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불편한 현실

by 성주영

*들어가기 전: 어제 올린 ‘일본: 해결되지 않는 찝찝함‘ 편과 이어집니다. 이번 글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글이며 한국의 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든 글일 수 있는 데다 글쓴이 본인의 개인적•정치적 견해와 생각 역시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분량 역시 어제보다 길기에 지루할 수 있으므로 이 점 유의하시며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냥 ‘이런 사건도 있었구나.‘하고 넘어가시면 됩니다. 일본과 관련한 시리즈는 민감한 터라 올리기가 참 눈치 보이기도 합니다. 눈엣가시여도 너그럽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3. 일제강점기(위안부, 강제 징병, 강제 징용 등)와 관련한 배상과 사과 그리고 한국의 문제점: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이따금씩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사과•배상 여부를 두고 대립한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주장대로 사과와 배상을 한 적이 없을까? 미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면 답은 아니다. 먼저 한국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 타임라인을 한 번 살펴보자.(타임 라인이 방대하니 귀찮은 독자들은 그냥 넘어가도 된다. 그러나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한-일 관계에 대한 올바른 고민을 위해 처음부터 읽어보길 권유한다.)


1. 1965년 2월 17일: 당시 일본의 외(무)상(=외교부장관)이었던 시나 에쓰사부로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양국 간 오랜 역사 중에 불행한 시간이 있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 깊이 반성합니다."라고 말했다.


*외상: 한 국가의 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에 대한 명칭 ex) 일본 외무상 = 일본 외상 = 일본 외교부장관


2. 1965년 2월 20일: 한•일 외상 공동성명에 "과거의 관계는 유감스럽고, 일본은 깊은 후회를 느낍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3. 1982년 8월 26일: 미야자와 기이치 관방장관은 아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


"일본국은 한국에 대하여는 일•한 공동 코뮈니케 중에서 ‘과거의 일은 유감이며 깊이 반성하고 있다.'라는 인식을 •••(중략)••• 밝힌 바 이것은 전술한 일본국의 반성과 결의를 확인한 것이며 현재에도 이러한 인식에는 추호의 변화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일•한 공동 코뮈니케•••(중략)•••의 정신은 일본국의 학교, 교육, 교과서의 검정에 임하는 데 있어서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한 공동 코뮈니케: 2. 에 언급한 한•일 외상 공동성명을 의미함


**관방장관: 일본의 내각관방을 이끄는 주요 직책이며 내각관방의 최고위직임. 여기서 내각관방은 한국의 대통령비서실과 같고, 관방장관은 한국의 대통령비서실장과 동급임.


4. 1983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일본 총리가 최초로 방한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불행한 과거사에 대해 일본은 엄숙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5. 1984년 9월 6일: 히로히토 천황(=쇼와 천황)은 당시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금세기의 한 시기에 양국(한국과 일본)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천황: 고유명사로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정식 용어 지도자의 칭호는 해당 국가에서 통용되는 고유한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함. (자세한 내용은 2. 천황 파트 참고)


**히로히토 천황(=쇼와 천황): 1926~1989년 동안의 일본 천황


6. 1984년 9월 7일: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일본은 한국에 숱한 고난을 겪게 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이 과오에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장래를 위하여 엄숙히 계심하려고 결의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계심하다: 마음을 놓지 않고 경계하다


7. 1990년 5월 24일: 당시 일본의 천황이었던 아키히토 천황(=헤이세이 천황)은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키히토 천황(=헤이세이 천황): 1989년~2019년 동안의 일본 천황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 뼛속 깊이 뉘우치다


8. 1990년 5월 25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가이후 도시키는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한 시기에 한반도의 국민들이 일본의 행위로 인해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겪으신 데 대하여 겸허히 반성하며 솔직하게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9. 1993년: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의 입장을 밝혔다. 이는 고노 담화라고도 불리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부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위안소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이는 군의 개입으로 많은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킨 행위였다. 일본 정부는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상처를 입은 위안부 여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참회의 뜻을 전한다."


10. 1995년 6월 9일: 일본 중의원에서 발의한 결의안인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로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있다.


"세계의 근대 역사상에서 수많은 식민지 지배나 침략적 행위를 생각해, 우리나라가 과거에 행한 이러한 행위나 다른 나라의 사람,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국민께 준 고통을 인식하고, 깊은 반성의 뜻을 표명합니다."


11. 1995년 8월 15일: 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무라야마 담화다. 이는 일본의 가장 적극적인 식민지배 사죄로 평가받으며 외교적으로도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과 표명이었다. 그 일부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 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국가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통절한: 뼈에 사무치게 절실한


**다대한: 많고도 큰


12. 1998년 10월 7일: 아키히토 천황(=헤이세이 천황)은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한때 우리나라(일본)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깊은 슬픔을 항상 본인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13. 1998년 10월 8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오부치 게이조는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일본 정부를 대표해서 우리나라가 과거의 일정기간 한국 국민에게 식민지 지배에 의한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의 사죄를 하였습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은 많은 일본인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후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14. 2001년 4월 3일: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의 논평 중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기간 동안, 많은 나라의 국민들에게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게 식민 통치와 공격을 통해 큰 피해와 고통을 일으켰던 것을 겸손히 인정하며, 이것에 대해 깊은 참회와 진실한 사죄를 표합니다. 이러한 인정은 이후 내각에 의해 계승되었고 현재 내각에서는 이것에 관한 변화가 없습니다."


15. 2001년 10월 15일: 옛 서대문 형무소 터인 서대문 독립공원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는 아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데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마음으로부터 사과합니다."


16. 2003년 8월 14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는 전몰자추도식 추모사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습니다. 국민의 대표로서 반성의 뜻을 표합니다."


17.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가 발표한 담화 즉 고이즈미 담화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국은 일찍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함과 더불어 지난 대전(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내외의 모든 희생자께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18. 2006년: 당시 일본 총리였던 신조 아베는 국립현충원에 와서 참배했다.


19. 2007년 4월: 당시 일본의 신조 아베 총리는 미•일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아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


"위안부 여성들이 극도의 고난과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던 상황에 대해 가슴 깊이 애도를 느낀다. 일본의 총리로서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에 대해 사과한다."


20. 2009년: 아소 다로 당시 일본 총리가 국립현충원에서 참배했다.


21. 2010년 5월 29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참배했다.


22. 2010년 8월 10일: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인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받은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으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합니다."


23. 2011년: 노다 요시히코 당시 일본 총리는 국립현충원에서 참배했다.


24. 2012년: 일본의 전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과거사는 100년에 걸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일본인)는 늘 반성하고 성실하게 대응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자자손손 전해야 한다."


25. 2015년 4월: 당시 총리였던 신조 아베는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 전후를 시작했다. 우리의 행위가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26. 2015년 8월 12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순국선열 165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절을 했고,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재차 사죄까지 했다.


27.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종결을 약속한 한•일 위안부 합의 직후에 아베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한다."


28. 2023년 3월: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저는 1998년 10월에 발표된 한•일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비롯해 역사 인식에 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알려드립니다."


29. 2023년 5월 7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국립현충원에 참배했다.


이후 공동 기지회견에서 "저도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한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라며 개인적으로 미안한 심경을 표하기도 했다.


직접적으로 한국을 콕 집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보수 우파가 정치적으로 강세인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가 저렇게나마 간접적 사과를 한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일본 총리라는 사실과 일본 국내 정계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저러한 사과는 일본에서는 사실 목숨 걸고 해야하는 일이다.


30. 2025년 8월 10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아들인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한국으로 치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국립현충원에 참배했다.


31. 2025년 8월 15일: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


“전쟁의 참화를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 전쟁의 반성과 교훈을 지금 다시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이것 역시 위 기시다 후미오의 발언처럼 직접적으로 한국을 콕 집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보수 우파가 정치적으로 강세인 일본의 국내 정치적 상황을 감안해 볼 때(이에 대한 내용도 추후에 순차적으로 업로드될 예정) 자국 스스로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반성‘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아베 전 총리 이후 전몰자 추도사에서 사라졌던 ‘반성’이라는 단어가 13년 만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은 한국에게 끊임없는 사죄와 반성을 해왔다. 그렇다면 배상 문제는 어떨까? 이 문제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를 알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1965년에 맺어진 한•일 청구권협정, 두 번째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40억 달러의 경제협력차관을 제공해 준 것, 세 번째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아시아 여성 기금), 마지막 네 번째는 한•일 위안부 합의다. 추가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이것이 한•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아보자.


1. 한•일 청구권협정: 이 협정은 1965년 박정희 정부와 일본 정부 간에 체결된 협정이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따르면 조약은 단일 문서 또는 둘 이상의 관련문서에 구현되고 있는가에 관계없이, 또 그 특정의 명칭에 관계없이, 서면형식으로 국가 간에 체결되며 또한 국제법에 의해 규율되는 국제적 합의다. 이러한 조약은 법적 구속력이 존재한다. 한•일청구권협정은 이러한 정의에 부합하기에 말만 협정이지 사실상 조약이나 다름이 없다.


이 협정을 통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3억 달러의 무상자금, 3억 달러의 상업차관을 받기로 합의했다. 일제강점기 직후 일본 민간인들이 남한에 남기고 간 22억 달러의 민간 자산도 한국이 취하기로 했다. 이 협정의 2조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있다.


2조 제1항: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일본 주권 회복을 인정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의미함)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2조 제2항: 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 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에 타방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b)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 하에 들어오게 된 것


2조 제3항: 제2항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 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위에서 언급한 제1항은 양국과 양국 국민 간의 재산, 권리, 이익 등에 관한 모든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의미한다. 제3항은 앞으로 양측이 이와 관련해 어떠한 추가적인 주장이나 요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협정으로 일본이 한국에게 줘야 할 돈은 모두 정리가 되었으며 한국 정부가 한국인 피해자들을 대신해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은 것이기에 한국인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당시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을 찾아 배상금을 지급했다. 남한에 남은 22억 달러 가량의 민간 자산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을 제외하고 일본이 넘겨준 무상자금 3억 달러 중 2910만 달러(3억 달러의 9.7%에 해당)는 83,515건에 달하는 피해자 배상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후 남은 무상자금인 2억 7천90만 달러와 3억 달러의 유상 자금은 임업, 농업, 어업과 같은 1차 산업의 공업화와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 포항제철소(현재 포스코의 전신) 건설, 경부 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되었다. 이 중 가장 많이 사용된 부문은 당연컨대 포항제철소 건설이었다. 포항제철소 건설에만 1억 1948만 달러가 사용되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남은 무상자금 2억 7천90만 달러와 유상자금인 3억 달러를 합한 5억 7천90만 달러의 약 21% 정확히는 20.9%에 해당하는 액수다. 하지만 추후 배상이 불충분하다는 논란이 일기 시작한다. 이는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일제강점기 피해 배상 문제가 완료되었다는 것은 한국 정부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일본의 강제 징용을 근거로 일본에게 돈을 추가로 요구하려고 했었다. 이를 위해 문재인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해찬 국무총리 등이 민관 공동위원회를 개최해 7개월 간 수만 건에 달하는 문서를 면밀히 검토했다. 그 결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자금 3억 달러에 강제징용 보상금이 포함된다고 본다. 그러나 1975년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부상자는 배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도의적 차원에서의 배상이 부족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이와 관련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배상금을 받지 못 한 피해자들에게 위로금 형식으로 배상금이 지급되었다. 앞서 말했듯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르면 한국인들을 대표해서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지급받은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하는 것이 맞으므로 이러한 결론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이로써 일본에게도 더 이상 배상 책임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국제법적으로 봤을 때 일본은 한국에게 해야 할 사죄와 배상은 모두 했다. 하지만 일본과 일본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도의적 차원에서의 책임을 지고자 더 많은 돈을 지급했다.


1983년 1월에는 일본의 당시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방한해 전두환 대통령과 회담을 했다. 이때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사과의 의미로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관계 발전을 위해 4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 협력 차관을 제공했다.


이러한 행위는 일본 민간에서도 행해졌다. 당시 일본에서는 법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도 져야 한다는 국내 여론이 있었다. 무라야마 담화에서 언급된 '진심으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국민적 차원에서도 나누고자 한 것이다. 이리하여 창설된 것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아시아 여성 기금)이다. 여기에는 일본 국민들이 모은 기금 5억 7천여만 엔과 일본 정부 보조금인 5억 1000여만 엔 여기에 더불어 내각 총리대신 사과 편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금 중 일부와 내각 총리대신의 사과 편지는 '백마사건'으로 피해를 본 네덜란드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 79명에게 전달되었고, 저 기금들 중 또 다른 일부는 필리핀, 대만,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들로 인정된 285명에게 전달되었다. 위 두 개의 보상 사업 모두 2002년 9월에 종료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다른 국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서만큼은 저러한 일본의 기금과 호의가 폄하당한다.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의 저러한 기금이 일본 정부가 공식적인 책임을 회피하려고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이러한 기금을 받지 말자고 주장하는 여론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위안부 할머니 착취로 논란이 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당시에 그 돈을 받지 못하게끔 위안부 할머니들을 겁박했다. 이러한 사실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관련 단체의 폭로로 드러났다.


"우리는 나이 먹고 자꾸 죽어간다. 아무 데고 마저 주는 돈 받아서 쓰고 죽겠다. 다수가 이거야. 그냥 딴 뜻은 없는 것 같아. 할머니들 요구가 무리도 아니고. 거기서 인제 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국민 기금)을 주지 말라고 일본에 소문을 퍼뜨려 놨더라고 그래서 기금을 주지 말라는 얘기지. (그러니) 보상을 주나? 안 주지. 아무 거고 몇천만 원이나 주면 주는 대로 할머니들 타 먹게 내버려 두지. 죽는 놈 죽고, 사는 놈 살고, 오래 살면 이제 보상 타는 놈 타고, 이렇게 해결해야지. 하는 일이 답답해요.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그런데 모금을 받지 말라, 그것 받으면 더러운 돈이다. 화냥년이다, 이런 귀 거슬리는 소리만 하더라고(석복순, 증언집 5권)"


김정란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논문, 2004년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중심으로' 中


"당신들이 말한 위안부 인권회복 운운에 대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치를 떨고 있습니다. 먼저 원론적인 질문 하나 할까 합니다. 대체 15년 동안 위안부 인권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왔는지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로서는 전혀 체감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대로 인권유린은 당신들로부터 받은 게 참으로 많았습니다. 한 가지 실례로 1997년 2월 27일 정신대문제 어디까지 왔나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윤정옥이라는 당신들의 대표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아시아여성기금을 받는다면 자원해 나간 공창이 되는 것"이라고 공개석상에서 떠들어댔던 일, 그것이 인권회복을 위한 발언이었나요? 상상도 할 수 없을 말을 세치 혀로 조잘댄 윤정옥 같은 사람이 대표로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분명 책임도 지지 못 할 인권유린을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몇 년만 젊어 거동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윤정옥 이 년의 입에 주리를 틀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임 세계평화무궁화회의 성명


'위안부 두 번 울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문 닫아라 - 33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름으로 고한다' 中


*세계평화무궁화회: 1992년 16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서로의 외로움을 공유•위로하기 위해 만든 무궁화자매회라는 단체에서 시작됨. 이후 이 단체의 할머니들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주도하는 운동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 모임 명칭을 세계평화무궁화회로 변경함. 이후 정대협을 향한 비판적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분들 중 한 명인 심 할머니가 당시 회장을 담당함. 한때 이 단체는 회원 수가 16명에서 33명으로 늘기도 했으나 2008년 심 할머니께서 별세하시면서 이 단체의 활동은 중단됨.


하지만 정대협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 한 채 묻혀버린다. 왜 그랬던 걸까? 당시 정대협은 시민단체 중에서 영향력이 큰 단체였고,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져 인지도도 높았다. 사람들은 정대협이 오로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일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무리 정대협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냈어도 각광받기 어려웠고, 여론의 관심을 사기에도 호소력이 있지 않아 공론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정대협의 후광에 의해 가려져 우리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듯 한국 측에서 이런 식으로 일본의 선의를 무시하자 일본 내 여론도 급격히 돌아서기 시작했다.


"20년 전엔 일본 국민 여론도 한국에 대해 진지하게 사죄•보상도 하자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해 한국에서 전혀 평가를 못 받았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실망하는 분위기가 돼 버렸습니다."


2015년 11월 30일: 아시아 여성 기금의 발기인 및 이사를 지낸 오누마 야스아키 메이지대 교수가 국내 언론 인터뷰 中 한 발언


여담으로 이 사태 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한국에서 구호 물자와 기부금을 보냈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거절하자는 여론이 높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위안부 피해 보상은 전부 거절했으면서 이제와서 도와주는 척 손을 내미니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한국의 행동 자체가 위선과 모순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후 2015년 박근혜 행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본 정부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한•일청구권협정 때문에 법적 근거를 가지고 배상 요구를 하기가 불가능했기에 외교를 통해 국제 여론을 활용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우리나라 소녀들을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습니다.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이 당연함에도 뻔뻔하게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2014년 3월 26일: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와의 공식 회담 전 비공개 면담 中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결국 당시 일본의 신조 아베 총리는 이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박근혜 정부는 정상회담 이후 오찬(만찬)을 제공하지 않는 등의 강수를 뒀다. 원래 각국 정상이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에는 오찬(만찬)을 대접해 국빈 방문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외교상의 관습이다. 만약 하지 않는다면 이는 외교적 결례로 비칠 수도 있다.


이 결과 2015년 12월 28일 일본 정부는 일본 내 여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일 위안부 합의에 동의했다. 이 합의의 결과로 한국 정부는 10억 엔(100억 원)의 일본 정부 예산을 받아냈다. 당시 합의에 응했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현 일본 총리)은 합의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본 문제에 진지하게 임해왔으며, 그러한 경험에 기초해 이번에 일본 정부의 예산에 의해 모든 前 위안부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합니다. •••(중략)••• 앞서 말씀드린 예산 조치에 대해서는 대략 10억 엔(100억 원) 정도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내의 여론이 반발하는 건 당연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언급해 왔듯 관련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단락되었고 도의적 차원에서의 모금인 아시아 여성 기금을 통해 배상을 해줬음에도 이를 거절한 건 한국 측이었기 때문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응한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로 인해 박근혜 정부가 탄핵당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한국 정부는 또다시 모르는 척하며 발뺌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 합의가 양국 정상의 추인을 거친 정부 간의 공식적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함께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힙니다."


2017년 12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문 中


이 같은 사태가 계속되자 결국 2018년 2월 9일 신조 아베 총리는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식 참석차 한국을 찾았고,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그는 여기서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위안부 합의는 국가 대 국가의 합의로 정권이 바뀌어도 지켜야 한다는 게 국제적 원칙입니다. 일본이 그동안 약속을 지켜온 만큼 한국 정부도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아베의 말이 과연 맞을까? 한•일 위안부 합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먼저 한•일 위안부 합의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인지 아니면 신사협정인지를 살펴보자.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이 정의하는 조약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단일의 문서 또는 둘 이상의 관련문서에 구현되고 있는가에 관계없이, 또한 그 특정의 명칭에 관계없이, 서면 형식으로 국가 간에 체결되며 국제법에 의해 규율되는 국제적 합의'


이 정의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조약이라는 것은 국제법 주체 간에 권리•의무 관계를 창출하기 위해 서면 형식으로 체결되며 국제법에 의해 규율되는 합의인 것이다. 하지만 한•일 위안부 합의는 서면 형식으로 체결된 것이 아니고 공동발표문 형식으로 발표됐기에 조약으로서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는 못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따르면 신사협정에 해당하며 이러한 신사협정은 당사자들 간의 신의에 기초하기에 한국이든 일본이든 이행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행을 강제할 수도 없다. 다만 한국에서 이 합의와 관련하여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일본은 한국의 행위를 비우호적 행위로 규정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보복조치 정도는 취할 수 있다. 이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를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으로는 못 보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신사협정이라고 하더라도 정부수반•각료 또는 대사에 의해 체결되었을 때는 외관상 조약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럴 경우 당사자들의 의도, 구체성, 내용의 중요도, 강제적인 국제사법절차에 의한 분쟁해결규정 포함여부, 발효를 위한 국내절차규정 포함여부, 유엔에의 등록여부 등을 따져봐야 한다.


한•일 위안부 합의의 경우 체결 당사자들이 일본의 외무상과 한국의 외교부장관이었으므로 당사자들이 정부 수반 또는 각료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위 합의는 조약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요건들을 따져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외관상으로 봤을 때는 조약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에 이런 문장이 나와 있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상의 추인을 거친 정부 간의 공식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한국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으로 인정한다는 취지로 해석될 수 있다. 만약 정말 조약으로 인정된다면 한국이 합의를 잘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일본은 위법 행위로 간주해 복구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렇기에 아베 총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일 위안부 합의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신사협정이든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든 간에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은 일제강점기와 관련한 문제들(강제 징용, 강제 징병, 위안부)에 대해 배상을 끝냈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재론의 여지가 없다. 굳이 배상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를 통해 일본은 추가 배상을 한 것이다.


추가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나와있는 대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제3국을 통해 중재를 받자고 제안했으나 문재인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이미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를 포함한 일제강점기와 관련한 배상은 법적으로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제3국에 의해 중재받을 경우 말이 좋아 중재이지 일본의 손을 들어줄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보면 한국의 이러한 태도는 일본 정부와 국민들에게 분노와 당혹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이외에도 2020년에 있었던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또한 위에서 언급한 정대협 사태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폭로는 위안부가 정의연(정의기억연대/정대협의 후신)에 의해 이용당한다고 생각한 이용수 할머니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와 관련한 논란과 의혹은 심 할머니 때와 달리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실질적인 재판까지로 이어졌다. 1심에서는 6개 혐의 중 5개는 무죄, 1개는 일부 유죄 판결을 받아 벌금 1500만 원형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는 6개 혐의 중 3개는 무죄, 직전의 1심에서 일부 유죄로 판결받은 1개 혐의에 더해 2개의 혐의가 추가로 유죄 판결이 났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6개월,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의혹의 당사자인 윤미향 의원이 항소함으로써 재판은 대법원까지 가게 됐고, 결과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상태다. 사태가 이렇자 한때 일각에서는 “과거 정대협 간부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정계 거물급 인사로 성장했다.”(다시 말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본인의 정치적 커리어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식의 주장까지 나왔었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기사 링크들이다. 기사를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이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다. (자세한 속사정과 뒷계산은 당사자들만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https://www.bbc.com/korean/news-52795933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00526/101210790/1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4557991



https://www.sedaily.com/NewsView/1Z2RXAR35P



이후 윤미향의 이러한 범죄 혐의는 2024년 11월 14일 대법원에서 2심 판결(고등법원에서 받았던 집행 유예 3년, 징역 1년 6개월형)이 그대로 확정 판결받음으로써 기정 사실화되었다. 하지만 형살이가 채 끝나기도 전에 2025년 8월 11일 광복절(8월 15일)을 4일 앞두고 이재명 정부는 윤미향을 광복절 특별사면을 통해 석방시켰다.(개인적으로 이재명 정부에게 가장 크게 실망한 대목이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한 위안부 관련 캠페인과 관련 단체(정의협, 정대협)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때까지 해 온 위안부 운동 방식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단순히 위안부 캠페인을 한다고 해서 그들을 맹신하거나 신격화해선 안 되며 이러한 운동이 적절한 방식으로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 등 꾸준한 감시와 검토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위안부 할머니들을 출세를 위해 활용하는 것, 캠페인 과정에서 횡령이 발생하는 것 등)이 계속 생길 경우 우리 역시도 일본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자격이 없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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