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내리는 안양천

by 자봉

벌써 4월도 열흘이 훌쩍 지나간다.

올봄은 유독 성미가 급한 모양이다. 기온이 예년보다 높아서인지 전국적으로 벚꽃과 개나리가 일시에 아우성을 치며 피어올랐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의 색깔이 바뀌어 있다.


아름답게 조성된 안양천 둑길 꽃대궐의 운치를 음미할 겨를도 없이, 사방이 온통 벚꽃과 개나리의 날갯짓으로 가득하다. 가는 곳마다 하얀 꽃 세상이니, 은퇴한 이의 마음도 속절없이 일렁인다.

공직을 떠난 지 어느덧 8년, 내 나이도 이제 일흔 줄에

가까워 진다

35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방자치단체의 행정 현장에서 보냈으니 이제는 좀 쉬어도 될 법한데, 몸에 밴 성실함은 좀처럼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4년 전 직장을 그만둔 아내도 집에서만 머물기가 어색했는지, 평소 따두었던 자격증을 꺼내 들고 어르신 인지 능력 향상을 돕는 일자리로 취업해 나갔다.

하루 세 시간씩 자기보다 더 연배가 높은 어르신들을 가르치러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나 역시 작년 예순여덟까지는 어떻게든 서류를 넣고 일을 찾아보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는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어디에 서류를 넣어도 나를 반겨주는 곳이 드물다.

서운한 마음도 잠시, 나는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전에는 주식 창을 들여다보며 소일거리 삼아 용돈 벌이를 하고, 오후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글을 쓰며 보낸다.

어제는 운 좋게 주식으로 이삼십만 원을 벌기도 했으니, 오늘 하루쯤은 오롯이 계절의 정취에 나를 맡겨도 좋으리라.


오늘 무작정 집을 나섰다. 벚꽃이 다 지기 전에 이 찬란한 계절을 온몸으로 누리고 싶었다.

지하철 5호선에 몸을 싣고 양평역에 내렸다.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사 들고 천천히 안양천 둑방길로 발을 내디뎠다.

양평역에서 선유도역까지 이어지는 이 안양천 길은 참으로 보배로운 곳이다. 영등포구청에서 정성껏 관리한 덕분에 길 양옆으로 왕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그 발치에는 노란 개나리가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얗다 못해 눈부신 꽃터널 아래를 걷노라면, 가냘픈 바람에도 꽃잎들이 ‘부스스’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쏟아지는 꽃비라니. 그 황홀한 광경 앞에 우울했던 마음과 일상의 스트레스는 눈 녹듯 사라진다.

길을 걷다 보니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시민들을 위해 조성해 놓은 황토길이 길게 뻗어 있고, 곳곳에 야외 운동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구청에서 신경 써서 걸어놓은 ‘시(詩) 구절’들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을 입속으로 읊조리며 걷다 보니, 메말랐던 감정이 다시금 살아나고 지나온 인생의 편린들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수십 년 전, 우리가 젊었을 적만 해도 이런 풍경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는 산천이 우거져 있어도 무서워서 함부로 다니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가. 벚꽃길, , 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길들이 다듬어져 있으니, 대한민국이 참으로 좋은 세상이 되었음을 새삼 실감한다.

이 좋은 길을 평일의 한적함 속에 홀로 걷고 있자니, 문득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지며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역시 어머님이다. 우리 어머님은 평생을 엄한 아버지와 결혼해 사시면서 종갓집 며느리라는 무거운 멍에를 지고 고생만 하셨다.

하루하루가 힘든 삶의 연속이었지만 오로지 자식들 뒷바라지에 당신의 청춘을 다 바치셨다.

그러다 변변한 호강 한 번 못 해보시고 세상을 뜨셨다. 만약 어머님이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비록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셨을지라도 내가 직접 밀어드리며 이 꽃비를 함께 맞았을 텐데.

하얗게 흩날리는 벚꽃 잎이 꼭 어머님의 고왔던 명주 저고리 같아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머님 곁에는 항상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던 동생들이 있었다. 형제 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통하고 효심이 깊었던 금채와 병희. 누나와 남동생이었던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나의 은퇴 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풍성하고 즐거웠을 것이다.

벚벚이 흐드러진 이 길에서 동생들과 오손도손 옛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혼자 걷는 이 길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비례해서 커져만 간다.

"아하, 우리 엄마, 내 누나, 내 남동생들... 살아 있었더라면 이 좋은 세상을 얼마나 좋아했을까."

혼잣말을 내뱉으며 안양천을 바라본다.

흐르는 물은 말이 없지만, 내 마음속의 강물은 그리움의 파도를 일으킨다.

하지만 나는 슬퍼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내 곁에 없기에, 나는 그들의 몫까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눈에 담고 가슴에 새겨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발걸음은 선유도 공원을 향한다. 그곳에 가면 또 다른 봄꽃들이 나를 반겨줄 것이다.

평일이라 인파도 많지 않으니,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목이 마르면 편의점에서 준비한 생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금 꽃길로 스며든다.

칠십이라는 나이, 누군가는 저무는 해라고 말할지 모르나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인생의 진짜 색깔을 보고 있다. 비록 서류를 받아주는 곳은 없어도, 내 손에는 글을 쓸 수 있는 펜이 있고 내 발에는 만보를 거뜬히 걷는 건강함이 남아 있다.


나는 다짐한다. 남은 생은 오늘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노라고. 벚꽃이 지고 나면 또 다른 초록이 올 것이고, 그 계절마다 나는 또 다른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먼저 간 가족들도 하늘나라 어디에선가 이 꽃길을 걷는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으리라 믿는다.


꽃비가 내린다. 하얗고 고운 꽃잎들이 내 머리칼 위에 내려앉는다.

마치 "잘 살고 있다, 애썼다"라고 다독여주는 가족들의 손길 같다. 나는 그 손길에 힘입어 다시 힘차게 발을 내디딘다. 선유도 너머, 더 아름다운 인생의 후반전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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