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
찬바람이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던 그해 겨울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전라도 장흥, 장동ㆍ 대물림되는 가난과 끝이 보이지 않는 농사일은 어린 소년이었던 내게 거대한 벽과 같았다.
흙먼지 날리는 논밭에서 땀을 흘리는 부모님의 뒷모습은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 삶이 지긋지긋해 견딜 수 없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고, 이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무작정 대도시를 그리워하면서
고향을 떠나 광주로 향했다.
손에는 연합고사 수험표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연합고사를 치르고 배정받은 곳은 광주 동운동에 위치한 숭일고등학교였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막상 광주에 발을 내디뎠지만 갈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집에서는 학비는커녕 방 한 칸 얻어줄 형편이 되지 못해 자포자기하고 있어
열여섯 살 그 소년에게 광주의 밤은 너무나 차갑고 막막했다.
막막하던 소년에게 한 줄기 빛이 된 것은 중학교 동창 김백중이었다. 마침 백 중 이의 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가 시골 대나무를 사고팔고 거래를 오랫동안 하고 있어서
그의 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는 각별한 사이셨다
그 덕분에,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백 중 이가 미리 얻어놓은 월산동 자취방에 숟가락 하나를 얹게 되었다.
훗날 광주고등학교에 다니던 중학교 동창 이재룡까지 합류하며, 우리 세 소년의 눈물겨운 '월산동 동거'가 시작되었다.
월산동에서 학교까지는 서방이 종점인 8번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일신 방직과 무등경기장 근처 고등학교까지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고도 화려했다. 동급생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으려 항상 먼저 등교해 책상을 지키던 그 성실함은 아마도 가난이 선물한 독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취 생활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큰 문제는 매달 닥쳐오는 공과금이었다. 시골에서는 용돈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나와 함께 자취하던 백중 이와 나는 매달 공과금을 내지 못해 주인집 눈치를 보며 쩔쩔매야 했다.
미안함과 서러움이 교차하던 나날들, 우리는 주인집에 미안한 마음을 몸으로 때우기로 했다.
집 마당 모퉁이 한구석, 판자로 대충 이어 붙인 야외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그곳의 분뇨가 차오르면 우리는 직접 바케스에 분뇨를 퍼 근처 밭에 뿌렸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가 옷과 몸에 배어들었지만, 그것이 우리가 광주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값'이었다.
그 지독한 냄새가 나는 분뇨를 밭에 뿌리며 나는 생각했다. '반드시 성공하리라. 반드시 이 가난의 냄새를 벗어나리라.' 1학년 내내 우리 세 친구는 그렇게 서로의 고단함을 위로하며 한솥밥을 먹었다.
(1반 급우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해 질 녘이면 무진중학교 앞 어두컴컴한 골목을 지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 길은 지금처럼 가로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긴 골목길은 항상 좁고 불량배라도 뛰쳐나올까 불안해했다.
이렇게 배고픔에 허기가 진 채 어두운 골목을 걸을 때면 달빛에 비친 그림자가 괴물처럼 커 보였다.
무서움을 잊으려 괜히 헛기침을 하거나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 길.
그 좁고 무서웠던 골목이 우리에게는 유일하게 몸을 뉠 수 있는 안식처로 향하는 통로였다.
그 고생 끝에 고등학교3학년 1학기를 대충 마치고
2학기 후반에는 취업을 했다는 빌미로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군대를 다녀오고, 일용직과 음식점 경비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매달렸다.
책을 놓지 않고 계속 공부하여 철도청, 우체국 등 여러 국가기관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결국 지방 행정직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35년을 근무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방송대, 그리고 주말에는 중앙대, 퇴근 후 야간에는 대학원을 다니며 주경야독하던 그 열정의 뿌리는 바로 그 월산동 자취방의 분뇨 냄새 속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는지 ᆢ
어느덧 정년퇴직을 한 지도 8년이 흘렀다. 오늘, 숭일고 3학년 1반 반창 모임을 위해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고개역에 내렸다.
핸드폰 내비게이션을 켜고 무작정 무진중학교 정문을 향해 걸었다. 약 15분 정도 걸리는 그 짧은 길 위에서 나는 52년 전의 나를 만났다.
골목에 들어서니 놀랍게도 발전되어 옛 모습은 느낄 수
없었으나 무진중학교 정문과 가까이에는 문화방송국
과 저 멀리 무등산이 보인다
(광주의 골목거리)
50년 전 내 젊은 청춘이 있었던 그곳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 대신 낡은 단독주택들이 새롭게 큰길을 만들어
살고 있는 모습들이 정겹다ㆍ
길은 넓어졌고 , 담벼락도 많이 보여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은 늦은 것 같지만 어렴풋이 학창 시절에 자취하던
기억이 떠 올랐다
그 어린 시절 우리가 분뇨를 뿌리던 밭은 사라지고 그 당시 소년의 눈물과 땀이 배어 있는 흙내음은 여전한 듯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상은 참 빠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 골목만큼은 시간을 붙잡고 나를 기다려준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그 모진 풍파를 견뎌낸 소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오늘 하루, 고1 때 자취했던 월산동과 백운동 돌고개역
근처를 돌아보며 12000보 넘게 걸었다.
다리는 조금 묵직하지만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상쾌하다.
고단했던 과거를 추억으로 말할 수 있는 지금의 건강과 여유가 감사하다. 이제 곧 만날 3학년 1반 친구들의 얼굴에서 나는 또다시 52년 전의 그 치열했던 청춘을 발견한 것이다.
인생은 참으로 짧고도 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지독했던 월산동의 겨울이 있었기에 나의 인생은 더욱 단단하게 꽃 피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밤, 나는 52년 전 그 소년이었던 나에게 나지막이 속삭여주고 싶다.
그렇게도 삶이 힘들어 여러 차례 자살도 생각해 봤는데 참 잘 견뎌왔다.
너의 그 걸음들이 모여 오늘날 나의 길이 되었다."
나 스스로 열심히 살아온 내게 고맙다
그리고. 너와 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