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하데스타운을 소개해주셨던 관극메이트님 덕분에 프랑켄슈타인을 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매우 좋은 좌석에서 멋진 배우들의 공연을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ㅎㅎ.
전체적으로는 외모와 연기가 빛나는 두 주연배우의 열연 덕에 즐거운 집중이 가능한 극이었습니다.
물론 메리 셸리의 원작의 뮤지컬화를 기대하고 갔다가(뮤지컬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이)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원작과 다르기에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우선 가장 큰 차이점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전쟁 중에 인체실험을 시행하는 과학장교(?) 비슷한 설정으로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1815년이라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전쟁이란 특수 상황 하에서 인체실험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상상을 가미한 것이죠.
실제 1815년에는원작의 작가인 메리 셸리가 처음으로 프랑케슈타인을 창작하였고, 나폴레옹이 패망하게 된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으니까요.
이런 설정 추가는 현대에 사는 작가가새로 대본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2차 대전 등에서 실제 벌어졌던 생체실험의 끔찍함을 추가하여 극의 분위기를진지하게 만들고, 현대인들이 크리쳐 창조 실험의 성공을 납득할 수 있는 개연성을 더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원작의 실험을 보면 현대 기준으로 생각할 때는 연금술인가 싶을 정도로 허술하게 진행되었음에도, 의외로 간단히(?) 크리쳐가 창조되었으니까요. 세포 단위의 실험도 잘 조성된 환경 하에서 훈련된 연구자들이 반복적으로 수행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을 생각해보면, 뮤지컬 속 설정처럼 전시상황을 빌어 충분한 자본과 자원이 갖춰진 상태에서 실험을 반복한 후에도 겨우 성공할까말까하는 것이 좀 더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던 무대장치. 뮤지컬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여 스팀펑크 느낌의 기계 장치를 잘 구현해 놓았습니다.
어쨌든 이 뮤지컬이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실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의 차이가 두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완전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의 경우에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일종의 '매드사이언티스트' 느낌으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자, 자신이 알고 있는 과학 지식과 기술을 종합하여 새 생명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인간 사체 뿐만 아니라 동물의 장기 등을 더해 현생 인류보다 더 완벽한(아름답고 강한) 존재를 만들어내려고 했으나, 막상 완성한 결과물에 기괴함을 느껴 크리쳐를 버려놓고 도망치게 되는 것이죠.
매드사이언티스트의 이미지.
이와 달리 뮤지컬 속 빅터는 흑사병(시대 상 잘 맞진 않지만...)으로 사망한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이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를 되돌리고 싶다는 소망에서 실험을 시작합니다.엄밀히 말하자면 창조 보다는 부활과 재생에 대한 관심이 더 크죠.
어느 순간 뮤지컬의 빅터는, '강철의 연금술사' 속 주인공 같다는 생각이...
죽은 존재를 살리기 위해 여러가지를 공부하던 중, 소꿉친구이자 사촌인 줄리아의 강아지에게도 자신의 이론을 적용해보지만, 그 결과가 참혹하게 끝나고(그 이후 모든 실험이 실패할 것이란 복선) 오히려 소중한 친구와 누나와도 헤어져 외롭게 자라야만 했습니다.
어른들이 몰라주는 어린 빅터의 진심은 '영생이 불가능한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잃어버리게 되는 소중하지만 덧없는 인연들'을 되살려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제가 좋아하는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아내를 되살리고 싶어했던)와도 흡사하고, 죽음에서 끊임없이 달아나는 시시포스와도 닮아있습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저항 및 상실에 대한 현실도피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뮤지컬은 한 번 더 이야기에 비틀림을 추가합니다.
바로 원작 속 빅터의 절친 '앙리'의 성격과 설정을 오묘하게 바꿔놓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극 초반의 앙리 뒤프레의 모습.
원작 속의 앙리는 성도 뒤프레가 아니고 클레르발이며, 의사이긴 하나 딱히 빅터의 실험을 돕는 역할은 아니고 빅터에게 고통을 주고자 하는 크리쳐에게 살해당하게 되는 희생자 중 한명입니다.
그러나 뮤지컬에서는 오히려 빅터에게 인체실험의 영감을 주는 논문을 쓰기도 했고, 전쟁 중에 일종의 PTSD(의사인데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다친 병사들에게 도움도 못주며, 적군을 치료해주려다가 즉결처형 당할 뻔한 등의 고통으로 인해)가 생겨 빅터의 사상에 감화되어 버린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 둘은 친구라고 칭하고는 있으나 솔직히 참된 우정이 생길만한 계기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 같고, 제가 볼 때는 앙리가 가지고 있던 뒤틀린 선의와 과학자로서의 열망이 빅터를 통해 분출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자신은 이론을 만들기는 했었으나 차마 마지막 양심과 신앙심 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온갖 실험들을, 무슨 폭주기관차 마냥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빅터에게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를 따라가면서 자신의 이론이 이루어질 것이란 기대가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희열에 의한 광기는 월터 및 장의사 살인의 누명을 모두 뒤집어 쓰는 것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실험의 성공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앙리는 자신을 연구의 재료로 바치기까지 하는 것이죠.
빅터에게 '너의 꿈속에서 살겠다'고 하며, 실험의 성공을 당부하는 것은 앙리가 이 극의 진정한 주인공(혹은 흐름을 이끄는 존재)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뮤지컬 속에서 진짜 광기어린 과학자의 역할은 결국 앙리가 맡고 있는 것이죠.
어찌보면 뮤지컬 속의 빅터는 앙리가 자신의 죄를 뒤집어쓴 순간부터 절대 벗어나지 못할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친구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과 '내가 사실은 친구의 죽음을 통해 실험 성공을 이루게 되어 기뻐하고 있는 괴물일까?'라는 근원적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죠.
이 때부터 매우 불안정해진 빅터는 결국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앙리의 머리가 재료가 된 이상 단순 실험을 넘어선 일종의 종교적인 제사 느낌마저 드는 처절한, 반드시 성공해야하는 임무가 되어버린데다가 사실 상 자신과의 소중한 관계성이 있는 대상을 되살리는 제대로 된 첫번째 실험이기도 했기에 더없이 긴장되었을 것입니다.
앙리가 자신을 알아보고 기억하는, 원래의 모습으로 부활하길 바라고 또 바라면서 말이죠.
그러나 이 소원은 완벽하게 잘못 이루어집니다.
빅터가 바라던 부활 대신 '창조'가 이루어져 나타난 비극이 시작됩니다.
과거 그대로의 앙리가 재현되길 바란 빅터의 소망과는 달리, 크리쳐는 앙리의 성품은 어느 정도 지니고 있으나(격투장에서 상대를 죽이지 않던 천성적인 선함), 죽음의 과정을 한 번 겪었기에 새로운 존재로서 눈을 뜬 것이죠.
새롭게 눈 뜬 크리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빅터가 창조주로서 책임을 다하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상처받은어린 시절에서 단 한 발자국도 성장하지 못했던 빅터로서는 낯선 존재와 새롭게 관계를 맺고 그를 키워주는 어른의 역할이 불가능한 상태였기에, 크리쳐를 부정하고 상처입히고 방기하게 됩니다.
크리쳐가 인간의 언어와 풍습을 배움과 동시에 미움을 축적하게 되는 과정을 표현한 격투장 이야기는, 배우들의 1인 2역이라는 서비스의 의미도 있겠지만, 앙리의 기억이 섞인 크리쳐가 느낀 주조연 인물들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크리쳐가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원래대로의 앙리의 모습)가 아니다 거부하고 화를 내는 빅터는 싸움을 재미없게 한다며 학대하는 쟈크와 동치되고, 빅터만을 챙기며 자신의 사형당하는데 일조한 룽게는 이고르로, 남자들을 싸움터로 내몰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엘렌은 에바로, 희망을 노래하나 정작 도움되지않고 울기만하는 줄리아는 카트린느로, 빅터를 살리기 위해 빅터의 증언을 묵살하게 만든 슈테판은 야비한 페르난도로 투영한 것이죠.
앙리의 바탕을 지녔지만 새롭게 태어난 크리쳐는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 얻어낸 증오란 감정'만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기에 그 감정에 충실하게 복수를 감행합니다.
본체(정확히는 뇌)의 주인이었던 앙리가 사람을 살리고자하는 욕망이 컸기에,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크리쳐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원작의 북극은 크리쳐가 도망쳐간 머나먼 유배지 혹은 다른 행성 같은 곳이었지만, 뮤지컬 속 북극은 크리쳐에게 있어 일종의 이상향입니다.
자신들과 다름을 인지하여 크리쳐를 비롯한 소외자들을 공격하는 인간들이 없는 이상향...
그런 이상향, 자신만의 에덴동산으로 가기 위해 크리쳐는, 자신이 앙리를 재료로 되살려진 존재란 것을 아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며 나아갑니다.
극의 후반부에 자신이 만들어진 존재란 걸 눈치 챈 꼬마를 물에 빠뜨려죽이는 모습은 '선악과'를 먹고 이지가 생긴 인간을 에덴에서 추방하는 신의 모습과도 닮아있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존재는 모두 지우는 방식으로 낙원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신이 된 것이죠.
그러나 크리쳐 역시 외로움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습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절규 자체가 타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존재는 사람들과 섞이는 게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만큼 지혜로워진 크리쳐는 마지막 복수를 실행합니다.
자신의 에덴인 북극에, 창조주인 빅터를 홀로 가두는 것이죠.
근데 이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약간 앙리와 크리쳐의 복수가 섞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빅터에게 총을 주고 자신을 쏘게 만드는 장면에서 '내 목을 주어서까지 바란 성공이 불완전하다는 것'에 실망한 앙리의 분노도 섞여보였거든요.
원작에서는 창조주인 빅터의 죽음에 절규하던 크리쳐 대신, 자신의 피조물인지 친구인지 알 수 없는 존재를 죽여버린 빅터만 남아 울부짖게 됩니다.
이 극에 끝에서 결국 진정한 창조에 성공한 것은 앙리였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원작과 달라진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미쳐버린 빅터를 만들어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