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강 굽이 돌아 상방이 마을에 닿다
1. 남행 열차, 기억의 궤적을 따라
용산역의 소란스러운 공기는 언제나 도시의 분주함을 대변한다. 그 인파를 뚫고 목포행 KTX에 몸을 싣는 순간, 나는 비로소 일상의 허울을 벗어던진다. 기차가 남녘을 향해 매달릴수록 창밖의 풍경은 속도를 늦추며 정겨운 빛깔로 채색된다. 목포에서 다시 장흥행 무궁화 열차로 갈아타는 시간은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의 완성이었다. 마침내 장흥역에 발을 내디뎠을 때, 코끝을 스치는 서늘하고도 맑은 공기는 도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산자수려한 장흥의 산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포근했고, 읍내를 가로지르는 탐진강은 유유히 흐르며 나그네가 된 옛 주인을 묵묵히 맞이했다. 강진과 해남, 영암을 잇는 새로 닦인 길들과 정비된 논과 도로들을 보며,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고향은 부지런히 자신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음을 실감했다.
2. 낡은 방 안에서 마주한 겨울의 숨결
이번 귀향은 단순히 쉬러 온 길이 아니었다. 장흥 군청에 들러 볼일을 보고, 집 마당 한복판을 차지한 전봇대를 옮기기 위해 한전 직원과 머리를 맞댔다. 상방이 마을 옛집으로 향하는 길, 한전 직원과 함께 도면을 검토하고 현장을 살피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일렁였다.
작년에 보훈청과 굿네이버스, 그리고 대기업의 예산 지원을 받아 부엌과 화장실을 손본 덕에 집은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식으로 바뀐 안방과 달리, 할아버지가 생전에 기거하시던 사랑방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전기 판넬을 깔아 바닥은 지글지글 끓는 온돌방처럼 따뜻했지만, 문제는 성긴 문틈으로 사정없이 스며드는 '황소바람'이었다. 이중창을 해 넣지 않은 사랑방의 문은 겨울의 매서운 기세를 막아내기에 너무나 가냘팠다.
밤이 깊어지자 시골의 추위는 본색을 드러냈다. 가로등 불빛은 창문을 넘어 방 안까지 훤히 비추는데, 바닥은 뜨겁고 공기는 차가우니 얼굴은 식어가는 기묘한 밤이었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깨어보니 겨우 자정.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옆에 밀쳐두었던 이불을 끌어다 창문을 겹겹이 가렸다. 그제야 거친 외풍이 잠잠해지고 옅은 잠이 찾아왔다. 바닥은 뜨겁고 위는 차가운 그 이질적인 온기 속에서 나는 비로소 고향의 밤에 깊숙이 침잠했다. 불편함마저 고향의 맛이라 자위하며 보낸, 길고도 짧은 밤이었다.
3. 흙 속에 새겨진 어머니의 땀과 사랑
날이 밝아 마당으로 나서니 동생의 부지런함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성했던 대나무 밭을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배추와 무를 심어놓은 풍경을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 땅은 어머니의 눈물과 땀이 서린 생존의 현장이었다. 어린 시절,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어머니와 함께 농약을 치고 묵직한 비료 포대를 나르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게 다 자식들 입으로 들어갈 양식이다" 하시며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시던 어머니. 그때는 그 일이 그저 고되고 싫기만 했고, 흙먼지 묻은 손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닫는다. 그 흙 속에 섞인 것은 비료가 아니라 자식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는 것을. 동생이 수확한 참깨와 검은콩은 아마도 그 시절 어머니가 심어놓으신 정성이 대를 이어 열매 맺은 것이리라. 농작물을 보며 "우리 가족들 가져다 먹으라고 심은 거야"라고 말하는 동생의 투박한 목소리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었다.
(언제나 어머님 품 같은 고향집)
4. 인생 후반기, 고향에서 피우는 우정의 꽃
지금 나의 간절한 숙원은 집 앞마당에서 밭데기, 그리고 조상님들이 계신 산소까지 이어지는 길을 반듯하게 포장하는 것이다. 비록 하루에 버스가 세 번밖에 들어오지 않는 불편한 오지이지만, 옛날에 비하면 이 또한 얼마나 큰 발전인가. 험한 길을 닦아 가족들이 언제든 편히 오갈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고향에 남은 내가 해야 할 마지막 효도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제 나는 이 고향 집에서 새로운 꿈을 꾼다. 현직에서 물러나 앞만 보고 달려온 동료들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으려 한다. 삭막한 도시의 빌딩 숲을 벗어나 산자수려한 장흥의 품 안에서, 함께 땀 흘려 텃밭을 가꾸고 탐진강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인생 후반기의 행복을 나누고 싶다. 낡은 사랑방에 모여 앉아 웃풍마저 안주 삼아 옛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얻는 최고의 휴식이자 축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5. 다시 고향, 나를 완성하는 영토
겨울의 고향은 매섭고 춥지만, 다가올 봄과 여름의 고향은 다시금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찰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골목마다 숨 쉬고 있고, 이제는 퇴직 동료들과 새로운 추억을 쌓아갈 소중한 터전이 된 나의 고향.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려준다. 고통스러운 외풍마저도 돌아보니 그리운 삶의 숨결이었고, 불편한 시골길마저도 정겨운 인생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고향은 언제나 옳다. 내가 나로 돌아갈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영토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나의 인생 철학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나의 영원한 안식처인 상방이 마을로 향하는 꿈을 꾼다. 고향은 나를 길러주었고, 이제는 내가 그 고향을 지키며 인생 후반기의 아름다운 매듭을 지으려 한다
(내고향 장흥역과 억불산을 배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