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고구마와 무

by 자봉

밤이 깊고 길다.

동지가 다가온다

어둠은 유난히도 무거워, 잠결에 몇 번이고 뒤척이다 결국 이른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뜬다. 적막한 거실, 냉장고 불빛에 의지해 고구마 하나를 꺼내 씹다 보니, 입안에 맴도는 것은 달콤함보다 진한 그리움이다.


나의 시계는 어느덧 수십 년 전, 흙냄새 자욱했던 고향의 겨울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남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낮은 초가지붕이 포근히 내려앉은 그곳이 나의 생가다.


그 시절 우리 집 방 한구석에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고구마 보관장소가 있었다. 아랫목의 온기와 방 가장자리의 한기가 묘하게 섞인 그곳에서 나는 고구마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곤 했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하지만 겨울은 가난하기보다 오히려 풍성한 기다림의 계절이었다. 가을 끝자락, 아버지는 가을에 수확한 밭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짚을 깔아 '무 저장고'를 만드셨다. 무를 차곡차곡 쌓고 다시 짚과 흙을 두툼하게 덮어두면, 그것은 우리 가족의 든든한 겨울 보물창고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그 무를 캐러 나가는 날이면 날씨가 차가워 항상 비장한 각오로 무장을 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니, 땅속 무만이 유일한 신선식품이었다. 겹겹이 옷을 껴입고 털모자를 눌러쓴 채, 내 몸보다 무거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나선 새벽길. 꽁꽁 얼어붙은 땅은 좀처럼 속살을 내주지 않았지만, 곡괭이질 끝에 짚더미 사이로 뽀얀 무가 얼굴을 내밀 때면 그 찬란한 빛깔에 가슴이 설레었다.


바구니 가득 무를 담아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시린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아이구, 이 추운 데 고생 많았다." 그 투박한 격려 한마디에 어린 마음은 칭찬의 온기로 가득 찼다. 그렇게 가져온 무는 뜨끈한 국이 되고 반찬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늦은 밤, 마루에 내놓아 살얼음처럼 차가워진 생무를 동생들과 나눠 먹던 순간이다. 숟가락으로 무의 속살을 빡빡 긁어 한 입 가득 넣으면, 그 시원하고 달큰한 즙이 온몸의 갈증과 배고픔을 씻어주었다. 그것이 우리가 긴긴 겨울밤을 견디던 가장 정겨운 방법이었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언제든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의 허기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빛바랜 사진 속, 무릎에 막내를 앉히고 인자하게 웃으시던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본다. 함께 무를 긁어먹던 형제들의 앳된 얼굴도 이제는 아득한 풍경이 되었다.


오랜만에 찾아본 고향의 생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나를 반겨주던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뒷산의 굽이진 능선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그 품에서 북작거리며 살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떠나버린 것일까. 주인 없는 고향 마당엔 첩첩이 쌓인 적막함과 지나간 추억의 그림자만 서성인다.

오늘 새벽, 나를 깨운 것은 허기가 아니라 어쩌면 그때의 온기였는지도 모른다. 숟가락으로 무를 긁던 소리,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 얼어붙은 땅속에서 길어 올린 생명력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람들은 가고 풍경은 변했어도, 내 마음속 땅속 저장고에는 여전히 그 소중한 기억들이 얼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긴 밤이 지나고 나면, 내 아이들에게도 사진 속 이 달큰한 추억 한 조각을 들려주고 싶다.

긴긴 겨울밤이 계속되니

옛 농촌의 고향 생각이

이토록이나 간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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