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케, 필로테스, 슈디아, 알게아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과 인간들의 이름들이 의학 용어의 기원이 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제가 그 동안 썼던 글에서도 여러가지 예시가 등장했었죠(프시케, 에로스, 히프노스 혹은 로마 이름인 솜누스, 게라스, 나르키소스, 헤베의 로마 신격인 유벤투스 등등).
현대 의학 용어에는 이미 언급되었던 상당히 유명한 등장신격/인물의 이름들 말고도 ‘이런 신들도 있었나?’ 싶은, 상당히 낯선 신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은 의학 용어들과 관련은 있으나,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신들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 강박과 애정은 형제? 아난케와 필로테스
그리스-로마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올림포스 신들(제우스, 헤라, 아폴론, 아테나 등)이나 이들보다 먼저 세상을 지배했던 티탄 신족 외에도 ‘원시 혹은 태초신(primordial god)’이라고 불리우는 신들도 존재합니다.
이들은 올림포스 신들처럼 숭배되지는 않았으나, 여러가지 ‘개념’에 대한 ‘의인화’의 형태로 이름이 붙여지고 전승되어 왔습니다.
혼돈(카오스, Chaos)로부터 땅, 바다, 하늘, 어둠과 빛 등이 태어나던 시기에 같이 태어난 존재들로 여겨지는, 세상의 근간을 이룬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개념들(시간, 영원, 고통, 출산, 운명, 파멸 등)이 원시신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강박(혹은 강제, compulsion)을 의미하는 아난케(Ananke)와 친애(friendship/affection)를 의인화한 필로테스(Philotes) 역시 이들 중 하나입니다.
아난케는 호메로스의 이야기나 고대 그리스 문헌 속에서 ‘필요’, ‘힘’, ‘운명’이라고도 해석되었으며, 더 나아가 ‘상위의 존재에 의해 당하게 되는 강제적인 상황이나 고통’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우리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강박’이라는 심리를 잘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사용하는 강박성 인격장애(anankastic personality disorder)라는 용어에 아난케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강박성 인격장애는 ‘질서정연함, 완벽주의, 통제권에 집착하는 상태’를 특성으로 하며, 인격장애 중에서 가장 흔하고 남성에게 좀 더 많은 편인 인격장애입니다.
강박성 인격장애를 의미하는 영어 의학 용어로는 ‘obsessive-compulsive personality disorder (OCPD)’라는 것이 좀 더 익숙하며 널리 알려져 있지만, anankastic 이란 표현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강박관념(원치 않는 생각이 계속 올라오는 불안감)과 강박충동(강박 관념을 제어하기 위해 여러가지 반복행동을 하게 되는 의식적 절차)으로 인해 고통받는 강박증(Obsessive-compulsive disorder, OCD)과 달리, 강박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질서, 통제, 완벽주의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강박충동으로 인해 괴로워하진 않는다고 합니다.
또 다른 태초신 중의 하나인 필로테스는 앞서 언급했듯이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을 의인화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번식하고 번영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감정 중의 하나이기에 필로테스 역시 혼돈(카오스) 발생 이후 세계의 굉장히 초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 듯합니다.
필로테스에서 유래한 ‘Philo-‘는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을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philia’는 특정 단어 뒤에 합쳐지게 되면 ‘~하는 경향, 기호, 혹은 특정한 것에 대한 비정상적 애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Philo-‘가 활용된 가장 유명한 단어가 바로 ‘지혜(Sophia)’를 추구하는 학문인 철학을 의미하는 ‘Philosophy’입니다.
의학적으로는 혈우병을 뜻하는 단어인 ‘Hemophilia(여기서는 ‘피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피를 흘리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라든가, 물분자와 잘 결합한다는 뜻의 ‘hydrophilic’, 지방과 친화성이 높다는 뜻의 ‘lipophilic’등의 용어 속에서 필로테스의 흔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philia’의 반대 의미로 활용되는 것이 공포나 혐오증을 의미하는 ‘-phobia’인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필로테스가 로마로 건너가서는 ‘아미시티아(Amicitia)’라고 불리웠는데, 현대 이탈리아어에서 친구를 의미하는 단어가 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Amico’입니다.
(2) 불화에서 태어난 거짓과 고통, 슈디아와 알게아
트로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황금사과 사건’을 일으킨 존재는 바로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입니다.
에리스는 밤의 여신 닉스(Nyx)로부터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며, ‘불화’라고 하는 신격의 소유자 답게, 에리스의 아이들은 모두 굉장히 부정적인 개념들을 의인화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망각(기면성 뇌염에 등장한 레테), 기아(에리식톤 이야기에 등장했던 리모스), 전쟁, 거짓 맹세, 다툼, 살해, 파멸 등이 모두 그녀의 아이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의학 용어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대표적인 존재들이 바로 ‘거짓(Lies)’을 의미하는 슈디아(Pseudea)와 ‘통증(Pain)’을 의미하는 알게아(Algea)입니다. 둘 다 부정적 개념의 의인화일 뿐이기 때문에 신화 속에서 특별히 활동하는 모습이 나오진 않지만, 의학용어로서는 상당한 활약을 하는 편입니다.
거짓을 뜻하는 슈디아는 ‘Pseudo-‘라는 접두사의 형태로 의학 용어 속에 많이 등장하는데, ‘가성(거짓)****’이라는 식으로 씌여진 한글 의학 용어는 영어로 ‘Pseudo****’이라고 쓰여진 단어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신경과 의사로서 예를 하나 들자면, ‘가성뇌종양(pseudotumor cerebri)’라는 질환이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이유로 뇌척수액이 고이거나 혈관으로 재흡수가 안 되어 두개 내 압력이 상승하고 이로 인해 뇌종양이 생긴 것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뇌종양’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종양이 없다’는 점에서 ‘거짓’이라는 의미가 들어간 접두사인 ‘Psuedo-‘를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Pseudo-’ 사용의 예로는 코막힘에 자주 사용하는 약제인 ‘슈도에페드린(Pseudoephedrine)’이 있습니다. 이 약제는 에페드린과 화학 구조가 매우 흡사하나 수산화기(-OH)의 위치가 달라서 ‘거짓’이란 접두사를 넣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슈도에페드린은 에페드린과 효과는 비슷하나, 빈맥 등의 부작용 발생이 덜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약품은 코막힘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지만, 암페타민이나 메스암페타민과 같은 향정신성의약품의 전구물질이기에 많은 나라에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에리스의 또 다른 자식인 알게아는 ‘통증’을 의인화한 존재이며, ‘통증’에 관련된 의학 용어 속에 그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통증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Hyperalgesia (통각 과민)’이 있습니다. 이 증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통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의 통각 자극에도 과한 반응을 보여 정상적으로 느껴야 할 통증보다 훨씬 더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는 증상을 의미합니다.
이와 혼돈할 수 있는 단어로는 ‘이질통증(Allodynia)’이 있는데, 이것은 ‘통증을 느낄 수 있는 자극이 아님에도 통증으로 받아들이는 증상’을 의미합니다.
통각과민과 이질통증 모두 복합부위통증증후군(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 CRPS)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호소하는 증상들이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통증을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약제인 ‘진통제’를 의미하는 단어에도 알게아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Analgesic’이라고 통칭하는 약들이 바로 그것인데, 부정/없음(without)을 의미하는 접두사인 ‘An-‘과 algea에서 파생되어 통증을 느낀다는 뜻을 지닌 단어인 ‘algein’을 합쳐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약’을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영어 사용권 국가를 방문할 때 ‘진통제’가 필요한 경우, 약국 내의 ‘Analgesics’라고 표시된 코너로 가면 적절한 약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