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해마다 반복적으로 맞는 봄이지만, 칠순의 문턱에서 마주하는 봄은 그 빛깔부터가 남다르다.
창밖으로 전해지는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고, 대지는 겨우내 머금었던 냉기를 뱉어내며 인자한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해진다.
봄은 '불룩한 생명의 젖가슴을 가진 처녀'와 같다. 그 부드러운 희열의 미소가 우리 가슴의 문을 두드릴 때면, 내 안의 멈춰있던 시간들도 기지개를 켜며 깨어난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라 했던가.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직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봄을 보냈으나, 당시의 봄은 내게 '계절의 변화'보다는 '행정의 주기'에 가까웠다. 예산을 편성하고, 사업을 집행하며, 민원을 살피던 그 치열했던 현장에서 봄은 그저 바쁜 일상의 배경일뿐이었다. 하지만 2018년 말, 정든 직장과 행정 사무관의 직함을 내려놓고 맞이한 대지는 비로소 내게 생명의 본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봄은 세 가지의 덕을 지녔다고 한다. 생명과 희망, 그리고 환희다. 땅에 씨앗을 뿌리면 푸른 새싹이 돋아나듯, 퇴직 후의 내 삶도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서울 9988' 건강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8,000보에서 10,000보를 걷는 이 행위는 단순한 운동을 넘어, 내 생명의 지표를 확인하는 경건한 의식이다. 발바닥에 닿는 지면의 감촉을 통해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 걸음마다 희망의 활력을 채워 넣는다. 개나리에서 시작해 진달래, 목련으로 이어지는 봄꽃의 향연은 그 자체로 거대한 환희의 합창이다. 나는 그 합창 속에 섞여 오늘도 도심의 골목과 숲길을 누빈다.
이제 은퇴 이후 나의 하루는 기록으로 시작해 기록으로 끝난다. 도서관의 정적 속에서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는 내게 가장 평온한 음악이다. 좋은 문장을 필사하는 행위는 타인의 지혜를 내 몸속에 새기는 과정이며, 어지러운 생각을 정돈하는 명상이다. 기사에서 말한 '일일일생'의 정신으로 나는 매일 한 편의 글을 쓰고,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만 보의 길을 걷는다.
오늘은 지하철 4호선을 타고 고교 동창이 아파트관리사무소장으로 근무하는 옛 미아리 고갯길을 걸어본다
은퇴 이후에는 도심을 추억 삼아 유람하는 시간도 내게는 소중한 공부다.
변해가는 거리의 풍경 속에서 나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한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노년의 여유가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비로소 인생이라는 사계절의 의미를 깨닫는다. 봄은 처녀처럼 부드럽고, 여름은 어머니처럼 풍성하며, 가을은 미망인처럼 쓸쓸하고, 겨울은 계모처럼 차갑다던 비유는 얼마나 절묘한가. 나는 이제 그 사계절을 모두 한 바퀴 돌아 다시금 봄의 문턱에 서 있다.
이제 산과 들은 조금씩 신록의 새싹으로 발랄하고, 보리밭은 녹색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눈부신 봄날에 나는 나의 자서전을 정리하며 지나온 길을 반추한다. 경주 이 씨 익재공파의 종손으로서, 고향 장흥의 흙내음을 기억하는 아들로서, 그리고 평생을 공직에 헌신한 시민으로서 내가 남길 수 있는 유산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창한 업적보다는 '오늘을 성실히 살았다'는 정직한 기록일 것이다.
고향을 지켜오며 경주이씨 가문의 뿌리를 지탱해 오신 할아버지의 삶 또한 내게는 거대한 봄의 역사다.
그 뿌리로부터 내려온 생명력이 나를 거쳐 나의 딸들에게, 그리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역사는 준비하고 노력하는 민족에게만 기회를 준다
고 했던가!
우리 가족의 역사 또한 매일의 준비와 노력이 모여 찬란한 꽃을 피울 것이라 확신한다.
오늘도 나는 상쾌한 봄 공기를 마시며 집을 나선다. 마음의 봄꽃을 피우기 위해 시민의 덕성을 가다듬고, 정직한 하루를 설계한다. 녹색은 젊음의 상징이자 용기의 상징이다. 일흔의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녹색의 꿈을 꾼다. 내 손끝에서 피어나는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는 따스한 봄바람, 즉 혜풍(惠風)이 되어 닿기를 소망한다.
비록 내일이 어떨지 알 수 없으나, 오늘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의 인생은 영원히 지지 않는 봄날일 것이다.
나뭇가지마다 돋아나는 새로운 잎들처럼, 내 삶의 매 순간도 늘 새롭고 아름다운 축제이기를. 환희의 노래를 부르며, 나는 다시금 푸르른 오월의 푸른 숲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천혜의 땅 남도 신안을 돌아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