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좋아

by 자봉

내 고향 장흥에 종종 내려와 살며 가장 먼저 되찾은 것은 ‘감각’이었다.

잊고 지냈던 흙 내음, 계절마다 바뀌는 바람의 온도,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유년의 기억들이 이곳의 산천을 마주할 때마다 하나둘 선명하게 살아났다.


내 유년의 기억은 이른 새벽,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부엌에서 시작된다. 어머니는 대가족의 아침을 열기 위해 남들보다 먼저 몸을 일으키셨다.


난방도 전기도 없는 산골마을에서 겹겹이 헌 옷들을 포개어 입고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넣으며 군불을 지피시던 어머니의 뒷모습.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던 불꽃은 어머니의 얼굴을 발갛게 비추었고, 그 온기는 구들장을 타고 올라와 잠든 식구들의 등을 따스하게 데워주었다.


매캐하면서도 구수한 연기 냄새와 함께 가마솥에서 밥 익는 단내가 집안 가득 퍼지면, 비로소 우리 가족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그 지극했던 정성이 오늘날 나를 지탱하는 가장 밑바닥의 힘이었음을, 장흥의 고요한 새벽녘에 문득 깨닫는다.

그 시절 어머니가 지피시던 군불의 온기는 이제 용두산의 다정한 숲길과 상방이 마을의 정겨운 골목길로 이어진다.


마을뒤의 산

용의 머리를 닮았다는 용두산은 거창한 위세보다는 낮은 언덕처럼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그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상방이 마을의 골목을 걷다 보면, 담벼락 너머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낮은 돌담 사이로 고개를 내민 감나무와 계절 꽃들을 보며, 나는 어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아침상 같은 평화를 느낀다.


화려한 건축물은 없어도 사람의 손때와 시간이 묻어있는 이 마을은, 내 메마른 정서를 보듬어주는 거대한 안방과도 같다.

마을을 벗어나 위용을 자랑하는 제암산 앞에 서면, 어머니의 사랑과는 또 다른 엄격한 가르침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임금 바위가 내려다보는 그 장엄한 기상은 세파에 흔들리는 내 마음을 다잡아준다. 그 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해동사는 장흥이 간직한 올곧은 정신의 결정체다. 타향의 의사를 위해 사당을 짓고 대를 이어 향을 피워온 사람들의 마음은, 자식들을 위해 새벽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어머니의 헌신과 닮아 있다.


대상은 다르지만 누군가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장흥을 지탱하는 진정한 힘일 것이다.

이 모든 풍경을 끌어안고 흐르는 탐진강은 장흥 생활의 마침표이자 쉼표다. 강변을 걷노라면 굽이굽이 흐르는 물줄기가 마치 어머니의 주름진 손등처럼 애틋하게 다가온다.


거친 바람을 맞아가면서도 멈추지 않고 맑게 흐르는 강물은, 대식구의 끼니를 거르지 않고 챙기며 묵묵히 삶을 일구어 오신 어머니의 세월을 닮았다.


1 급수의 맑은 물이 은어를 키워내듯, 장흥의 대지는 그 넉넉한 품으로 나를 다시 키워내고 있다.


장흥에 자주 와서 살아보니 알겠다.

이곳은 단순히 남도의 한 고을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나를 찾고 어머니의 사랑을 복원하는 공간이다. 제암산의 기개와 용두산의 자애로움, 상방이 마을의 소박함과 탐진강의 유연함 속에 내 유년의 아궁이 불꽃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른 새벽 어머니가 지피셨던 그 뜨거운 군불처럼, 장흥은 차가워진 내 가슴을 여전히 따뜻하게 덥혀주고 있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마음은 즐겁고

가슴은 설렌다


포근한 고향집 흙을 밟으면서 번지수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함께 살았던 부모 형제와 조부모 일가친척 이웃들이 멀리 가버리고 떠나버리니 마음은 허전해도

그리움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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