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벌써 2월의 마지막 날이다.
모레면 만물이 소생한다는 3월, 비로소 봄의 시작이다. 겨울 내내 추위에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기지개 켜듯 일으켜 세운다.
어제는 퇴직 동료 셋이서 실내 스크린 골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을 때야 실내 운동만큼 좋은 게 없지만, 오늘처럼 하늘이 화창하고 공기가 맑은 날에는 도저히 안에만 머물 수가 없다. 답답한 공기를 뒤로하고 운동화를 고쳐 신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도, 혹은 무언가에 몰입하다가도 문득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나는 어김없이 안양천으로 향한다.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양평역에 내린다. 역사를 빠져나오자마자 느껴지는 알싸하면서도 포근한 공기. 이것이 바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봄의 전령사다.
안양천 제방길에 올라서니 풍경이 사뭇 다르다. 저 멀리 벚꽃 나무들이 벌써부터 꽃등을 켤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아직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가지 끝마다 입시(入時)를 앞둔 수험생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설렘이 감돈다.
나무 끝이 약간 파랗게, 혹은 내가 표현하기 좋아하는 '시금치색'으로 변해가는 그 미묘한 색의 변화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생명력이란 참으로 경이롭다.
양평역에서 선유도역까지 이어지는 길, 그리고 구청 관계자들이 정성스럽게 관리해 놓은 황토 돗길은 나에게 수행의 길이자 치유의 길이다.
깨끗하게 정돈된 가로수와 나무들을 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공무원들의 노고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사실 사람 사는 게 어디 늘 웃는 일뿐이겠는가.
나 역시 집안 문제로, 혹은 아버지와 남동생, 작은아버지들로 얽힌 해묵은 갈등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스트레스가 가득할 때가 많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때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어 어깨를 짓누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길을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걷다 보면 그 모든 소란스러움이 저 멀리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지하철 소음조차 멀어지고 오직 내 발걸음 소리와 바람 소리만 남을 때, 나는 비로소 고민의 늪에서 헤어 나와 평온을 되찾는다. 남들보다 조금 더 여유롭게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제. 어느덧 내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걷다 보면 다리에 조금씩 통증이 오고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몸이 노쇠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이치다. 나무가 가을이 되면 잎을 떨구고 겨울을 견디듯, 인간의 몸도 계절을 타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개인의 선택이다. 나는 70세의 문턱에서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
영화도 보고 싶을 때 보고, 도서관에 앉아 공부도 하고, 이렇게 내 마음을 담은 글도 쓴다. 최근에는 영어 회화 공부에도 재미를 붙였다. 혀가 조금 꼬이면 어떤가, 새로운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자식 걱정에 밤잠 설치는 동기들이 참 많다.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지 못해 집에서 쉬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한숨 짓는 퇴직 동료들을 만날 때면 마음이 무겁다.
그에 비하면 우리 아이들은 참 고맙다.
제 몫을 다하며 좋은 직장에 다니고, 제 앞가림을 톡톡히 해주니 부모로서 이보다 더한 효도가 어디 있겠는가.
아내와 자식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미 인생의 큰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선유도역 근처 다리 위에 올라선다. 시야가 확 트이며 장관이 펼쳐진다. 저 멀리 북한산의 보현봉과 향로봉이 병풍처럼 서 있고, 양화대교 위로는 차들이 쉼 없이 달린다. 왼쪽으로는 목동의 이대병원과 높은 빌딩 들이 현대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옆으로는 서부간선도로가 동맥처럼 흐른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저 많은 차 속에, 저 높은 빌딩 속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각자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 역시 한때는 저 치열한 흐름 속에 몸을 던져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한 발짝 떨어져 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선유도역 근처에서 퇴직한 지 5년 더 빠른 선배님을 만나 커피 한 잔을 나눈다. 살아가는 이야기, 소소한 일상을 주고받는 그 시간이 향긋한 커피 향만큼이나 달콤하다.
혼자여도 좋고, 마음 맞는 이와 함께라면 더 좋은 이 길. 이곳이 바로 나의 안식처다.
다시 시작되는 봄, 나의 여행은 멈추지 않는다
이제 3월이 오면 옷차림부터 가벼워질 것이다. 두툼한 외투를 벗어 던지고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볼 생각이다. 기차를 타고 혼자서 전국을 유람하는 계획도 세워두었다. 부산 해운대의 푸른 바다를 보며 쉬고, 목포의 정취에 젖고, 여수의 밤바다를 거닐며, 강릉의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듣고 싶다.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여유작작(餘裕綽綽)하게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아프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곧 행복의 정석이다.
오늘 하루도 별 탈 없이, 평온하게 지나간다. 안양천의 물결이 노을을 받아 반짝인다.
내 인생도 저 물결처럼 잔잔하지만 빛나고 있다.
아,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다.
오늘 내가 걸은 이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지난날의 고통을 씻어내고 내일의 희망을 충전하는 '생명의 길'이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나는 다시 이 길 위에 서 있을 것이다. 더 밝은 표정으로,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새롭게 오는 봄길을 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