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러브 앤 썬더 감상
더위 속에 마블 영화가 개봉했으므로 역시나 저는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극장이 시원하기도 하고, 무더위에는 아무래도 화려한 액션이 난무하는 영화가 잘 어울리니까요.
게다가 이제까지 솔로무비는 '트릴로지'라는 공식을 깨고, 우리의 천둥신 토르는 4번째 솔로영화로 돌아왔기에 더욱 기대가 커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셰익스피어 희극 분위기의 토르 1과 2도 상당히 재밌게 봤고, 스페이스 오페라 분위기의 [토르-라그나로크]도 정말 재밌게 보았기에(극장에서만 2번인가 본), 이번 영화에도 큰 기대가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형제의 난(?) + 철없는 왕자님의 성장 스토리였던 1편, 에테르의 저주를 받은 공주님을 지키는 이야기처럼 보였던 2편, 그리고 진정한 천둥의 신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보여준 3편까지 즐겁게 감상했기에 4편은 어떠한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구요.
그런데 이번 영화를 다 보고난 후의 감상은 좀 미묘(...)하긴 했습니다.
사실 소재나 등장인물, 전체적인 스토리라인만 보면 굉장히 매력적인데, 무언가 약간 전체적으로 균형이 안 맞는 것 같은 느낌이 있고, 개그코드는 많이 들어가 있는 것에 비하여 '빅재미'라고 할만한 포인트가 잘 보이지 않아서 살짝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인 영화의 방향성, 토르라는 인물의 서사라든가, 자잘한 신화적 소재, 그리고 의학적인 내용들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들이 있어서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스포일러가 좀 들어가 있습니다)
1. 히어로물이라기 보다는 우주 바이킹 모험담/북구 신화의 느낌이 강해진 영화
라그나로크 때부터도 그렇긴했지만, 이번 영화는 전형적인 히어로물이기 보다는 우주를 항해하는 바이킹 모험담 혹은 우주적 스케일로 재해석된 북유럽 신화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은 이미 지난 솔로 영화 및 인피니티 사가에서 다 보여주었기에, 나름 완전체에 가까운 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느낌이랄까요.
'신으로서의 강함'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태여서, 정말 북유럽 신화 속에 등장하는 토르의 이야기를 보는 느낌도 듭니다. 가장 강력하지만 여러가지 모험을 하게되는 '진짜 신화 속 토르'와 아주 흡사한 모습입니다.
신화 속 토르가 아홉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나 난쟁이족, 바나 신족, 거인족들, 그리고 기타 기묘한 괴수들과 마주치며 여러가지 모험을 하듯이, MCU 속 토르는 우주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외계종족과 만나고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자신이 모시던 신에게 철저하게 버림 받아 모든 아끼던 존재를 잃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숭배했던 신에게 조롱 및 멸시까지 들어 흑화해버린 빌런-신 도살자 고르-과 대립하게 되는 것이 이번 영화의 가장 큰 줄거리 입니다.
신 도살자와 신의 대적이라는 큰 줄기 아래, '신과 신앙'에 대한 언급들이 조금씩 등장합니다.
모든 신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고, 아스가르드의 어린아이들까지 납치한 '고르'를 물리치기 위해, 신들의 군대를 만들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신들의 도시인 '옴니포텐트 시티'로 향하게 되는데, 여기서 신 도살자의 등장이나 아스가르드의 어려움에 관심 없는 신들이 모습에 토르는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신들을 믿고 따르며 도움을 갈구하는 존재들을 '미물' 취급하며, 그런 존재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제물을 바치는지 서로 경쟁이나 하는 모습에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 때부터 '고르'와의 대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조금 예상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토르와 연인이었다가 권태기를 겪고 헤어졌던(+블립까지 당했던) 제인 포스터 박사가 말기암 환자가 되어, 자신이 추구하던 과학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신화적인 존재'인 묠니르를 찾아가는 이야기도 일종의 '신앙'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의 힘을 믿기에 묠니르라는 것에도 의존해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결국 묠니르의 힘에 의해 제인은 거의 신에 가까운 힘을 얻어 '마이티토르'로 변신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빌런인 '고르'가 간절히 원하던 신의 은총을 받는 것과 비슷한 상태죠. 여기서 또 재밌는 것은 묠니르는 제인 포스터를 지켜달라는 토르의 '사랑' 때문에 제인에게 힘을 주었고, 네크로소드는 고르가 지닌 '증오'에 반응하여 힘을 준다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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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U에서도 '신'은 강력한 존재가 맞지만, '사랑하는 마음 혹은 인간에 대한 자애가 없는 신'은 '네크로소드'에 의해 도살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어찌보면 이것은 극히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니까요.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는 이유를 제외하고도, 이 영화의 부제가 '러브 앤 썬더'인 것은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사랑(신과 신자 사이의 사랑이든, 연인 간의 사랑이든, 부모자식 간의 사랑이든)'에 대한 강조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종반 부분에 등장하는, 토르의 힘을 나눠봤는 어린이 군대(...)와 그림자 괴물 간의 전투,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마이티토르의 모습으로 현신한 제인의 모습들은, 직접적으로 묘사가 된 건 아니지만 고르의 증오로 가득찬 마음을 조금씩 녹이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누구보다 신실한 신자였고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찼던 존재가 바로 고르였기에, 어찌보면 신들 기준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 제인과 아스가르드 어린이들(물론 외부 어린이들도 섞여는 있지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모습에 놀라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토르를 믿기에 힘을 나눠받을 수 있는 , 자신이 그렇게나 원했던 '신의 사랑을 받는' 제인과 아이들이 부러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이 고르가 내리는 최종 선택의 극적 변화로 연결되는 것이죠. 또한 토르가 자신이 존경했던 아버지 오딘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아버지신'의 단계로 한층 더 성장하는 흐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이 모습들을 보여주는 연출이 약간 균형이 깨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으면 좀 더 좋았을텐데 그런 균형을 잡는 감각이 살짝 부족하달까요. 저는 약간만 더 톤을 무겁게 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반적으로 바이킹 모험담의 형식을 유지하다보니 과하게 호쾌한 분위기라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또 답답한 느낌은 없다는 장점 역시 있습니다. 이건 또 감상하시는 분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2. 여러가지 신화적 설정과 소재들
주인공이 '토르'이기 때문에, 북유럽 신화의 설정과 관련된 소재들은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묠니르, 발키리, 비프로스트처럼 이미 꾸준히 등장하던 존재들은 물론이고, 이번에 새로 등장한 것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화 내내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염소 두 마리죠--;;.
신화 속에서는 탕그리스니르(Tanngrisnir)와 탕그뇨스트(Tanngnjóstr)라고 불리며, 이 이름의 의미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빨갈이'와 '이빨벼리'라는 명칭과 흡사합니다. 신화 속에서 이 염소들은 토르의 마차를 끌고 다니며, 가죽과 뼈만 남아 있으면 얼마든지 부활시킬 수가 있어 토르의 비상식량(...)으로도 활약합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염소들이 미친듯이 멱따는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보며 웃기도 했지만, 그들이 토르 일행이 타는 배를 끄는 것을 보며 토르가 정말 '북유럽 신화 속 토르'의 모습과 흡사해지는 것 같아서 신기하다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염소들이 끄는 배에도 북유럽 신화의 흔적이 담겨 있는데, 아주 잠시 나오지만, 배의 옆부분에 'AEGIR'라고 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 단어는 북유럽 신화 속 바다의 신의 이름인 '에기르'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신은 주로 바닷 속 궁전에서 맥주를 빚고 파티를 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MCU 속 '뉴 아스가르드' 관광용 배이기도 하고 내부에 술도 잔뜩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은근히 신화 속 설정을 잘 가져와서 만든 것 같습니다.
지난 작품들 속에서 아스가르드의 수문장으로 활동했던 하임달의 아들도 등장하는데, 이 아이는 지구의 문화에 많이 감화(?)되었는지 원래 이름을 버리고 '액슬'이라고 하는 락스타의 이름을 따서 개명을 한 상태로 나옵니다. 근데 이 아이의 아스가르드 식 이름이 '아스트리드(Astrid)'라는 것이 좀 재밌는데, 이게 원래는 여성형 이름이라 반항의 의미로 개명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스웨덴의 유명한 동화작가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린드그렌 여사는 '말괄량이 삐삐(원제: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인데, 삐삐가 굉장히 용감한 소녀이기도 하고, 이 이야기 자체가 린드그렌 여사의 딸이 폐렴으로 누워 있을 때 응원의 의미로 쓰여진 것을 생각해보면, 납치된 아이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역할을 해주는 액슬의 본명으로 잘 어울리는 작명인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명예롭게 싸우다 사망하면 천국의 일종인 발할라'에 갈 수 있다라는 북유럽 신화 속 설정(묠니르가 괜히 제인에게 마지막까지 싸우라 충동질한게 아니죠)이라든가, 그리스 신화 속 최고의 난봉꾼인 제우스답게 좌우에 미남미녀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든가, 제우스의 주무기인 번개(영화 속에서는 '썬더볼트'라 불리고 약간 조악하게 생긴--;)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네크로소드는 뭐... 대놓고 그리스어로 시체를 의미하는 'Nekros'에서 따온... 그리고 처음에 고르를 멸시했던 신 '라푸'는, 그가 지내는 곳이 밀림 같은 분위기라는 것과 입고 있는 화려한 의상 등을 보면 중앙아메리카 아스텍 문명의 신인 '틀랄록'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3. 의사로서 관심이 가는 제인의 암과 발키리의 부상
이번 영화에서는 갑자기 제인 포스터 박사가 암 환자라고 등장합니다. 그것도 말기라고 할 수 있는 4기의 암환자죠. 제인의 첫 등장 부분에서 CT를 촬영하는 듯한 모습이 나오는데, 아마도 암의 병기(stage)를 파악하기 위해 전이(metastasis)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정확히 어떤 암인지 나오진 않지만, 코믹스 속 설정은 유방암(Breast cancer) 입니다. 유방암은 미국 여성에서 가장 흔한 암이기 때문에 설정 자체는 상당히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방암은 조기에 발견되면 95%의 5년 생존율을 보이지만, 타장기로 전이된 4기의 경우에는 30%미만의 5년 생존율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인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전이가 일어날 때까지 암을 발견하지 못하고, 4기인 상태에서야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치료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고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자 묠니르라는 '대체요법'을 찾게 되는 것이죠.
우주 종족과도 교류하는 설정의 MCU에서도 4기 유방암의 치료가 어렵다는 설정이 나오니 의사 입장으로서는 약간 착잡하기도 했습니다. 히어로 영화에서도 환자에게 시한부 선고를 하는 의사가 나와야한다는 점이 슬프기도 했구요. 결국 기적적인 완치는 일어나지 않고 극히 북유럽 신화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제인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영화 속에서 또 하나 저를 놀라게(?) 만들었던 '현실적인 부분'은 바로 발키리의 부상이었습니다.
발키리는 쉐도우렐름이라는 영역에서 고르와 싸우던 도중, 등쪽에서 칼을 찔려 부상을 당하게 되는데,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아스가르드 전사인 만큼, 다행히도 죽거나 하진 않았지만 의외로 산뜻하게 회복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네크로소드'라는 신도 죽이는 무기로 찔려서인 것 같은데... 뒤에서 찔리면서 '복막뒤 장기(retroperitoneal organ)' 중 하나인 신장(콩팥)을 다쳐서 결국 하나를 제거했다고 나옵니다.
영화 내용 상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스가르드 인의 신체구조도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깨알같은 의학적 고증이 들어가서인지 제 입장에서는 꽤 흥미롭게 본 부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두서 없지만, 토르: 러브 앤 썬더를 보고 제가 생각했던 점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영화 자체는 감상하시는 분의 취향에 따라 어느 정도 평가가 갈릴 것 같지만, 이런 저런 신화 관련 설정이나 마블 영화 특유의 화려한 화면들, 그리고 토르의 신으로서의 한 단계 높은 각성 과정(사랑으로 인한)에 주목해보시면 즐겁게 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