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억의 뿌리는 고향의 오래된 초가집에 깊숙이 박혀 있다.
8칸 정도를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서 있던 그 집은, 외양은 소박했지만 가족의 온기로 가득 찬 저만의 우주
였다. 우리 가족들이 기거하는 방은 몇 칸 되지 않았다.
예쁜 창살이 달린 듯한 사랑방은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신 할아버지의 공간이었고, 안방 격인 작은방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어린 여동생들의 잠자리였다
가족이 많았기에 방 배정은 언제나 치열했다. 안방에서는 할머니와 누나, 어린 동생들이 몸을 맞대고 잠들었고, 가운데 방은 부모님과 갓난 동생의 차지였다. 나는 집안의 장손이자 맏손자라는 이유로 특별한 방을 배정받았다.
바로 집의 가장 끝에 있던 사랑방인 할아버지 방이었다.
여섯 살 어린 나이부터 할아버지와 한 이불을 덮고 자며 할아버지의 그림자처럼 자랐다.
가끔씩 남동생 금채가 할아버지 방으로 건너오면 우군이라도 만난 듯 반갑고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 방은 할아버지의 깊은 한문 소리와 저의 어린 숨결이 섞이는 단 둘만의 성채였으니 남동생 금채가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와 같이 자면 얼마나 힘이 되고 즐거웠던지!
할아버지 방에는 늘 고즈넉한 정취가 감돌았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천자문과 명심보감, 농어와 사서삼경을
외우셨고, 혼자서 주문처럼 낭독인지 발표인지 이른 새벽부터 읊으셨다.
그러면 고요하고 적막했던 밤이 어슴프레 서서히 날이 밝아보고 닭장에서는 수탉이 훼를 치켜세우며 꼬끼오!
하고 이른 새벽이 시작되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등잔불 아래에서 매일매일 하루를 시작해 마무리하였고 뉘엿뉘엿 서산에 해가 저물어 가면 종일 장작으로 불을 지핀 아궁이에서 남은 빨간 숯불은 화로에 옮겨 담겨 방안을 훈훈하게 데웠다.
큰방 작은방 방마다 산에서 해온 갈퀴나무와 장작으로 연료를 썼기에, 그곳에서 나온 재와 나무 숯은 버릴 것이 없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 숯불을 이용해 인두와 다리미를 달구어 한복을 정성껏 다리시곤 했다.
그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가장 한국적인 다리미질 풍경이었다.
저는 할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다. 학교에 가지 않은 날 점심 밥상은 항상 할아버지와 겸상했다.
할아버지의 밥은 유독하게 집안의 어르신이었기에 언제나 윤기가 흐르는 쌀밥이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부뚜막 아궁이 옆 부엌에 앉아 보리가 훨씬 많이 섞인 밥이나 식은 밥을 물로 끓인 밥으로 겨우 배를 채워야 했다. 가끔 어머니께서 아궁이의 숯불에 김을 살짝 구워 조선간장에 찢어주시면, 그 김 조각 하나가 온 가족의 귀한 반찬이 되었다
나에게 가장 특별했던 순간은 할아버지의 밥상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쌀밥을 드시다가도 꼭 한 숟가락씩 남기셨고, 그것은 오롯이 종손인 저의 몫이었다. 보리밥이 대부분이었던 제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의 그 한 숟가락의 쌀밥은, 배를 채우는 음식을 넘어선 사랑과 배려의 증표였다.
어린 시절의 학교에 가는 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낡은 책 보따리를 등에 메고 십리(약 4km)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 다녀오신 할아버지께서 선물이라며 운동화 한 켤레를 내게 내미셨습니다.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발에 꼭 맞는 운동화는 저의 느린 걸음을 재촉하는 날개가 되어주었다
학교를 다녀온 여름날 오후는 다시 할아버지와의 노동으로 이어졌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까지 할아버지를 따라 집에서 논과 밭을 일구고 소달구지를 끌었던 누런 일소를 몰고 올라갔다.
소가 풀을 뜯는 모습을 지켜보며, 저는 조용히 농촌의 삶과 자연의 이치를 배웠다
하지만 중학교 진학과 함께 고난은 더욱 깊어졌다. 학교까지 통학 거리가 무려 삼십 리(약 12km)였기에 어쩔 수 없이 자취를 시작해야 했다. 문제는 늘 학비였다. 돈이 없어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항상 담임 선생님께 불려 가고, 집에 와서도 해결책이 없어 동네 이웃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다.
옆집 근동이네 집, 광평이제 집, 반동아재집 등 주변을 전전하며 운이 좋으면 그날 돈을 빌린 돈으로 겨우
수업료를 냈다. 그러면 아버지는 농사지은 추곡 수매대금을 받거나 아니면 우리 집 근처 대나무를 팔아
빌려왔던 학비를 갚으셨지만, 학교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죄책감이 될 만큼 고통스러웠다.
학교생활이 힘들고 빈곤한 생활이었기에 공부도 그만하고 싶고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최소한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할 것 같아 누나와 여동생은 상급학교인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힘들고 가난에 지긋지긋한 농촌생활에서 벗어나고파 읍내에 소재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될 때면 되라는 마음으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도시인 광주로 연합고사를 치르러 갔다.
어차피 가정이 어려우니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해 나중에 은행원이 되기 위해 광주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인문계고등학교로 배정받아 고생 고생하며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농촌이 지긋지긋해 학교를 그만 중도 포기할 요량으로 대도시인 광주지역에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받았으나
똑같은 가난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돈도 없고, 쌀과 반찬까지 다 떨어지니 일주일에 한 번씩 시골집에 내려가도 아버지는 학비는커녕 시내버스비와 반찬을 사 먹을 용돈조차 제대로 주지 않으니 고난은 계속되었다.
한창 먹어야 할 10대 학창 시절에 돈이 없어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해 점심시간에는 친구들 몰래 수돗가로
달려가 수돗물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고, 초라한 슬레이트 지붕 자취집에서는 돈이 없어 같이 자취를 했던
백 중 이와 재래식 화장실의 바닥 판자를 걷고, 악취가 심한 분뇨를 퍼서 집 근처 밭에 거름으로 뿌려주는 일까지 하며 자취 생활을 연명해야 했다.
이 모든 고통 속에서 저의 마지막 피난처이자 희망은 오직 할아버지였다. 토요일 오전수업이 끝나면 완행버스를 타고 시골집에 내려와 수업료 때문에 고민할 때, 아버지는 돈이 없다며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보라 하였다.
어느 날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학비 이야기를 하니, 할아버지는 조용히 방 한쪽 선반에 쌓아둔
한문 책들 여러 권을 더듬으셨다.
작은아버지들이나 명절에 자식들이 조금씩 세뱃돈으로 드린 용돈을 모아두신 돈이었다..
증조할아버지가 사용하셨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 한문 책갈피 속에는 종이로 여러 겹 싸서 보관한 몇 장 되지
소중하고 귀하고 1년 이상 보관한 할아버지의 쌈짓돈이었다.
이렇게 소중하고 귀하게 보관한 쌈짓돈을 고향을 떠나 고생하는 장손을 위해 몰래 비축해 두신 비밀금을
종손자의 학비로 사용했는데 어린 내 가슴이 여미었다.
할아버지께서 그 쌈짓돈을 꺼내 저에게 건네주실 때, 제 마음은 찡했고 눈물이 솟구쳤다.
그때 저는 "할아버지, 제가 빨리 돈 벌어서 용돈 많이 드릴게요."라고 맹세했다.
그 돈은 나에게 단순한 학비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껴주는 분의 헌신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 대신 하루라도 빨리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면직원'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힘들고 힘들게 고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때 지금 9급 공무원인 5급을 행정직 시험에 낙방하는 쓰라림도 맛보았다. 참으로 내 소년기 시절은 힘든 고난의 세월이었고,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그 세월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기억이다.
그 힘든 시절을 이겨내고, 제가 성실하고 곧게 성장하여 공직 생활 35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거두어 주신 할아버지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할아버지의 쌈짓돈이 나의 삶을 구원했듯, 그분의 따뜻한 정신이 제 삶을 끝까지 올곧게 인도해 주었음을 항상 감사드리고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은 다 멀리 떠나셨지만 매일 생각나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