. 봄이면 연둣빛 싹이 돋아나 집안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여름이면 짙푸른 초록 차일을 드리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다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가을이 오면, 푸르던 잎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황금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바람이 한 번 크게 휘몰아칠 때마다 마당에는 노란 비가 내렸고, 그 풍경은 어린 내 눈에 세상 무엇보다 찬란한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저 바라보는 즐거움에서 그치지 않았다. 은행잎이 수북이 쌓일 때면 어머니와 나의 '특별한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약회사에서는 은행잎에서 혈액순환에 좋은 성분을 추출해 약을 만든다며 깨끗한 잎들을 사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한양행이나 세계 굴지의 제약사들이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오염되지 않은 산천의 귀한 원료를 모으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이게 다 사람 살리는 약이 되는 것이니, 가장 깨끗하고 예쁜 놈들로만 골라야 한다." 그 말씀에 따라 나는 고사리손으로 흙이 묻지 않은 잎, 벌레 먹지 않은 매끄러운 잎들만 골라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았다.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은행잎을 줍던 그 시간은 단순히 잎을 모으는 노동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정성을 쌓는 시간이었다. 대바구니에 노란 황금이 가득 찰 때마다 우리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된다는 뿌듯함과, 누군가의 아픔을 낫게 할 약의 원료가 된다는 자부심이 어린 마음속에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마당도, 네 그루의 나무도 볼 수 없지만, 여전히 가을 끝자락에서 만나는 은행잎은 나에게 단순한 낙엽 그 이상이다. 정직하게 약을 만들어 국민의 건강을 책임졌던 제약회사의 든든함과, 그 원료 하나에도 정성을 다했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그 잎사귀 속에 고스란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은행잎들은 소임을 다하고 땅으로 돌아가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날의 노란 빛깔이 선명하다. 잎 하나를 줍더라도 정성을 다해야 한다던 어머니의 가르침은, 어느덧 내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초겨울의 길목, 나는 발치에 머무는 은행잎 하나를 보며 다시금 다짐해 본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약이 되는 존재로, 그렇게 따뜻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야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