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어머님과 고모님

by 자봉

일요일 저녁,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예사롭지 않아 현관문을 나섰다. 기상청에서는 영상 16도라 일렀지만, 살갗에 닿는 공기는 이미 숫자 그 이상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봄은 어느덧 담벼락을 넘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오늘은 만 보 걷기라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경의선 숲길로 향했다.

철길이 있던 자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 이 숲길은 좁지도, 그렇다고 너무 덥지도 않아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길 위에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부부들,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손을 잡은 가족들, 그리고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젊은 부모들까지.

수많은 인파가 봄의 전령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그 활기찬 풍경 속에서 문득 내 시선이 머문 곳은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들의 뒷모습이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40년 전, 나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결혼하기 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청춘의 계절.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이나 했을까. 어느덧 예순을 넘겨 '칠순의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 거울 속의 나보다 길 위에서 마주한 젊음이 더 낯익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월의 장난인가 싶다.



어젯밤 꿈속에서는 그리운 얼굴들을 만났다. 83세의 연세로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어머님과 부산 고모님이 우리 고향 집 안방에 앉아 계셨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정답게 나를 맞아주던 그 꿈. 잠에서 깨어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 꿈이 길몽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일까 고민해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는 이들보다 떠나보낸 이들이 많아지고, 쌓이는 것은 추억이요

남는 것은 그리움뿐이라는 사실이 새삼 가슴 저리게 다가왔다.

세월은 참으로 무상하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멈추려 해도 멈추지 않는 것이 시간이다.


하지만 그 무상함 속에서도 자연은 매년 같은 자리에서 봄을 피워낸다. 비록 나의 '청춘'이라는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오늘 경의선 숲길에 핀 봄볕은 여전히 따사롭다. 지나간 세월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고단했던 삶의 무게도 이제는 대자연의 순리에 맡겨야 함을 길을 걸으며 깨닫는다.



이제 세월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끌려가고 싶지 않아. 매일 만 보 이상을 걷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스크린 골프채를 휘두른다. 몸을 가만히 두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은 단순히 수명을 연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아프지 않고, 내 발로 이 아름다운 강산을 누비고 싶은 절실한 소망 때문이다.


인생의 가는 세월과 시간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그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건강은 오롯이 본인이 만들어가야 하는 전유물이다.


젊은 날 악착같이 모으고 아꼈던 돈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 결실을 지혜롭게 써가며 인생의 질을 높여야 할 때다. 내가 건강해야 내가 번 돈도 가치가 있고, 그 돈을 써가며 누리는 여행과 취미가 진정한 노후의 즐거움이 된다.


누군가는 인생의 황혼이라 말하지만, 나는 이제야 진정한 '나'를 위한 인생 후반전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남은 생을 타인의 눈치가 아닌 나의 만족을 위해, 그리고 내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행복을 위해 채워나갈 것이다.



오늘 경의선 숲길에서의 만 보 걷기는 단순한 운동 그 이상이었다.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감사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명상의 시간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님과 고모님이 꿈에 나타나신 것도 아마 "지금처럼 씩씩하게 잘 살거라" 하는 응원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나간 봄을 그리워하기보다 다가올 여름의 싱그러움을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건강을 전략적으로 관리하고, 적당한 여유를 즐기며, 스스로 행복을 빚어내는 삶. 이것이야말로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규칙이자 최고의 지혜일 것이다.


따스한 봄날, 나는 경의선 철길 위에서 정직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베풂을 실천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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