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레이드(아트레이디스) 가문과 그리스 신화
주말을 맞이하여 제가 오랫동안 기대하던 작품인 듄(Dune)을 보고 왔습니다.
1965년 발표된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 워낙 방대한 내용을 다룬 작품이라 이번에 개봉한 'Part 1'에서는 소설 1권의 절반 정도만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영화로 듄을 처음 접한 분들은 뭔가 시작되는 것 같다가 뚝 끊기는 것에 당황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자체는 2시간이 넘는데, '이제 시작이야~!' 이러더니 갑자기 엔딩이 나오니까 말입니다^^;.
다음 내용이 'part 2'에서 멋지게 이어지길 기다려 봐야할 것 같습니다.
스토리의 완결성과는 별개로, 멋진 화면과 BGM 만으로도 감상할 가치는 충분하니 영화관에서의 관람을 추천드립니다.
듄의 세계관은 워낙 방대하여 듀니버스(Duniverse: Dune + Universe)라고도 불리우며, 다루고 있는 역사의 길이만 보면 톨킨이 만든 레젠다리움(반지의 제왕 세계관) 만큼이나 웅장합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듄 영화의 시작 시점은 대략 현대로부터 24,000년 쯤 후이며, 그러한 긴 시간이 흐른 만큼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모습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느낌이 듭니다. 인류가 전쟁도 했다가 통합도 했다가, 그리고 번영의 시기도 보내다가 암흑기도 겪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듄의 시대 배경이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작품'에서 다룰 법한 사건들이 다 한 번씩은 지나간 머나먼 미래라는 점입니다.
이미 기계와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간은 광활한 우주로 나가 성간 여행하는 삶도 누려봤으며, 잠시 실리콘 역병이란 것이 발병하여 초전도 반도체 사용불가로 인한 암흑기를 보내기도 했고, 발전한 과학문명에 의존하여 인간들의 능력이 전반적으로 퇴보하고 게을러지는 시대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런 식으로 인간이 '인간의 생각을 따라하는' 인공지능이나 기계에 의존하다가는, 결국 그들에게 지배당해 인류가 멸망하게 될 것이란 두려움이 생겨났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 미래판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1811년~1817년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 기계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는 상황에 반대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는 '버틀레리안 지하드'입니다.
100년에 걸쳐 일어난 이 '반기계화 움직임' 덕분에 인간은 모든 기계의 영향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사회가 도래하게 되었고, 기계와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기 위해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노력의 산물 중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인간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멘타트', 성간 여행 항로 계산을 예지 능력을 통해 수행하는 '항법사', 그리고 수많은 능력을 숨기고 있는 여성 집단인 '베네 게세리트' 안에서 전승되는 교육 등이 되겠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두 명의 멘타트가 나오는데, 그 중의 한명이 바로 아트레이드 가문의 멘타트인 '투피르 와하트'입니다. 나머지 한 명은 하코넨 가문에서 '책사'처럼 활동하는 모습이 비춰집니다.
극 중에 등장하는 멘타트들은 모두 아래 쪽 입술에 검은 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인간 컴퓨터답게 눈 깜빡일 사이에 엄청난 계산을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죠.2
Part 1에서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나, 성간 여행을 담당하는 거대 우주선에는 아래 그림과 같이 기괴한 모습을 지닌 항법사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예지력에 의존하여 위험한 우주 항해가 가능해집니다.
모습은 위와 같아도 사실은 인간입니다. 뒤에 언급될 스파이스에 과다 노출된 상태 + 성간 항해 우주선의 반무중력 상태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육체가 기묘한 형태로 변해버렸다는 설정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여러 명의 베네 게세리트들이 등장하며, 초반에는 상당히 직위가 높아보이는 베네 게세리트 중 한 명이 주인공 폴을 시험하는 모습도 나옵니다(오른쪽).
현대로 치면 '수녀'같은 느낌을 주는 엄숙한 복장을 하고 있으며, '목소리'와 같은 신비한 힘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인공 폴의 어머니인 제시카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 능력을 한계까지 혹은 그 이상으로 발휘하는데 도움을 주는 물질이 있었으니, 바로 듄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스파이스 멜란지'입니다.
이름부터가 대항해시대의 중요한 교역품 중 하나인 '향신료'에서 따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일종의 '신경활성물질'의 능력이 있어서 사람의 '예지력'을 올려주는 것에 도움을 주며 장기간 복용하면 인간의 수명을 3~400년까지로 늘려주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지능을 높여주고 집중력을 높여주는(시냅스 형성을 촉진하고, 일종의 각성 작용이 병용) 효과가 있는 향정신성의학품적인 요소도 있으며, 항노화(항산화) 작용도 같이 들어있는 아주 신비한 물질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능력을 지녔기에 스파이스에 대한 수요는 넘쳐났고, 그 가격 역시 엄청나다는 설정입니다.
물론 중독이라는 부작용이 있어, 중독된 사람이 갑자기 스파이스 섭취를 중단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마약'과 같은 위험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항법사들의 신체가 변형되는 것을 보면 유전자 레벨에도 작용하는 힘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신비의 물질은 사막 행성인 '아라키스'에서만 생성되는데, 이 행성에 사는 모래벌레가 성장하는 과정(다 성장하면 '샤이 훌루드'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성체가 됩니다. 아라키스의 여포 같은 존재--;)에서 탈피할 때 나오는 가루를 정제하면 스파이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래 벌레는 스파이스와 더불어 산소도 만들어내는, 위험하지만 미묘하게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 벌레는 물에 닿으면 죽기 때문에 아라키스는 푸른 행성으로 녹화되지 못하고 사막화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행성의 원주민 격인 '프레멘'들은 외계에서 온 구원자(영화 속에서는 '리산 알 가입'이라 불리는)가 와서 행성을 푸르게 만들어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프레멘 부족들은 아라키스 모래 바람 속에 퍼져 있는 스파이스에 항시 노출되기에, 일종의 중독 상태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중독 상태를 나타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랗게 빛나는 눈, 이바드의 눈이라고도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실제로 눈이 파랗게 빛나는 사람을 보면 약간 무서울 것 같기도 하지만, 듄 세계의 신비감을 높여주는 장치라는 생각도 듭니다.
듄의 세계관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제가 하고 싶던 아트레이드 가문과 그리스 신화의 연관성은 이제야 나오게 되었습니다(약간의 스포일러 포함).
이번 듄 영화의 주인공은 '폴'과 그가 속한 아트레이드 가문(영화 속에서는 아트레이디스라고 발음이 나옵니다. House Atreide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구원자(초인) 혹은 선지자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퀴사츠 해더락'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전반적인 분위기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일신교 신앙에 대해 주로 다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인 폴(Paul)도 기독교의 성인인 '사도 바울'을 연상시키고, 그의 어머니인 제시카의 이름도 따져보면 성경 속의 '이스가(Iscah/Iskah)'가 그 기원이며 뜻은 '앞을 내다본다'라고 합니다. 살육을 피해 사막으로 도망가는 모자의 모습은 헤롯왕의 영아 살해에서 피신하던 성모 마리아, 광야로 나가던 예수의 모습을 떠올려볼 여지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그러나 가문의 이름과 폴의 아버지의 이름인 레토, 그리고 그의 조부가 행했던 '투우'를 떠올리면 그리스 신화와의 연관성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우선 '아트레이드'라는 가문 이름 자체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 중의 하나인 '아트레우스'라는 인물의 자손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트레우스는 '미케네'의 왕이자, 트로이 전쟁의 주역인 '아가멤논'과 스파르타의 왕이자 미녀 헬레네의 남편인 '메넬라오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기술하면 유명한 왕가의 시조 정도로만 보이지만, 이 왕가는 사실 굉장히 막장스런 가족사를 자랑(...)합니다. 앞으로의 내용을 보시면 '사이코패스 가족의 연대기'처럼 느껴질 정도니까요.
아트레우스의 할아버지는 그리스 신화 속의 유명한 죄인인 '탄탈로스'인데, 탄탈로스는 신들을 시험하기 위해 자기 아들인 '펠롭스'를 죽여서 그 고기로 요리를 만들어 신들의 연회에 내놓았습니다. 당연히 신들은 탄탈로스의 끔찍한 범죄를 눈치채고 그 요리를 먹지 않았으나 당시 딸이 실종되어 정신이 없었던 데메테르 여신만인 그 고기를 조금 집어 먹었고, 이로 인해 펠롭스를 되살렸을 때 어깨 부분의 살이 부족하여 상아로 채워주었다고 합니다.
위 그림이 그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죽었던 펠롭스는 다시 살아나게 되고, 탄탈로스는 헤르메스에 의해 타르타로스로 연행됩니다. 그림 아래쪽에는 엎어진 솥(펠롭스를 담았던--;)이 보이네요.
이후로 펠롭스의 자손들은 어깨 부분의 피부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는 전설도 내려옵니다.
그리고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탄탈로스는 신들의 노여움을 샀고, 타르타로스에 갇혀 영원히 기아와 목마름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이미 타르타로스에 갇힌 죄인인 것부터 범상치 않은데, 아트레우스의 아버지인 펠롭스 역시 장인을 죽이고(이 과정에서도 상당한 막장 행각이 들어갑니다만...) 히포다메이아라는 여성과 결혼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게 됩니다.
펠롭스는 히포다메이아와의 사이에서 아트레우스 외에도 수많은 아이들을 얻었으며,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크리시포스'라는 아름다운 아들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크리시포스는 미소년으로 유명했으나 후에 테베의 왕이자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에게 죽게 되고(성범죄를 당해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라이오스는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라는 저주'를 펠롭스에게서 듣게 됩니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이어지는 나비효과...).
아트레우스와, 펠롭스의 또 다른 아들인 티에스테스는 미케네 왕국의 왕위를 두고 다투다가, 티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의 부인과 간통하기도 하고, 아트레우스는 보복으로 티에스테스의 아이들(조카들이죠)을 죽여 요리로 만들어 먹이는 등의 막장 행각을 이어갑니다. 이쯤되면 이 집안은 서로를 요리로 만드는 가풍이 있나 싶을 정도죠.
아트레우스는 동생과의 피비린내 나는 다툼 끝에 미케네의 왕위는 차지했으나, 결국에는 티에스테스의 아들(이 부분도 또 막장인데, 딸과 아이를 낳으면 아트레우스를 죽일 수 있다는 신탁을 들어 자신의 딸인 펠로피아 겁탈하여 낳은 아들입니다)인 아이기스토스에게 죽게 됩니다.
그나마 아트레우스의 미케네 왕위는, 그의 아들인 아가멤논에게 이어지지만... 아가멤논은 자신의 부인인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당하고(이 때 그녀와 함께 살해 모의를 한 것이 바로 위에 나온 아이기스토스입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자신의 아들인 오레스테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오레스테스는 친모 살해의 죄로 신들의 벌을 받아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게 되는데, 아폴론의 신탁을 수행한 후에 겨우 이 벌에서 벗어나게 되고, 오레스테스의 대에 이르러 아트레우스 가문의 혼돈은 겨우 잠잠해집니다.
영화 속의 훈훈하고 개념있는 아트레이드 가문의 모습만 보면, 진짜 가문의 이름을 저 막장 가족사가 담긴 집안에서 따온 것이 맞나 싶지만... 듄의 원작 소설 속에서 '자신들의 뿌리가 그리스인들이다, 조상 중에 아가멤논이 있다'와 같은 언급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현대 사람들이 아무리 막장 가문의 성을 따오거나 이상한 가문의 먼 후손이라고 해도, 그들의 행동을 다 따라하는 것이 아니듯, 먼 조상이 아트레우스라고 해서 듄 시대의 아트레이드 가문이 막장일 이유는 없는 것이겠죠.
아마 도덕성과는 별개로 고대 그리스의 시조격인 왕가이기에, 듄의 주인공 가문 이름으로 설정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가문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기 위해 가져온 이름일 수도 있구요.
폴의 아버지의 이름인 '레토' 역시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이름인데, 바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어머니인 '레토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레토 여신은 티탄 신족의 한 명으로, 특별한 능력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위대한 쌍둥이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게 됩니다. 올림푸스 신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신들 중 하나이며, 각각 태양과 달을 상징하는 존재들이기에 그들의 어머니인 레토 역시 존재감을 얻게 됩니다.
레토 아트레이드 공작 역시 본인의 등장은 짧지만, 뛰어난 남매(아직 여동생은 등장하지 않았지만)의 아버지란 점에서 레토 여신과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식들 덕분에 후에 크게 숭배될 것이라는 것이 암시되는 대사도 나오니... 더욱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폴의 할아버지인 '선대 아트레이드 공작'에 대해서는 '소와 싸우다가 뿔에 찔려 죽었다'는 정도만 언급되고, 그와 싸운 것으로 보이는 소의 머리 박제와 '투우하는 모습을 묘사한 장식품'만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 소가 사실 그냥 황소가 아니라 '살루사 세쿤더스(Salusa Secundus: 코리노 황제 가문의 모성이자 사다우카라는 황제 직속 특수부대를 키우는 기지)'라는 행성에서 나온 품종으로 보이는 '살루사 황소'였다고 하니, 결국 황제 가문에 의해 아트레이드 가문이 큰 화를 입는 미래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소와 싸운다'는 점은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르스의 싸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근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테세우스' 역시 아트레이드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테세우스의 어머니인 아이트라 왕비는, 아트레우스의 형제 중 하나인 피테우스의 딸입니다.
테세우스 역시 아트레이드의 방계여서인지 상당히 복잡한 가족사와 비극적인 운명을 겪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두번째 부인의 모함에 속아 해치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이 다스리던 아테네에서도 축출당해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암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니까요.
쓰다보니 너무 장황해졌지만, 듄과 그리스 신화와의 연관성도 살펴보고 가시면 이번 영화를 조금 더 재밌게 감상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정리해보았습니다.
듄의 세계관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여러 문명과 문화에 대한 비유가 잔뜩 들어 있어서 흥미롭지만, 저의 경우는 '아트레이드'라는 가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가 떠올라서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듄을 보시는 여러분들도 각자 좀 더 관심이 가고 재밌게 해석할만한 부분들을 찾아가며 보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닮은 미래의 이야기인 '듄'을 즐겨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