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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Nov 15. 2021

고르곤의 머리가 치유의 상징?

영화 [엘리시움]에 등장하는 신비의 의료 기계

2013년도에 개봉했던 SF 영화 중 [엘리시움]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엘리시움의 포스터 이미지.


맷 데이먼이란 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서기 2154년의 황폐해진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일종의 디스토피아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조금 특이한 점은 지구는 분명 환경오염, 자원 고갈, 인구 폭증 등으로 지옥도처럼 변해버렸지만(그리스 신화 속 타르타로스를 방불케하는 모습), 지구 위에 떠있는 인공위성에서는 '유토피아'와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낙원과도 같은 세상(인공위성)의 이름이 바로 엘리시움(Elysium)이며, 영화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위쪽은 황폐해진 지구, 아래쪽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펼쳐진 위성도시 엘리시움.


엘리시움은 그리스 신화 속의 천국과 같은 곳으로, 생전에 영웅적으로 살았거나, 경건하고 순수한 영혼을 유지한 사람들이 가게되는 '사후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리스어로는 엘리시온(Elysion)이라고 하며, 그 장소가 너르고 아름다운 평야의 느낌이어서인지, 보통 엘리시온 들판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현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상젤리제 거리의 '샹젤리제(Champs-Elysées, or Elysian Fields)'가 바로 엘리시온 들판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곳에 들어간 대표적인 인물들 중 하나가 제가 이전 글들에서 언급했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커플입니다. 엘리시온에서는 항상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상태가 유지된다고 하며, 그 땅에서는 비극적으로 헤어졌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커플도 서로를 마음껏 바라보며 뛰놀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그리스 신화 속의 저승이 '산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울 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장소는 아니다'라는 특수한 컨셉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살아있는 사람들도 신들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 먼저 떠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고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아래 그림).

16세기 말에 그려진 엘리시온 들판을 묘사한 그림. 트로이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가 먼저 사망했던 아버지를 엘리시온 들판에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물론 아이네이아스는 살아서 방문.


그래서 엘리시움의 본래 뜻을 알고 보면, 이 영화가 좀 더 재밌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모로 '그리스 신화 속 엘리시온'과 닮아 있는 형태의 낙원이 등장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낙원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들의 열망까지도 더 잘 와닿는 느낌이구요.

지구 위에 떠있는 인공위성 형태의 낙원, 엘리시움.


'선택 받은 일부의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낙원(물론 영화에서는 영웅성이나 신실함이 아닌 부유함이 기준이지만)'이며 그곳에 머무는 이의 행복을 보장하며, 아무나 함부로 갈 수는 없지만 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 않은 장소... 정말 묘하게 적절한 네이밍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늘에 떠있는 낙원 같은 장소와 고철 도시가 대비되어 나오는 '총몽(일본 만화)'이나, 계층에 따라 누리는 것이 분리된 '설국열차'와도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제목의 뜻을 알고 보면, 황폐하고 거칠어보이는 세계와 반쯤 기계화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 위로 써져있는 '엘리시움'이란 낙원의 이름이 상반되기에, 포스터부터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 영화입니다.




제가 의사여서인지 몰라도, 엘리시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만능 치료 기계(영화 속에서는 대략 Med pod라고 불리는 것 같습니다)'였습니다.


MRI 기계처럼 생겼는데, 엘리시움에 사는 모든 주민의 집집마다 한대씩 있고, 그 기계 안에 들어가 누우면 모든 질병의 진단부터 치료가 거의 몇 분 내에 다 이루어지는, 기적과 같은 미래과학기술의 결정체 같은 존재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조연 인물의 치료 기계 사용 장면.


위의 영상에서처럼 환자를 기계 안에 넣는 순간, 기계가 한 번 윙~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순식 간에 'Acute Lymphoblastic Leukemia (급성 림프모세포성 백혈병)'이 진단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환자 진찰과 문진, 혈액 검사(+혈액 도말 검사) 등을 거쳐 '골수 검사'까지 시행해야 확진이 가능한 질환이, 저 기계 안에 잠시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진단되는 것이죠.


환자들이 검사 과정에서 겪는 스트레스, 기다림, 고통과 비용 등을 생각하면 저와 같은 진단 방법이 생긴다면 정말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장면입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장면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항암 화학 치료, 조혈모세포 이식, 표적 치료 등의 온갖 치료 방법을 사용해도, 성인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완치율이 50%에 못 미치고, 소아는 그나마 반응이 좋지만 70~80%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신비의 기계에서는, 질병 진단 후 나노머신(?) 등에 의한 치료가 바로 시행되어, 거의 수초 후에 100% 완치가 되었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영화 내에서 거의 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나오는 저 여자아이가 치료 기계를 사용하고 나서 바로 완벽한 건강 상태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영화 초반의 장면을 보면, 노화 억제와 미용 시술의 효과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후반부에서는 거의 얼굴이 다 날아간 사람도 거의 다 회복시키는 외상 치료의 기능도 있음이 표현됩니다.

영화 초반부에 엘리시움 '시민'이 노화 및 피부 관리(?)를 위해 치료 기계를 사용하는 모습.


위의 미용 치료 장면에서 나오는 기계를 살펴 보다보면 그리스 신화 덕후로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발치 부분에 달린 '고르곤의 머리'입니다.

치료 기계에 장식으로 붙어 있는 '고르곤의 머리'.

고르곤은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괴물 세 자매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자매는 포르퀴스와 케토라고 하는 바다 괴물(둘 다 가이아와 폰토스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스테노'(힘센 여자), '에우리알레'(멀리 떠돌아다니는 여자) 그리고 '메두사'(여왕)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 메두사가 가장 유명한데, 자신의 눈과 마주치는 자를 모두 돌로 만드는 힘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영웅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려 아테나의 방패인 아이기스에 장식되는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전승에 따라 메두사가 원래부터 괴물이었다거나 아테나에 의해 머리카락이 뱀인 괴물로 변했다는 식으로 다르게 전해집니다).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리는 메두사.


목이 잘려 죽음을 맞이한 막내 동생 메두사와 달리 스테노와 에우리알레는 불사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고르곤 자매의 오른쪽 몸에서 뽑은 피는 치유의 힘이 있고 왼쪽에서 뽑은 피는 사람을 죽이는 맹독과 같이 작용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에우리피데스 작품).

그래서 아테나 여신이 치유의 힘이 있는 피를 뽑아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전해줬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만능 치료 기계에 저 장식이 붙는 것이 합당한 것 같네요.

 

사실 괴물의 피가 독성을 지닌다는 컨셉은 '히드라' 이야기에서부터도 꾸준히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이 고르곤들은 특이하게도 '조건부 치유'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참 특이하게 느껴집니다.

'오른쪽에서 뽑은 피'라는 것은 예전부터 사람들이 오른쪽을 좀더 신성한 방향으로 생각했기에 있을 수 있는 개념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으로 치면 반대로 우심방에서 뽑은 피는 정맥혈이고, 좌심실 쪽에서 뽑는 피는 동맥혈이라 산소 농도와 노폐물 농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하여간 재미있는 전설이란 생각이 듭니다.

 

또 한 편으로는 고대로부터 고르곤의 머리를 장식으로 붙이면(무덤이나 동전, 방패, 지붕 등) 여러가지 악한 기운을 쫓는 다는 믿음이 있어서, 괴물이지만 나름 상서로운 역할을 한다는 이미지도 혼재하는 것 같습니다.



베르사체의 로고.

영화 [엘리시움]의 키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치료 기계에 고르곤의 머리가 달린 또 다른 이유는 PPL(?)인가 싶기도 했는데, 저 고르곤의 머리 모양이 베르사체 로고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Versace med pod로 검색하면 나오는, 엘리시움 속 치료 기계의 모습. 기계 옆 부분에 베르사체 특유의 무늬가 보입니다.

엘리시움에 사는 선택받은 상류층들이 사용하는 기계이며(게다가 그들은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 일종의 명품처럼 사용하는 것을 고려해볼 때 자신들이 사용하는 기계를 '베르사체 에디션'으로 구매했다는 설명도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평가해보자면 개연성이 충분치는 않아서, 이러한 좋은 기계를 왜 지상에는 제대로 설치해주지 않는지(사실 이정도 과학 발전이면 지구 위의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좋은 환경 마련이 가능할 것 같은데...) 등의 잘 이해되지 않고 극단적인 계층 간의 싸움으로 몰고가다가 주인공의 희생으로 쨘~!하고 정리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도 영화와 달리 미래에는 우리가 사는 땅에 엘리시움과 같은 의료 천국이 펼쳐지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무조건 인공지능 기계에 의존해도 모든 병에 잘 대처할 수 있을까라는 '21세기 의사'로서의 의문이 들기도 하는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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