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있다
고향을 생각하면 먼저 빛이 떠오른다.
눈부시게 맑지도, 그렇다고 찬란하게 화려하지도 않은 빛. 오후가 기울 무렵 논두렁을 스치던 누런 햇살, 바람에 흔들리던 억새의 은빛 물결, 그리고 저녁연기 사이로 스며들던 붉은 노을. 그 빛은 늘 낮게 엎드려 있었다. 그래서 더 따뜻했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어릴 적 나는 그 빛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마을은 늘 그 모양 그대로였다.
돌담은 허물어질 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았고, 공동 우물물은 사철 맑았다.
동네 어귀의 오동나무는 굵은 가지를 벌리고 서서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듯했다.
봄이면 연둣빛 새순이 돋았고,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드리웠으며, 가을이면 낙엽으로 마당을 덮었다.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바람이 울었다.
그 모든 계절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손은 거칠었다.
마디마디 굵어져 있었고, 손등에는 세월이 그은 주름이 깊었다. 논에서 돌아오면 손에 흙이 묻어 있었고, 바람을 맞고 난 뒤에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품은 늘 넉넉했다. 힘든 날에도 먼저 밥을 내어주고, 늦게 돌아온 날에도 말없이 초가집. 싸리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그 품이 당연한 줄 알았다.
도시로 떠난 뒤에야 알았다.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을ᆢ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유난히 좁았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진 거리에서는 별을 찾기 어려웠다. 바람은 건물 틈을 돌아 날카롭게 불었고, 사람들은 서로를 스치며 지나갔다. 누구도 오래 머물지 않았고, 누구도 깊이 묻지 않았다.
그럴 때면 문득 고향 상방이 마을이 떠올랐다.
좁은 들판 위로 흐르던 구름, 이름 없이 피었다 지던 들꽃, 개울가에서 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저녁이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어머니의 모습.
연기가 하늘로 오르던 장면이, 내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선명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직장도, 명함도, 사람들의 인사도.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얼굴에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달려온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고향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다가온다.
고향의 산은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바위는 비바람을 맞으며 자리를 지키고, 나무는 제 몫의 햇살을 받으며 자란다.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누구를 밀어내지 않는다. 그 단순한 삶의 방식이 오히려 깊은 울림을 준다.
어머니도 그랬다.
많이 말하지 않았지만, 늘 자리를 지켰다. 기쁠 때도, 서러울 때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밥상을 차리고, 헌 옷을 기우며, 자식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세상의 어떤 격려보다도 큰 힘이 있었다.
지금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낙엽이 흔들리면, 어딘가에서 그 음성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괜찮다. 다 지나간다.” 그 한마디가 삶을 붙들어 준다.
나는 마음이 우울하거나
외롭고 쓸쓸할 때
아니면
하늘나라로 너무 일찍 떠난 남동생들과 누님
엄마ㆍ할머니ㆍ할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울 때면 고향을 찾는다.
마을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집들은 줄어들고 없어지고
사이좋게 지냈던 이웃들은 별세하셨거나 객지로 떠났고
모르는 사람들이 새로 집을 짓고 터전을 잡았다 ㆍ
논도 줄어들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끊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고향의 산 들은 그대로이고, 하늘은 여전히 넓다. 돌담 사이에 핀 풀꽃은 여전하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계절을 견디는 것들이 있다.
그 앞에 서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욕심도, 후회도, 서운함도 잠시 내려놓게 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나를 꾸짖지 않는다.
다만 안아준다.
돌아와도 좋다고, 쉬어가도 좋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장흥 읍내 건축물)
어쩌면 고향은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자리일지 모른다.
지쳐 있을 때 돌아가 기대고 싶은 자리, 스스로를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자리. 그 자리가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했던 그 들판,
가을 햇살처럼 낮게 내려앉던 빛,
그리고 이름 없이 흘러가던 바람.
나는 오늘도 설날이 다가오니 문득 고향을 떠올린다.
그곳은 멀리 있지만, 내 안에서는 여전히 가깝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품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향은 아직도 내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고향을 품고 살아간다.
(고향의 정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