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인공은 제가 앞선 이야기들에서 종종 언급하곤 했던 영웅 중 한 명인 '오디세우스'입니다.
아킬레스 건에 대한 이야기, 키클롭스 이야기, 오징어게임 해석 등에서 주연 및 조연으로 꾸준히 등장한, 그리스 신화 속 유명(+인기?) 인물이죠.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고, 힘보다는 지혜로 승부하는 편(트로이 목마 작전을 만들어내기도 하죠)이며, 현대 인물과 같은 느낌도 있어서 저도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영웅입니다.
키클롭스에게 포도주를 권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
오디세우스는 여타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과 좀 차이가 있는데, 우선 다른 유명 그리스 영웅들은 대부분 제우스(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나 포세이돈(벨레로폰)과 같은 유명한 신들의 아들이란 설정이 있거나, 엄청난 힘을 지니거나 신들이 내려준 여러가지 신비한 무기나 동물을 이용하여 모험을 하게 된다고 나오는 것에 비해...
오디세우스는 핏줄을 따져보면 제우스의 자손(5대조 할아버지가 제우스--;)이긴 하지만, 본인이 인간 이상의 힘을 지녔거나 특별한 무기를 지닌 바도 없이 본인의 능력으로 여러 가지 모험을 헤쳐 나가게 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여러 마블/DC 히어로물에 비유하자면, 슈퍼맨, 토르, 아이언맨 등의 초인적 영웅들 사이에서 자신의 몸 하나로 버텨내는 '호크아이' 같은 캐릭터랄까요(호크아이가 별로라는 뜻은 아닙니다만)? 날고 기는 초능록 or 외계인 or 온갖특수 무기로 무장한 영웅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호크아이가 오디세우스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오디세우스는 명궁이기도 해서... 더욱 잘 어울리는 느낌입니다ㅎㅎㅎ.
마블 영화 속 호크아이.
오디세우스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능력(어디까지나 대영웅들에 비해서)을 지녔음에도 그리스 신화 속 어떤 영웅보다 다양하고 파란만장한 모험을 경험하게 되고, 덕분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모험기(오디세이아)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가 겪은 모험들을 살펴보면 이동한 거리도 엄청나지만(고대 수준에서), 마약과 같은 신비의 식물 로투스(Lotus)를 먹거나, 사람들을 돼지로 만드는 마녀 키르케를 만나거나, 키클롭스에게 잡아먹혀 전멸당할 뻔 한다거나, 고대 태양신인 헬리오스에게 바쳐진 소들을 잡아먹은 부하들로 인해 저주 받기, 스퀼라와 카륍디스라는 바다 괴물들에 의해 진퇴양난에 빠지는 등... 진짜 한 명의 등장인물이 겪을 수 있는 모험이라 보기에는 너무 다채롭고 고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아래 그림 출처: https://www.reddit.com/r/MapPorn/comments/gjxdxq/the_journey_of_odysseus/).
오디세우스의 파란만장한 고생...아닌 모험의 여정. 파란색 화살표가 실제 그가 이동했어야할, 트로이에서 이타카 까지의 거리.
이로 인해, 오디세우스는 그가 사랑하던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를 만나기까지 매우 오랜 세월(20년)을 기다려야했습니다. 게다가 페넬로페는 자신과 남편의 땅을 한꺼번에 꿀꺽하려는 수많은 '구혼자'들의 청혼을 거절하느라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죠.
구혼 거절의 핑계를 대기 위해 자신의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완성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는데, 낮동안 수의를 만들었다가 밤마다 그 천을 다 풀어 헤치는 식으로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합니다(페넬로페의 수의).
시아버지의 수의를 만드는 페넬로페와 그녀에게 구혼하는 남성들(워터하우스 작품).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항해를 지속한 오디세우스는 그 의지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특유의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인해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가 '세이렌'의 유혹을 벗어나기까지의 일화를 보면 오디세우스 특유의 겁없고 궁금한 것이 많은 성격이 드러납니다.
세이렌(Siren)은 오디세우스가 모험 중에 만나게 되는 바다의 괴물(?) 중의 하나인데, 이 이름 자체는 익숙한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우리가 모 카페에서 사용하는 심볼이자 원격 주문 방법의 이름이기도 하고, 구급차가 울리는 '사이렌'의 어원이기도 하니까요.
세이렌이 심볼로 사용되는 스*벅*와 구급차에서 사용하는 사이렌 소리.
이 세이렌은 전승에 따라서는 원초 바다의 신인 포르키스, 혹은 강의 신인 아켈로오스의 딸들로 여겨지며, 어머니도 뮤즈 여신 중 하나인 테르프시코레나 멜포메네 중 한 명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기본적으로 물에 사는 존재이며, 노래와 음악으로 선원들을 유혹한다는 정체성과 어울리는 가계도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죠.
그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도 반인반조(인간의 머리에 참새의 몸) 혹은 인어의 형태로 그려질 때가 있는데, 고대에는 주로 새의 형상, 중세에는 인어의 형상으로 믿어진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존재로 그려지죠.
명화 속 세이렌의 묘사. 반인반조 혹은 인어의 모습이며,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장면이 자주 그려집니다.
이들은 바다에 살면서 항해하는 배가 자신들의 영역을 지나게 되면, 아름다운 노래와 음악을 통해 그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결국엔 바다로 뛰어들어 죽거나 암초로 배를 움직여 좌초되어 죽게 만드는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항해 중에 겪을 수 있는 일종의 환각이나 혼미를 상징하는 존재들이라고도 볼 수 있죠.
하여간 오디세우스는 이 무서운 바다 괴물들의 영역을 반드시 지나가야만 했는데, 다행히도 이들을 만나기 전에 '마녀 키르케'로부터 세이렌의 영역을 무사히 지나가는 방법을 전수 받은 상태였습니다. 키르케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위대한 마녀였지만, 오디세우스에게 큰 호감을 가지게 된 터라(떠나지 말고 자신과 함께 살자고 할만큼), 오디세우스가 항해 중에 겪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충고를 많이 해줍니다.
마녀 키르케.
지혜로운 마녀 키르케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는 것이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를 위해 밀랍으로 만든 귀마개를 이용하여 소리를 차단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현대로 치면 이어플러그 사용을 권고한 키르케.
이제 안전하게 통과할 방법도 알아냈으니, 그냥 귀를 막고 세이렌의 영역을 지나가면 그만이었는데, 호기심 대마왕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가 어떤 효과를 보이는 것인지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전승에 따라서는 그 노랫소리가 안들리는 영역을 판단하기 위해 본인이 희생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굳이 자신은 귀를 막지 않고, 돛대에 몸을 묶인 채 세이렌의 영역을 통과해보기로 하죠. 그 대신 자신이 풀어달라고 난리쳐도 그 명령은 무시하고 오히려 더 단단히 결박시킬 것을 부하들에게 당부합니다.
결박된 후 세이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오디세우스.
아니나 다를까, 배를 본 세이렌들은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연주하며 선원들을 유혹하기 시작했고, 유일하게 그 소리를 들은 오디세우스만 이성을 잃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다로 뛰쳐들어가고 싶다며, 자신을 묶은 결박을 풀어달라며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 것이죠.
물론 오디세우스의 명령을 받았던 부하들은 오히려 자신의 대장을 더욱 강력하게 결박해놓았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말을 잘 들은 부하들 덕분에, 오디세우스와 그들의 배는 무사히 세이렌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었도, 세이렌들은 자신들의 노래가 통하지 않은 것에 분함을 느끼고 자살했다고도 전해집니다(약간 스핑크스와 비슷한 결말?-일종의 지혜 겨루기의 끝에 괴물이 자살한다는 컨셉이나 여성+동물의 모습을 지닌 괴물이란 점에서 스핑크스와 세이렌은 묘하게 닮아 보입니다).
스핑크스의 형상을 묘사한 조각상.
여기서 오디세우스가 겪은 증상은 현대 의학적으로 보면 '섬망(Delirium)'과 흡사하게 보이는 부분이 많습니다.
섬망이란 정신적 능력이 저하된 심각한 상태로, 이 증상이 생긴 환자는 혼란스러운 사고를 보이고 환경에 대한 인지 능력이 매우 떨어지게 되는 증상입니다.
섬망은 노인층에서 더 잘 나타날 수 있지만, 만성 질환이나 감염이 있는 경우, 큰 수술을 받았거나(이렇게 되면 장기입원이나 중환자실 치료를 받게 되고, 밤낮이 바뀌기 쉽기 때문에), 약물 혹은 알코올 중독 등의 위험 요인이 있는 환자라면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위험 요인이 있다면 젊은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상태인 것이죠.
섬망의 증상은 다양한데, 과잉행동을 보이는 섬망(Hyperactive delirium)의 경우는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안절부절해 하고, 서성거리기도 하며, 환각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치료자에게 협조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과 치료자가 모두 다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섬망은 여러 가지 약물(향정신병 약물, 안정제, 진통제, 항히스타민제, 스테로이드 등등)이나 알코올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오디세우스의 경우는 세이렌의 노래가 술이나 약물처럼 ‘뇌’에 영향을 끼쳐서 섬망과 비슷한 증상을 만든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도 가능하겠습니다.
섬망이 노인에게서 발생할 때가 많기 때문에, 이런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섬망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에 치매로 섣불리 진단하면 안 됩니다.
또한, 섬망 증상이 있을 때 치매에 대한 진단 검사를 하는 것은 정확도도 떨어지고 별 다른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섬망이 나타났을 경우는 우선 그 증상을 안정시킨 후에, 기저에 치매가 있었는지에 대한 검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섬망이 의심되는 경우엔, 의사와 상담하여 정확히 진단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섬망을 일으킨 원인이 밝혀지고 그것을 해결하면 증상이 호전될 수 있습니다.
환자가 만성 질환을 앓고 있거나 요양 시설 등에 장기 입원 상태일 경우에는 섬망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하는 것이 필요한데, 방을 너무 자주 바꾼다거나, 지나치게 시끄럽다던가, 자연광이 차단된 환경 등은 섬망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에 대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에서 벗어난 후 이성을 찾았듯이, 현대 의학 역시 섬망이라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