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매서워질수록 나는 아침마다 가볍게 김밥을 싸 들고 집을 나서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손끝으로 가발을 살짝 고쳐 쓰는 순간부터 그날 하루의 마음가짐이 정리되는 듯싶어 약한 바람에도 머리가 시렸던 지난겨울들이 문득 떠오르고, 젊은 시절에는 체면과 고집 때문에 차마 시도하지 못했던 가발이 이제는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해 주며 사람들 앞에서 주저함 없이 웃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벗이 되어 있어, 왜 나는 이 간단한 선택을 좀 더 일찍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머리 빠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그 오래된 문화와 체념이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에 잠시 멈칫하게 되지만, 이제 와서야 비로소 머리칼 하나에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가발이 주는 위로 같은 것을 조용히 되새기며 골목을 걸어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경로우대 카드를 찍고 전동차에 올라서면 차가운 금속 의자 너머로 스며드는 겨울 햇빛이 눈을 편안하게 감기게 하고, 나는 이 작은 이동 시간이 나를 천천히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통로처럼 느껴져 어느새 마음속에서 그날 읽고 싶은 책의 제목들이 하나 둘 떠오르고, 도서관의 조용한 책장 사이에서 하루를 보내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공부라기보다 오히려 ‘생각을 다시 고쳐 쓰는 행위’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젊은 시절엔 늘 일에 쫓기며 나 자신을 한 번도 제대로 되돌아보지 못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시간을 잡아끄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버려 두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듯해 그 단순함이 어쩐지 참 좋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따뜻한 열람실이 나를 맞아주고, 그 조용한 공간 속에서 문득 전날 친구들과 치던 당구가 떠올라 오랫동안 나오지 않던 감각이 어쩐지 다시 되살아나 기분이 좋아지고, 스크린골프에서 가끔 공이 시원하게 뻗어나갈 때 느껴지는 그 묘한 해방감 같은 것들이 인생 후반기를 외롭지 않게 지켜주는 사소한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며, 누군가는 나보고 배부른 소리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젊을 때 해외도 다녀보고 취미도 즐기고 여유도 누렸던 사람들이고 나는 그 시절 내내 가족과 생계를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또 일하며 살아왔으니 지금 얻은 이 조용한 여유는 결코 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늦게 도착한 작은 선물 같은 것이라 스스로에게 천천히 말해주고 싶다.
문득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와 아내가 하루 종일 주식 방송을 틀어놓고 단타로 얼마를 벌었는지 잃었는지 중얼거리며 숫자들을 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그러한 돈의 오르내림에 마음을 예민하게 묶어두는 삶이 나에게는 맞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돈을 잃었을 때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애초에 그 세계로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훨씬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판단이 들어 그저 도서관에서 보낸 하루를 아내에게 조용히 들려주며 늦은 저녁을 함께 먹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러다 가끔 찜질방이라도 가자고 해보면 아내는 요즘 집을 정리할 단계라며 짐을 줄여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마음에 드는 것은 슬쩍슬쩍 들여놓는 모습을 보면 ‘그게 또 사람 사는 모습이지’ 하고 피식 웃음이 나는데, 나에게는 줄이라고 하면서 본인은 늘리고, 나는 줄이면서도 그걸 뭐라 하지 않는 이 오래된 익숙함이 부부라는 관계가 가진 가장 깊고도 단단한 균형 같다는 생각이 조용히 든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나면 60대 후반을 지나 70대를 바라보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라는 사실을 문득 실감하게 되고, 어릴 적에는 70대라고 하면 모두 쇠약하고 힘이 빠진 존재라고만 여겼지만 막상 그 나이가 가까워진 지금의 나는 나름의 리듬도 있고 일정도 있고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사람도 만나며 젊을 때와는 또 다른 생기를 간직하고 있어, 이 시간이 오히려 내 인생 전체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편안하게 숨 쉬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고, 아침이면 김밥을 하나 들고 가발을 자연스럽게 고쳐 쓰고 지하철을 타 도서관으로 향하는 이 단순한 하루가 처음엔 소박한 듯 보이면서도 실은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삶의 모습이었음을 깨닫게 되며, 마음 맞는 사람들과는 하루쯤 국내 여행도 가보고, 여건이 된다면 일주일 살기도 하고 한 달 살기도 해 보며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잠을 자고 걷고 먹고 웃는 그런 단순하고도 큰 행복을 천천히 그리게 되고, 겨울 아침 공기 속을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지금 이 시간 70대를 눈앞에 두고 내 인생에서 가장 잔잔하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나답게 살아가는 순간이 아닐까.’
그리고 그 생각이 들고 나면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비록 날씨는 춥고 바람은 매섭지만 마음만은 묘하게 따뜻해져, 이 겨울 햇살처럼 조용히 빛나는 이 시간을 오래오래 곱게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또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