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에서 굉장히 핫한 뮤지컬이라고 하는 [하데스타운(Hadestown)]의 국내 초연(라이센스 한국어 공연)을 보고 왔습니다. 한국 내에서 굉장히 유명한 배우들이 포진해있고, LG 아트센터라고 하는 대극장 공연이라고 관극메이트(표도 구해주신 분T-T)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뮤지컬 관람을 늘 놀이공원 놀러가는 마음으로 가는 편이라 진짜 뮤지컬을 열심히 보는 분들하고는 보는 바가 다르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리스-로마 신화의 팬으로서 매우 즐겁게 보고 왔습니다.
신화의 현대적인 재해석!이기도 하지만, 옛날 이야기에 조금 더 섬세하게 살을 붙여 설명하는 느낌도 있어서 감동한 부분들이 있어, 부족한 글솜씨나마 제 감상을 적어보려 합니다.
1. [하데스타운]의 현대적인 겉모습
현대를 배경으로 재해석을 시도한 것이기에, 하데스타운 속에 나오는 무대 배경이나 등장인물의 의상, 소품 등에서 '고대 그리스'의 향기를 느낄만한 요소는 거의 다 배제 되었습니다.
얼핏 봐서는 '스팀펑크' 스타일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하데스타운으로 가는 기차(증기기관이란 표현은 정확히 안 나왔지만,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현재의 자기부상열차 스타일이 아닌 화석연료로 움직이던 고전 열차와 흡사)라든가, 끊임 없이 일하는 광산 노동자들의 모습, 지상 세계의 사람들의 의상 역시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자들을 묘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 18세기 영국의 방적공장 모습. (2) 1970년대 독일로 파견된 한국의 광부들
페르세포네로 상징되는 자연의 생명력과 풍요를 하데스타운에 가두는 것은 일종의 산업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산업화의 굴레' 속에 들어가는 자는 영원한 노동을 해야하고 들어가지 못한 자는 추위와 싸우며 굶주려야하는 상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에 나오는 시간이 짧아짐과 동시에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환경 오염으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구요.
'부를 지키기 위해 벽을 쌓는다!'는 하데스의 외침은 빈부격차라든가 난민 수용 문제 등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극의 후반부에 하데스에 대해 대항하는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 및 하데스타운 노동자들의 봉기(?)는 현대문명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저항인 것 같구요.
그런데 이런 현대적인 '인권', '자연의 소중함',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고찰' 등의 개념은 넣으려다 보니 극 자체의 흐름은 약간 부자연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하데스가 배고프고 힘든 에우리디케를 '작은 새(영어로는 Little songbird)'라고 불러가며 유혹하고 은밀히 방으로 불러 계약서까지 쓰더니 결국은 광산에 일하라고 보내는 것을 보고 약간 갸우뚱했습니다. 뒷부분의 봉기(?)를 위해 필요한 요소일지는 모르겠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하데스가 에우리디케에세 지하세계의 부귀영화(어른의 즐거움?)를 안겨주고 타락시킬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일터로 보내서 당황스럽더군요.
-> 사실 여기서 에우리디케가 타락했어야,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 때 오르페우스가 의심과 고뇌에 빠지는 것이 좀 더 잘 설명되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어쨌든 아주 건실한 자본가이자 페르세포네 바라기인 미스터 하데스였습니다.
2. 재해석임에도 불구하고 진하게 느껴지는 신화의 향기
어쨌든 이 뮤지컬은 그리스 신화를 모티프로 하였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그리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일독하고 가는 것이 좋을만큼,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은 신화를 매우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처음부터 헤르메스(전령의 신이자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갈 수 있는)가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고 언급하며 굳이 자세한 설명을 안해주는 것, 그리고 신도 거역할 수 없는 '정해진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운명의 세 여신'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야기의 큰 흐름은 정해져서 변하지 않으며 원래 알려진 바로 그 이야기 그대로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다시 헤어지게 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의 큰 줄기 이외에도 중간중간 그리스 신화 속 다양한 설정들을 살린 부분들도 꽤 많습니다.
(1) 페르세포네가 지상에 돌아와야 따뜻한 계절이 시작된다는 것(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본인의 어머니가 어쩌구~하며 데메테르 여신이 페르세포네를 다시 만나서 세상에 다시 생명을 자라나게 해준다는 신화 내용을 슬쩍 흘립니다)
(2) 오르페우스는 뮤즈 여신의 아들이며 노래만으로도 봄을 가져오며 꽃을 피우는 능력이 있고, 하데스타운에 사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신화 속에서는 더 대단합니다만...)
(3) 하데스타운으로 가는 기차의 탑승권이 동전이라는 점: 버스 토큰 같은 개념일 수도 있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죽은 자의 입에 동전을 넣어줘야 정당한 장례를 치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승의 뱃사공 카론에게 지불할 돈을 주는 것이죠. 사실 하데스에게 동전을 받은 순간 에우리디케는 '물리적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화폐인 드라크마 동전. 실제 장례에는 저 은화의 1/6가치를 지닌 오보로스 동전이 사용되었습니다.
(4) 하데스타운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있는 광부들은 '타르타로스'에 갇힌 죄인들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저승이라고 하면 '지옥'의 개념을 떠올리곤 하는데, 실제 저승에는 신화 속의 큰 죄인들을 가두고 영원의 형벌을 받게하는 타르타로스와 끝없는 행복을 누리는 낙원인 '엘리시온'이 있습니다. 하데스타운에 암울한 느낌을 주기 위해 타르타로스의 이미지만 강조하고 끊임없이 일하는 인부들을 보여주긴했지만, 실제로는 천국 같은 곳도 포함하는 곳이 하데스가 다스리는 저승입니다. 미스터 하데스가 저승의 펜트하우스는 우리에게 공개하지 않은 셈이죠.
(5) 하데스 타운의 열기는 플레게톤 강을 상징?: 위에서 말씀드렸다 싶이 저승 안에는 다양한 구역이 있고, 저승으로 향하기 위해 건너는 강도 다섯 개나 됩니다. 그 중의 하나인 플레게톤이 '불의 강'이며, 생전에 지은 미련이나 후회를 다 태우며 영혼을 정화하는 강이죠. 플레게톤과 타르타로스의 이미지를 하데스타운의 산업화로 인한 열기로 치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6)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에우리디케: 한 명의 인부로서 일에만 매몰되다보니 자기 자신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상태가 되는 모습이 나오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저승의 강 중 하나가 바로'망각의 강 레테'이며, 아마도 저승으로 오면서 이 강을 건넜기에 생전의 기억을 다 잊는 것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7)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중하는 모습: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오르페우스가 저승의 모두를 노래로 감동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신화 내에서도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승의 죄인들이 자신의 형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며, 복수의 여신들도 죄인에게 채찍질 하던 손을 내리고 눈물을 흘린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니까요.
(8) 저승의 칠흑같은 어둠 속을 걸어 이승으로 돌아가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여정: 이 부분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에서 가장 긴장되고 또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조건부 생환을 허락받은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하데스타운을 떠나는 오르페우스의 외로운 발걸음이 '신화'보다 더 생생하게 표현되어서 좋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의심에 사로잡힐 수 없는, 젊고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 오르페우스의 고통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에우리디케와 다시 헤어지는 순간을 표현하는 무대 장치도 적절했구요.
(9) 약간 과잉해석 같지만, 하늘을 잘 못보고 늘 썬글라스를 애용하는 하데스의 모습은 그의 과거 사연을 약간 빗댄 설정이 아닌가도 싶었습니다. 크로노스와 레아라는 전세대 신들의 제왕 부부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나, 태어나자 마자 바로 삼켜졌으며 크로노스의 뱃속에서 해방된 후에도 하늘의 권좌는 막내동생인 제우스에게 넘겨줘야했던 비운의 신이기도 하니까요.
3. 과연 이 뮤지컬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가?
여기까지 보면 그저 현대적으로 만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현실 사회 비판)이 아닌가 싶지만, 제가 볼 때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시작이 평범치 않았던 그들은 결국 성격 차이로 권태기를 맞이 합니다.
제가 의사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작품을 다 감상하고 나니 든 생각은, 이 극은 '헤르메스와 운명의 여신들'이란 의사들이 운영하는 정신건강의학 클리닉에 방문한 '부부의 상담기'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권태기에 빠진(하데스는 의처증, 페르세포네는 우울증에 고통 받는) 중년의 부부가 와서 자신들의 상황을 의사(헤르메스)와 심리 상담사(운명의 여신들)에게 토로하고, 치료 과정으로 제시 받은 방법이 서로의 입장을 바꾼 역할극을 진행해보라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1) 헤르메스. 이야기를 시작하고 굴러가게 만드는 상담의 기술을 보여줍니다. (2) 인물들의 속마음을 대변하여 사이코드라마가 진행되도록 도와주는 운명의 여신들.
'치료를 위한 역할극'이기에 이 극은 '이미 오래된 사랑 이야기(과거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나눴던 열정적인 사랑)'이며,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치료가 될 때까지는 계속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헤르메스는 치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단순히 둘의 사연을 똑같이 되풀이하지 않고 약간 비틀어서 극을 만들어 줍니다. 바로 페르세포네가 오르페우스가 되며 하데스가 에우리디케가 되는 극중극의 형식을 창조한 것이죠.
이러한 의견이 황당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이 극이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커플의 사이코드라마라고 생각하고 보면 오히려 매끄럽게 이해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성격 설정부터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를 성별반전 형태로 반영합니다.
(1) 여름을 가져오며 항상 파티하는 분위기로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페르세포네. (2) 페르세포네처럼 약간은 충동적이고 열정적이며 예술에 빠져사는 오르페우스.
지하세계에서 사는 우울증 때문에 술과 몰핀(마약류)에 탐닉하는 경향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페르세포네는 원래 성격 자체가 발랄하고 열정적이며 춤과 노래를 즐기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녀가 돌아온 지상은 흡사 '디오니소스'의 축제나 남미의 카니발 같은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하죠.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능력인 '지상에 여름과 생명력을 가져다 주는 것'을 발휘하는 것을 매우 행복해하며, 그 일을 하는 동안은 지하에서 자신을 기다릴 남편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성격입니다. 외향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할 수 있죠.
오르페우스 역시 노래로 세상의 리듬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하는 타고난 예술가이며, 자신의 관심사인 작사/작곡에 빠지면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가 추위와 굶주림을 호소해도 들리지 않을만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타입입니다.
극 중에서 페르세포네가 자신이 투영되어 있는 오르페우스를 이해하고 안쓰러워하는 눈빛을 보이는 것을 종종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신들의 축복을 받은 아이'라는 이야기와 '어머니(데메테르 VS. 뮤즈)'가 강조되는 캐릭터 설정도 페르세포네와 오르페우스가 닮은 꼴임을 보여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데스는 에우리디케와 닮은 꼴입니다.
(1) 권위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의 하데스. (2) 세상의 어려움을 다 겪고 삶의 고통에 대해 알고 있는 에우리디케.
페르세포네와 오르페우스가 자신들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에 취한 모습을 보일 때, 하데스와 에우리디케는 현실적인 삶의 터전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죠.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사랑하는 페르세포네를 소유하고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벽을 쌓고 공장을 만드는' 하데스의 노력은 현실로 치면 '애정표현은 못하지만 묵묵히 가정을 위해 일하는 가장의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결과가 파국에 다다를 수는 있으나 딱히 악의는 없고, 페르세포네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기도 하죠.
에우리디케 역시 철없이 '결혼하자!'부터 외치는 오르페우스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현실적인 여성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인해 오르페우스와의 결혼 생활이 어려울 것임을 인지하고도 그와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데스 역시 페르세포네와 자신이 잘 맞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지하로 데려와 그녀를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성을 계속 쌓았죠. 그러나 그 사랑의 방법이 페르세포네가 원한 바가 아니었기에, 페르세포네는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하데스 역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데스타운의 요새화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마치 '오르페우스가 만들 기적의 노래'의 완성을 응원하며 그를 위해 장작과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지만 오르페우스는 감사를 표하지도 않고 그녀의 고통을 알아주지도 않아, 지쳐버린 끝에 하데스타운 행 기차에 올라타는 에우리디케와 비슷합니다. 하데스타운에 스스로 갇힌 하데스처럼 에우리디케도 그 견고한 성안으로 떠나가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사랑은 희망을 가져옵니다.
페르세포네와 오르페우스 모두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데스타운으로 에우리디케를 데리러오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은, 하데스가 꿈에도 그리던 '스스로 자신을 찾아오는 페르세포네의 모습'일 것입니다. 물론 그 동안의 사랑의 상처 때문에 오르페우스의 모습을 한 페르세포네를 밀어내고 괴롭히고 윽박지르지만, 하데스 안의 진심인 에우리디케는 다시 사랑을 하고 싶어합니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떠난 6개월 동안, 사실 하데스는 이름을 잊어가며 일만 하는 에우리디케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죠.
에우리디케가 계약으로 묶였다며 포기하라고 소리지르는 하데스의 모습은, 페르세포네가 오직 자신과의 계약(저승의 석류를 먹었기에 그 갯수만큼의 시간동안 지하에 머물러야하는)때문에 억지로 하데스타운에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에 스스로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진짜 계약 때문에 에우리디케를 포기해야하나 망설이는 오르페우스는 '정말 내가 하데스를 사랑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하는 페르세포네의 마음의 소리이기도 하구요. 그렇기에 계약과 상관 없이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가겠다는 오르페우스의 선언에 누구보다 기뻐했던 존재는 바로 하데스였을 것입니다.
하데스가 오르페우스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자신이 불렀던 노래'라며 놀라고 감동하는 모습 역시 '본인들의 상담기록을 토대로 만든 사이코드라마'이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일 것입니다. 아마도 페르세포네가 그 노래를 기억하고 오르페우스 역할로 불러준 것에 대한 감동이 컸던 것이겠지요.
물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또 다시 하데스의 트라우마가 올라옵니다. 6개월 동안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지 않고 견뎌야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페르세포네에게 알려주고 싶어진 것이죠. 그리하여 오르페우스에게 끝도 없는 어둠 속을 에우리디케에 대한 믿음 하나로 걸어가게 만듭니다. 이러한 의심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이 '페르세포네가 없는 하데스'의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뮤지컬에서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겪는 '하데스타운으로부터의 탈출 실패'는 완전한 비극이 아닙니다.
오르페우스가 느낀 고통은 페르세포네도 알게 되었고, 에우리디케가 보고 싶어서 지상을 한 발자국 남겨놓고 돌아볼만큼, 페르세포네를 기다리는 하데스의 고통 역시 절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다시 시작되는 극의 분위기는 좀 더 밝아집니다.
치료로 인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하데스이자 에우리디케는 헤르메스에게 감사의 인사(헤르메스의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는 형식으로)를 전하고, 페르세포네는 이전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상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마음을 담은 오르페우스가 다시 한 번 에우리디케에게 시선을 빼앗기며 극은 마무리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