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atros May 24. 2021

로맨스판타지인가, 싸이코스릴러인가?: 후편

신이 된 미녀 프시케

앞의 이야기에 이어서 프시케의 여정을 따라가보고자 합니다.

전편 링크: https://brunch.co.kr/@ef4da8729340415/12


낙원과도 같던 저택을 떠나게 된 프시케는 에로스를 찾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으나 신인 그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산에 버려진 신전에 찾아가 며칠이고 그 신전을 청소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신전의 주인은 농경의 여신 데메테르였는데, 프시케를 딱하게 여긴(페르세포네라는 딸을 매우 사랑하는 성격 상, 어린 여성의 모습이 안타까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기도에 응답하였고, 아프로디테 여신의 마음을 풀어야 에로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에 찾아간 프시케는 온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프로디테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본인을 비천한 종이라 칭하면서 말이죠.

Psyche before the throne of Venus, 1894, Henrietta Rae

원래부터 불경(프시케 본인이 저지른 것은 아니라지만)의 문제로 프시케를 미워했고, 자신의 아들의 마음까지 상하게 한 상태이니 아프로디테가 곱게 에로스를 만나게 해줄리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 신화 속 거의 유일한 고부 갈등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스케일로 말이죠.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자신이 시키는 일들을 완수하면 에로스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보통 인간은 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지시합니다. 

그 여러가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이 영화 '판의 미로' 속의 오필리아와 꽤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테니 여기서는 영화 줄거리를 쓰진 않겠으나, 영화에 대한 해석과 이 글 마지막 부분 내용도 약간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아프로디테 여신이 키우는 비둘기(아프로디테 여신을 상징하는 새)들의 모이 창고로 가서 곡식을 종류별로 구분하여 정리하라는 일을 시킵니다. 물론 인간인 프시케 혼자서는 아무리 오랫동안 일하여도 분류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하는 프시케의 소식을 들은 에로스는 그녀에게 화가 난 것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커졌는지 개미들을 보내어 프시케를 도와주도록 하였습니다. 홀연히 나타난 개미들이 창고 안의 곡식을 분류해서 쌓는 일을 대신해주었고, 일을 마치게 된 프시케가 이를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보고하자, 여신은 프시케가 에로스를 꾀어내었다며 더욱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더욱 어렵고 위험한 일을 시키게 됩니다. 


두 번째의 임무란 바로 난폭한 성격을 지닌 양들에게서 황금양털을 구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양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양들이 아니라 매우 사나운 맹수와 같아서 사람이 다가오면 뿔로 들이 받거나 물어뜯어 목숨을 잃게 만들곤 했습니다. 프시케로서는 양털을 얻으려다가는 꼼짝 없이 죽게 생긴 것이었습니다. 망연자실해하며 양들이 모여있는 들판 근처에 앉아있는데, 그녀를 불쌍히 여긴 강의 신이 갈대를 흔들어 그의 목소리를 전해줍니다. 근처에 양들이 물을 마시는 강가가 있는데, 저녁 늦게 가면 그 양들이 물을 마시고 온순해져 있을 것이고, 그 때쯤 강가에 있는 풀들에 걸려있는, 빠진 양털들을 걷어가면 될 것이라고 말이죠. 프시케는 그 이야기에 용기를 얻어 저녁이 되어 물을 마시고 쉬는 양들에게서 빠져나온 털들을 모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져간 양털에도 아프로디테 여신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고, 이것 역시 에로스가 도와준 것 아니냐며 더욱 화를 내게 됩니다(합리적 의심이긴 합니다만…). 

황금양털을 가져오란 명령을 듣는 프시케, 1530-60

이번에는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가서 물을 길어오라고 시키는데, 이것 역시 평범한 인간인 프시케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폭포만 바라보며 이제는 에로스를 만나지 못하고 죽어야하는가 생각할 때쯤, 갑자기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나 프시케가 들고 있던 물동이를 채어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담아 가져다 주게 됩니다. 사실 이건 에로스의 도움인지, 독수리라는 새를 생각해 볼 때 심심했던 제우스 신(독수리는 제우스의 신조)이 도와준 것인지 명확하게는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렇게 또 하나의 시련을 넘게 됩니다. 


물론 이번에도 아프로디테 여신의 화는 풀리지 않았고(넌씨눈 커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임무를 주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프시케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여러모로 신경을 쓰느라 미모가 상했으니,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신들의 화장품을 구해오란 것이었습니다. 그 화장품은 명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앞서 나온 데메테르 여신의 딸이자 하데스의 부인이 된 존재였죠)에게 가면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얼핏 들으면 택배 기사처럼 물건만 받아오면 될 일 같았으나,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프시케에게 명계(=저승)에 다녀오란 것은 죽어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시련을 이겨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프시케는 높은 탑에 올라가 몸을 던져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탑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에로스일까요?), 그 목소리는 아주 다정하고 자세하게 산 사람이 명계에 다녀올 방법과 페르세포네의 선물에 대한 주의할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어디로 가면 명계의 입구인지, 저승의 강을 건너는 카론의 배를 타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페르세포네가 주는 황금상자는 절대 열어보면 안된다는 이야기까지 말이죠. 


이 목소리에 용기를 얻은 프시케는 무사히 명계로 가서 페르세포네를 만났고, 문제의 화장품이 담긴 황금상자를 받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철없는 프시케는 마지막에 실수를 하고 맙니다. 에로스를 만날 때 좀 더 예뻐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신들의 화장품을 조금만 꺼내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죠. 그리하여 결국은 열지 말라던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화장품이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잠’이었습니다. 인간은 다시 깨어날 수 없는 종류의 깊은 잠이었죠.

Psyche Opening the Golden Box , 1903, John William Waterhouse

아프로디테의 신전으로 돌아가던 길에 쓰러져버린 프시케의 소식을 들은 에로스는 너무 놀라 그녀에게 날아가 자신의 화살로 프시케를 깨웠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제우스에게 데리고 가서 어머니와 중재하여 자신과 함께 하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제우스는 이 젊은 연인들이 좋게 보였는지 기꺼이 그 소원을 들어주어 아프로디테에게는 그만 화를 풀도록 이야기하고, 프시케를 신으로 만들어 에로스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제우스의 부탁 때문인지 화를 푼 아프로디테도 에로스와 프시케의 결혼을 축복하게 되었고, 두 연인은 모든 신들이 모인 가운데 올림포스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신이 된 프시케의 등에는 남편처럼 날개가 돋아났는데, 그 형태가 나비의 날개와 같았습니다. 번데기 상태에서 견디다가 아름다운 성체로 변하는 나비의 모습이, 신이 된 인간의 영혼과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는 쾌락이라는 뜻의 ‘헤도네(Hedone, ἡδονή)’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태어나게 됩니다. 영혼이 사랑을 이루면 가장 큰 기쁨을 얻게 된다는 상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쾌락주의라는 뜻의 영단어인 Hedonism이 이 헤도네에서 기원하게 됩니다.


프시케의 여정을 보면, 고대 사람들이 인간의 영혼이 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인간을 초월한 경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프시케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서 혈통과 관계 없이 인간에서 신이 된 드문 사례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한다거나 신이 직접 천상으로 납치하는 과정을 겪지 않고 신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거의 유일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신이 되는 과정의 시작점이 ‘신이 내린 금기’를 어긴 순간부터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인간이 신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매우 터부시하는 그리스 신화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금기를 넘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그 욕망이, 인간이 가진 영혼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The Abduction of Psyche, 1895, William-Adolphe Bouguereau




이야기를 닫기 전에, 잠시 정신의학적으로 뒤틀어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사실 이 프시케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보자면 '젊은 여성에게서 발병한 조현병(정신분열병; schizophrenia)' 증상을 묘사한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저주와 에로스의 잔꾀로 인해 혼기를 놓친 여성으로 나옵니다. 그럼 프시케의 나이는 얼마일까요?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들이 10대 초중반에 일찍 결혼을 하긴했으나 혼기를 놓쳤다는 것이 강조될 정도면 스무살을 넘긴 나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괴물에게 시집 보내라는 극단적인 신탁이 내려왔고 그것을 따를 정도면 그 때 당시로는 용인하기 어렵게 늦은 나이까지 혼인을 하지 못한것이니 20대 중반일 가능성도 있죠... 그렇다면 현대의학에서 얘기하는 여성조현병 환자의 호발연령인 25-35세 사이에 들어오게 됩니다.


프시케는 '절벽으로 뛰어내리면 받쳐준다'는 바람의 소리와 '보이지않는 충실한 시종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남편이 밤마다 찾아오고, 그 남편이 사실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환각(幻覺, hallucination)과 망상(妄想, delusion)이라는, 조현병 진단에 가장 중요한 증상들이 있는 것이죠. 이후의 모든 여정도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프시케라는 여성의 망상일 수 있습니다. 


본인의 환상을 깨려는 언니들의 얘기를 질투로 생각하고, 갑자기 남편이 사라졌다고 하며 그를 찾아 먼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버려진 신전을 청소하며 기원을 올리거나(정상적이라면 사람들이 많이 가는 유명한 신전으로 찾아가겠죠), 나중에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명령이라 하며 갖가지 기행을 벌이죠. 개미가 꼬여있는 곡식들을 분류하려 하고, 석양이 질 무렵 양떼들이 있는 들판에 가서 황금 양털을 모은다고 주장하며, 깎아지를 듯한 폭포에서 새가 물을 떠다줬다고 하거나, 급기야는 명계에 다녀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증상이 더욱 악화되어 일종의 거부증(negativitism)이 발생해 죽은듯이 늘어져있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프시케는 조현병으로 고통받다가 그 증상이 고착된채로 사망한 환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런 식으로 해석해보면, 아름다운 로맨스판타지가 한 편의 싸이코스릴러로 변모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신화와 과학의 경계선이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히치콕 감독의 1960년 작인 '싸이코(Psycho)'. 이 단어가 바로 프시케에서 유래하였죠.



매거진의 이전글 로맨스판타지인가, 싸이코스릴러인가?: 전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