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했던 영화이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고 있는터라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보고왔습니다.
정말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았고, 영화 중반 이후부터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본... 힘겨운 2021년의 마무리 선물 같은 영화였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담아 감상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사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MCU 스파이더맨 영화 뿐 아니라 이전에 제작된 스파이더맨 관련 영화나 만화들을 꾸준히 봐왔던 관객들이 더 즐겁게 볼 수 있을 법한, 2021년에 만들어졌음에도 과거의 향기를 많이 품고 있는 영화입니다. 틀림 없이 신작임에도 팬서비스가 가득 들어있는 특별판 같은 느낌도 들죠.
MCU 세계관으로 보자면 '멀티버스'라고 하는 세계관 확장을 위한 개념을 들여놓는 시발점이자, 마블이 만들어왔던 세대별 영웅 트릴로지(캡틴 아메리카 - 아이언맨 - 스파이더맨)의 세번째 완결편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습니다.
각 영웅 트릴로지의 3편 포스터들. 방패-아머수트-익명성이란 방어법을 갖추고 있는 영웅들이기도 합니다.
제가 '세대별 영웅'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각 영웅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나름 그 특성이 자신들이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18년에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활약했으며, 21세기에 다시 깨어나 어벤져스에 합류하여 여전히 '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한 캡틴 아메리카(스티브 로저스)가 '시빌워'에서 방패를 내려놓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과거를 상징하는 친구 '버키'와 함께 떠나는 모습은 이미 노쇠한 세대가 그들만의 추억을 지키고 보듬으며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자 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미국의 국기의 색상을 담아 만든 비브라늄 방패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캡틴의 모습에서, 그의 시작과 전성기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 및 국가의 인정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결국 그러한 대의를 내려놓아야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세대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방패를 내려놓고 자신의 절친과 농담 따먹기를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했을 캡틴 아메리카.
1970년대 생으로, 이미 대전쟁들은 모두 끝난 시기에 태어나(냉전이 있긴했으나 어디까지나 냉전이죠) 가장 눈부시게 발전하는 20세기를 경험하고 어찌 보면 자신감과 능력, 자신이 쌓아놓은 결과물들이 화려한 세대의 대표라 볼 수 있는 아이언맨은 자신의 아머수트를 모두 파괴하고도 영웅일 수 있다는 포효를 보여줍니다. 본인 자체는 평범한 육체를 지닌 인간임에도 수트를 파괴하는 패기는 이미 안정된 세계에서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쟁취한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세대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제반 상황이 마련되어 있기에 어느 정도의 실패는 견딜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수트를 폭파시킨다 해도, 수트를 만들어낼 지식과 능력은 어디가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감 넘치는 결정이 가능했던 아이언맨.
그리고 노웨이홈의 주인공인 스파이더맨은 2001년 생으로 아직 젊다 못해 어리고 미숙한 점이 많습니다. 앞선 영웅들이 '국가주도로 강화 인간이 되거나', '자신의 힘으로 강력한 무장을 손에 넣었다'면 이 어린 소년은 우연히 특별한 힘을 손에 넣고 자신의 힘을 어떻게 쓸지 우왕좌왕하다가 그나마 그 힘을 바르게, 그러나 자신의 현실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게 사용할 방법은 '익명성'을 활용하는 것이란 생각에 도달합니다. 이는 마치 현재 세대가 인터넷 세상에서 현실과는 다른 캐릭터(다양한 계정으로)를 만들어 자기들 나른대로의 주장을 관철하고 영향력을 보이는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익명성이란 것 자체가 현대 사회의 자아를 보호하는 방법이다 보니, 익명성을 내려놓게 된 스파이더맨은 앞선 두 영웅의 '내려놓기'와는 아주 다른, 매우 파국적인 결과를 맞딱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잔혹 동화적인 전개가 펼쳐집니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보호할 유일한 무기인 익명성을 상실하고 현실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특히 익명을 활용하여 인터넷 상에서의 활동을 활발히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트라우마에 가까운 상황들을 계속 보여줍니다.
모두가 자신을 알아보고, '파프롬 홈'에서 미스테리오에 의해 쓰게 된 누명에 의해 살인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며, 자신의 가족과 친구 등 소중한 사람들의 일상까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고등학생이란 신분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일 수 있는 대학 입시까지 낙방하게 되는 모습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신상이 털린 이후에 현생이 망가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합니다.
사실 현대 대중이 일부 '법망을 피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단죄할 방법으로 위와 같은 신상털이를 하곤하는데, 만약 그 대상이 죄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당할 고통은 어떠할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 고통을, 마블은 가장 친근하고 서민적인 영웅 스파이더맨을 통해 간접체험을 하게 해줍니다.
만약 스파이더맨의 멘토였던 아이언맨이 건재했다면,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했거나 스파이더맨의 신상이 폭로되었더라도 나름의 충분한 보호조치를 해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언맨의 사망으로 그의 멘토링과 보호는 사라졌으며, 본인 스스로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스파이더맨은 맨몸으로 가시밭길에 내몰린 형국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스파이더맨은 매우 동화적인 선택을 하게 되죠.
바로 마법사를 찾아가 자신의 익명성을 되찾을 마법을 걸어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게 되는, 요정대모 같은 존재인 닥터 스트레인지.
그러나 '잔혹' 동화이기에 이 마법은 실패하게 되고(사실 이 실패하는 과정도 저는 짜증난다기보다 지극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소년다운 갈등이 보이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익명성도 좋지만 소중한 '관계성'에도 목말라하는 아이의 모습이니까요),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에서 진짜 '멀티버스'의 습격과 혼재라는 SF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 영화 속 모든 과정이 '피터 파커'라는 소년의 심상세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양한 소셜 미디어나 커뮤니티에서 여러 계정과 ID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으며, 거의 실재 자신과 비슷한 행동패턴으로 계정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 세계의 자신을 추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인터넷 상의 또 다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 때 그들의 현실을 보호해주는 가장 큰 장치가 바로 '익명성'입니다.
익명성이란 것이, 이것을 방패 삼아 여러가지 불법적인 행위나 커친 언사를 사용하는 상태를 촉발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유를 누리게 해주거나 일종의 소신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등의 역할도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세계 고유의 특성이며, 그 자체가 나쁘기보다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가진 양날의 검같은 존재인 것이죠.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라는 소년이 가진 인터넷 상의 ID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 스파이더맨이라는 익명성을 이용해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며 자유롭게 인터넷 세상을 날아다닌 것이죠.
인터넷 망을 'Web (거미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스파이더맨은 인터넷과 정말 잘 어울리는 ID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과 부딪힘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갈등은 익명성이 보호해주는 동안은 그저 각각의 '우주'라고 볼 수 있는 별 개의 사이트 안에서만 존재하다가, 익명성이 깨어지는 순간 현실로 침범하는, 멀티버스로부터의 빌런과 같은 존재로 변화하게 됩니다.
멀티버스로부터 날아온 다양한 빌런들.
빌런들이 이 세계의 피터 파커를 보고 '너는 내가 알던 피터 파커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각각의 사이트에서 활동하던 그 성격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들은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현실(MCU)에 살고 있는 피터 파커를 공격하고 상처 입히게 됩니다.
이러한 공격을 방어해줄 든든한 현실의 조력자가 충분하면 좋았겠지만, 피터 파커의 가족이나 친구는 모두 무력한 편입니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따뜻한 관계가 유지된다고 해도 현실의 상황이 무너지기 시작하면(경제적 문제나 진학 문제 등등),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하는 인간의 입장으로는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때 '스파이더맨' 특유의 강철같은 멘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어찌보면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는 '본인의 무고함', '자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들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죠.
서로 다른 세계로부터 와서 함께 싸우게 되는 스파이더맨들.
그러한 정신력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다른 세계에서 온 스파이더맨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나자마자 서로 너무 쉽게 인정하고 공감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이기에 비슷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고 비슷한 해결방법을 도출하며, 자신의 마음 깊숙히 새겨진 동일한 내용의 단 하나의 문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는 노력 끝에 피터 파커이자 스파이더맨은 자아를 지켜냅니다. 그러나 이 시련이 끝난다고 해서 한 번 망가졌던 현실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므로 피터 파커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스파이더맨과 자신을 분리하여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익명성 뒤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대중이 특정한 이슈에 다같이 흥분하다가도 어느 순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를 비난한 적이 있었냐는 듯이 깡그리 잊고 또 다시 다른 이슈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비유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주문으로 만드는 상황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시간'이라는 마법 아닌 마법으로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잔혹한 동화의 끝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소년 피터 파커는 홀로 서게 됩니다.
이렇게 잔인한 경험을 하고도 다시 본인의 신념대로 활동하기 위한 비상을 다시 시작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어찌 보면 우리가 스파이더맨과 같은 21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바라는 판타지적인 기대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너희를 지키고 보호해주진 못하겠지만, 그리고 현실에서 발휘할 수 있는 큰 힘도 주진 않겠지만, 그래도 스파이더맨처럼 바르고 건실하게 살며 아무리 절망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렴...이라는 기대 말이죠.
이런 느낌으로 감상해서인지, 틀림 없이 재밌었지만 짠하고 쓸쓸한 인상도 강하게 남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