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중심으로
*들어가기 전: 오늘도 역시나 한국의 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입니다. 이 점 유의하시고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런 사실도 있구나‘라고 생각하시고 넘어가셔도 됩니다.
9.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아베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을 모르는 한국인들 역시 없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실체를 한 번 살펴보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초대 수상을 포함해 총 4번의 수상직을 역임했고, 일본의 근대화 운동인 메이지 유신(1868년부터 시작) 동안 이와쿠라 사절단으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1870~1873) 또한 일본제국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인물이기도 했으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여성 대학을 설립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09년 그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한테 저격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한국인들이 유독 이 사람을 비판하는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인물이자 이 조약으로 인해 설치된 통감부(조선 총독부의 전신)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인물로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토 히로부미가 꿈꿨던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토 히로부미가 이와쿠라 사절단으로서 서양의 여러 국가를 시찰하고 돌아왔을 때 일본 내에서는 한창 정한론(한반도 정벌을 내세우는 주장)이 퍼져있던 상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한론파와의 논쟁에서 아직 정한론은 시기상조라며 내치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이 논쟁은 내치파(이토 히로부미 쪽)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렇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에서 명실상부한 실권자가 된다. 그는 한반도가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용해 일본처럼 개혁에 성공할 때까지 일본이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한국이 정치적•외교적 자립을 할 수 있고, 군사력도 어느 정도 갖춰질 때쯤 일본과 한국이 연방 정치를 함으로써 주변 강대국들을 견제하며 쌍방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그가 한 발언들에서도 두드러진다.
1.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한국 합병을 반대하며 한 발언:
"한민족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라를 경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한반도 상황이 나쁜 건 국민들 때문이 아니라 정치 때문입니다. 합병은 일본 입장에서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대한제국이 자치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독자적인 문화를 천 년 이상 갖고 있는 민족을 식민지로 병합한다면 일본으로서는 큰 후환이 됩니다."
2. 1907년 7월 경성 기자회견 중 이토 히로부미의 발언: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은 자치를 요합니다."
3. 1909년 기자회견 중 이토 히로부미의 발언:
“저는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략)•••적절하게 한국으로 하여금 자치 능력을 육성하게 해야 합니다. 한국의 부국강병은 일본이 희망하는 바입니다. 독일 연방 알텐부르크와 같이 한국을 지도하여 세력을 육성하고 재정경제교육을 보급해 마침내는 연방 정치를 펴는 데에 이르도록 지도하는 것은 일본에 이익이 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을사조약에 서명해 달라고 설득했다. 아래는 고종을 설득하면서 그가 했던 발언이다.
1905년 11월 10일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알현해 한 말:
"이 일을 만약 인준하신다면(을사조약 체결을 뜻함) 비단 두 나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도 영원히 유지될 것이니 속히 인준해 주십시오."
매천야록 中
*매천야록: 구한말 학자이자 무인이었던 매천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사료다. 총 6권에 7책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을사조약 체결 1주일 전 고종과 그의 측근들은 하야시 일본공사로부터 2만 원(현재로 약 25억 원에 상당)을 받았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문서의 사진이다.
이후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말대로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한다.
"이토 히로부미 특파대사는 성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붓을 잡고 협약서의 전문 중에 '한국의 부강의 실을 인정할 때에 이르기까지(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의 문구를 첨가하여 다시 이지용 내상, 이재극 궁상으로 하여금 성람에 제공시켰는데 폐하는 특히 만족의 뜻을 말씀하셨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한국특파대사 이등의 복명서 中
고종은 조약에 반대하던 대신이 상소를 올리자 그 대신의 직위를 박탈했다.
"의정부 참정대신 한규설은 황제의 지척에서 행동이 온당치 못 하였으니, 우선 본 벼슬을 면직시키라."
고종 실록 46권, 고종 42년 11월 17일 中
대신들이 조약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기 시작하자 고종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렇듯 재차 들고 나설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이처럼 크게 벌일 일이 아니고 또 요량해서 처분을 내릴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고 서로 거느리고 물러나 즉시 집으로 돌아들 가라."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1월 27일 中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되고 본인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조선 근대화에 착수한다. 아래는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의 지휘 하에 통감부가 세운 1907년~1916년 10개년 사업 대강이다.
1. 간선 도로 완성
2. 경편 철도(임시 철도) 포설
3. 박람회 개설
4. 농업 보호 및 장려
5. 수산 보호 및 장려
6. 목축 장려
7. 삼림 경영
8. 운하 개설
9. 수력전기 공급
10. 치수 사업
11. 위생 설비
12. 교육 사업
13. 국보 보존
14. 재판 제도 구비
15. 공공 오락장 설비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 부문에서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교육을 위해 수많은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에 방문했는데 이토는 이들에게 아래와 같이 당부했다.
"철두철미하게 성실과 친절로써 아동을 교육하십시오. 겉과 속이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본인 교사는 여가를 활용해 조선어를 배우십시오. 종교는 한국민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평론하지 마십시오.“
1907년 4월 14일 한국에 부임한 일본인 교사들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한 연설 中
이 모든 것들이 이토 히로부미가 생각한 한국에 대한 통치 방식과 정한론자들이 생각한 한국에 대한 통치 방식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한론자들과는 달리 온건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정한론자들(강경파)처럼 잔혹하고 강압적으로 통치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을 서서히 교화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한국을 육성시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오•헝 제국은 외교•군사•재무 정책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으나 국왕이 각각 따로 존재했고, 의회도 따로 존재했으며 정부의 각 부처도 따로 존재했다. 오스트리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 모두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에서 비슷한 수준의 권력을 지닌 일종의 연합체였다. 식민지배처럼 종속 관계가 아니었다.)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 동군연합이나 연방을 형성해 양국이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에서 주변국들을 견제해 나가도록 하려 한 것이다. 물론 그의 구상에서도 조선은 여전히 일본과 함께해야 했고, 일본의 세력권 안에 포함되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 매체에서 접하는 전형적인 이미지와 달리, 이토 히로부미는 강경한 정한론자들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다. 그는 직접적이고 강압적인 병합보다 점진적인 교화나 자치적 연합의 방식을 고민한, 당시 일본 정치가들 가운데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접근을 시도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역사 시간 때 배웠던 것과는 달리 고종 역시 이에 일정 부분 동의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로 일본 내 온건파의 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암살당했고 이는 바로 다음 해인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한 가혹한 식민 지배로 이어졌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뒤 정적이 없어진 정한론자(강경파)들은 온건파가 정치적으로 약화된 틈을 타 이토 히로부미가 구상했던 온건한 접근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35년 동안 한국을 지배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