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워 담을 수 없는 세 가지

by 자봉

설 5일 연휴이었지만

고향 장흥에 집은 있어도

내려가지 않았다


고향을 찾아도

고향은 옛 고향이건만

함께 지냈던

지인들은 거의 하늘로 떠나갔고

타향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이방인들은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다

아니 모두다 모르는 분 들이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벽에 걸린 액자 하나를 오래 바라본 적이 있다.

붉은 사과와 푸른 사과가 검은 배경 위에 놓여 있고, 그 아래에는 또박또박 적힌 문장이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세 가지.

흘러가 버린 시간,

놓쳐 버린 기회,

내뱉은 말.

처음에는 누구나 아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 문장은 단순한 경구가 아니라, 내 삶의 결산서처럼 느껴진다.


1. 흘러가 버린 시간

젊은 날의 시간은 늘 넉넉한 줄 알았다.

아침은 늘 다시 오고, 봄은 또 돌아오며, 내일은 당연히 오늘의 연장이리라 믿었다. 그래서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다. ‘다음에 하지 뭐.’ ‘조금 더 있다가.’ 그 말속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스며 빠져나갔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시간은 저수지의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조용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젊음도, 건강도, 부모님과 함께하던 저녁밥상도 그렇게 흘러갔다.

사진첩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젊은 나를 보며 문득 묻는다.

저 사람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흘러간 시간 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바쁘게 걷고 있을 것이다.


2. 놓쳐 버린 기회

기회는 늘 크게 문을 두드릴 것 같지만, 실은 아주 작은 소리로 지나간다.

한 번 더 도전해 볼까 망설이던 순간,

전화 한 통을 걸까 말까 주저하던 저녁,

“그래, 해보자.” 대신 “그만두자.”를 택했던 선택들.

그때는 그것이 ‘기회’라는 이름인지 몰랐다. 그저 일상의 한 갈림길일 뿐이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 작은 갈림길이 삶의 방향을 크게 틀어 놓았음을 깨닫게 된다.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마치 기차처럼 정해진 시간에 잠시 섰다가, 타지 않으면 그대로 떠나버린다. 우리는 플랫폼에 서서 기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뒤늦게야 깨닫는다. ‘아, 저것이었구나.’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각해 본다.

놓친 기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기회를 다 붙잡았더라면,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놓침 또한 하나의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3. 내뱉은 말

세 가지 중 가장 아픈 것은 아마도 ‘말’ 일 것이다.

시간은 자연의 법칙이고, 기회는 운과 용기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오롯이 나의 책임이다.

순간의 감정으로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오래 아프게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속이 시원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시원함이 아니라 후회였다.

말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사과를 한다 해도, 설명을 덧붙인다 해도, 이미 마음에 남은 상처까지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말수가 줄어드는지도 모른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의 무게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를 하기 전에 세 번쯤 마음속에서 굴려보게 된다. 이 말이 누군가를 살릴지, 혹은 베어버릴지.

액자 속 사과 그림을 다시 바라본다.

사과는 단순하고 둥글다. 그러나 그 안에는 계절의 햇빛과 비, 기다림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흘러간 시간과 놓친 기회, 내뱉은 말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주워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남은 시간은 아직 내 손안에 있다.

오늘 하루의 시간은 흘러가기 전이고,

지금 눈앞의 선택은 아직 놓치지 않았으며,

입술에 맺힌 말은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조심스럽게 산다.

조금 더 용기 있게 기회를 붙잡고,

조금 더 따뜻한 말을 건네며,

조금 더 귀하게 시간을 쓰려고 애쓴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세 가지를 알게 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주워 담지 않아도 되도록 사는 법을 배우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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