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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Dec 09. 2021

성냥팔이 소녀의 사망 원인을 찾아서

동사인가? 인(phosphorus) 중독인가?

한 동안 바빠서 글을 못 쓰고 있다가 연말을 맞이하여 다시 글을 하나 준비해보았습니다. 겨울이고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겨울에 어울리는 [안데르센 동화]를 주제로 한 글을 가져와보았는데, 조금 어두운 내용이긴 합니다.


이전에 '무도증'이란 질환과 함께 다뤘던 <빨간구두> 이야기만큼,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안데르센 동화가 있습니다.


바로 <성냥팔이 소녀(The Little Match Girl)>입니다.

성냥팔이 소녀 삽화(1889년도). 성냥을 켜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환상을 보는 소녀의 모습.


1845년 12월(크리스마스 시즌 이었네요)에 처음 출판된 이 동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쫓기듯이 거리로 나와 성냥을 파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냥을 다 팔지 못하면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으름장과 함께 쫓겨난 상태였죠. 그러나 그 날 따라 연말이라 정신이 없어서인지 성냥은 팔리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소녀는 성냥을 하나씩 켜면서 여러가지 환영을 차례로 보게 됩니다.

자신은 먹어본 적 없는 크리스마스의 화려한 만찬 식탁과 멋진 트리, 그리고 다정하셨지만 이미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모습까지 말이죠. 그러다 결국은 할머니의 환영을 놓치기 싫어 가지고 있던 성냥을 모두 켰더니 할머니기 소녀를 감싸며 천국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소녀는 길거리에서 미소를 지은 모습으로 죽어 있었죠. 소녀의 주변에는 타버린 성냥개비들이 널려 있었구요. 그 모습을 발견하고 안쓰러움을 느낀 시민들이 소녀를 위해 기도를 해주는 것으로 동화는 끝을 맺습니다.




추운 겨울에 성냥을 켜며 환상을 보다가 죽는 소녀의 이야기라니... 사실 이것이 어느 부분에서 동화인가 싶기도 합니다.


가난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소녀가 한겨울에 환상 속에서 사망하는 이야기는, 현재의 시선으로 보면 '아동학대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니까요.


현재 훌륭한 아동복지를 자랑하는 덴마크로서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일 겁니다(각주 1).


결말은 너무 안타깝지만, 한 편으로 성냥팔이 소녀는 왜 하룻밤 사이에 죽게 되었을까에 대한 궁금증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망원인은 당연히 추운 날씨로 인한 '동사(凍死)' 혹은 '저체온증'일 겁니다.


북유럽에 위치한 덴마크의 12월 평균 날씨는 섭씨 1~4도 사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런 날씨에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소녀가 길거리를 배회했다면 저체온증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의 정상체온은보통 섭씨 36.5~37도인데, 추위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체온이 28도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반사 기능이 사라지고 호흡이 잘 안되며, 또한 몸이 붓고 폐의 출혈이나 심실세동과 같은 부정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혈압이 떨어지고 혼수 상태에 빠지다가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국내에서도 갑자기 한파가 오면, 노숙자나 노약자들이 밤새 갑작기 사망하는 일이 꽤나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그러니 덴마크의 한겨울에 성냥팔이 소녀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지죠.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프랑스 군대는 러시아와 전쟁을 하다가 혹한 등의 문제로 퇴각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에 수많은 병사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저를 포함)은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은 추위로 인한 저체온증이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탄절 연휴에 얼어죽은 채 발견된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말이죠.


그러나 또 다른 원인에 대한 가설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소녀가 팔고 있던 '성냥'이 원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가설은 백린(白燐, white phosphorus) 중독에 의한 사망입니다.


인은 원소기호 15번에 해당하는 화학 물질로, 1669년 독일의 연금술사 헤닝 브란트(Henning Brandt)가 은을 금으로 바꾸는 실험 중에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자신의 소변(?!?)을 모아 증발시키던 중 빛을 내는 신비한 물질을 발견하였고, 그 모습을 보고 그리스어로 'phos(빛)'과 'phoros(운반하다 혹은 가져오다)'의 두 단어를 합쳐서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phosphorus’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각주 2).


뭔가 매우 연금술사다운 작명입니다.

The Alchemist in Search of the Philosopher's Stone (1771), 헤닝 브랜트가 빛나는 물질을 발견한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


인은 사람의 체내에도 존재하며 DNA아데노신삼인산(ATP)이 대표적으로인을 함유하는 생체분자입니다. 인은 인체의 에너지 원으로도, 그리고 세포 구조를 유지지키는 것에도 중요한 물질인 것이죠.


이러한 인은 원자 배열에 따라 현재 성냥에 사용되는 적린(붉은 인)이나, 최근 반도체에도 사용하려고 고려 중인 흑린(검은 빛을 띈 인)처럼 매우 안정적인 것도 있으나, 백린처럼 매우 불안정하여 공기 중에서 자연발화하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백린은 불이 잘 붙고(발화점이 겨우 섭씨 60도) 독성 연기를 내뿜어 살상무기를 만드는데도 사용되었습니다. 백린탄 혹은 소이탄이라고도 불리는 것이 바로 그 무기이죠. 워낙 살상력이 뛰어나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잔인한 폭탄이어서 국제법 상 사용이 금지된 상태입니다.

백린탄을 퇴역 전함인 USS 앨라배마함에 뿌리는 모습(1921).


이러한 폭탄 뿐만 아니라, 인은 독성 화합물을 만들기 쉬워 살충제를 만들 때도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독극물을 만들 때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95년에 옴진리교라는 단체가 일으킨 일본 도쿄 지하철 독극물 살포 사건(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에 사용된 독극물인 사린(Sarin-독일어)가스 였습니다.


이 사린 가스는 중추신경계 독성을 일으키는데,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해하는 효소의 기능을 억제 시켜 지속적인 신경 흥분이 일어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중추신경계 및 부교감 자율신경계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이러한 인의 특성을 볼 때 쉽게 불이 붙으며 휘발성이 높고 독성 연기를 내뿜는 '백린'은 참으로 위험천만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백린(각주 3)이 19세기 후반까지 성냥의 재료로 활용되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팔기 위해 가지고 다녔던 성냥이 바로 백린으로 만든 성냥이었다는 것이죠.


실제 19세기 말 성냥공자 노동자들은 백린에 의한 만성 중독 증상을 보였고, 인이 쌓여 뼈가 괴사하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특히 턱뼈가 괴사하여 얼굴 모양이 일그러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인에 의한 턱뼈 기형을 'Phossy Jaw'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Phossy jaw를 보이는 성냥 공장 노동자.


사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공장에 다닌 것이 아니라 그냥 성냥을 들고 다니며 팔기만 했다면, 위와 같은 만성 인 중독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낮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갑자기 다량의 백린 성냥을 피우고 그 연기를 들이마셨다면 급성 중독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린의 급성 중독 증상은 구토나 혈변, 그리고 혈압이 떨이지고 호흡 곤란이 발생하다가 수시간 내에 사망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동사가 아니어도 수시간 내에 성낭팔이 소녀가 사망한 이유가 설명이 되죠.


어쩌면 안데르센은 참혹한 급성 인 중독 증상으로 죽어가는 소녀의 마지막을 아름다운 환상 속에 잠드는 것으로 미화해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성냥팔이 소녀>는 동심을 지켜주는 동화가 맞는 것도 같습니다.





슬픈 동화 속 이야기와 현실은 또 별개인 것이니, 이곳을 방문해주시는 모든 분들은 건강하고 따뜻한 연말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각주

1. Children at-risk: child abuse in Denmark. J Merrick, N Michelsen. 1985. Int J Rehabil Res

-> 이 논문에 따르면 1970-79년 사이에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에서 신고된 아동학대 사례는 27건이었다고 합니다.

2. Phosphorus. The Editors of Encyclopaedia Britannica

3. 이 시대에는 노란 빛을 나타내서 '황린'이라고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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