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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Jun 21. 2022

탑건:매버릭, 그 속에 등장하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도전

중세 기사도 문학과도 닮아 있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이야기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86년에 개봉하여 전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탑건]의 후속편이 36년 만에 새롭게 만들어져 개봉하였습니다. 과연 3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후속편이 전편의 명성과 매력을 뛰어넘을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도 불러일으켰지만, 이번 [탑건: 매버릭]은 기대 이상의 작품이었습니다. 

탑건(1986)과 탑건-매버릭(2022)의 포스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정석이라고 할 만한 물량 공세가 돋보이는 수많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의 등장, CG 없이 촬영되었다는 화려하고 긴박감 넘치는 비행 장면,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젊고 혈기 왕성한 전투기 조종사들의 자존심 대결, 그들을 실력으로 압도하면서도 스승으로서 아껴주며 이끄는 백전노장의 활약, 태평양 해군 기지가 위치한 샌디에고의 멋진 풍광, 그리고 올드팬들의 추억을 되살리는 수많은 전편 오마주 장면들까지… 2시간 10분이라는 상영시간이 지루할 틈 없이 지나가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탑건-매버릭 속 장면들.


전편과 마찬가지로 스토리라인은 상당히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오히려 전편의 내용을 최대한 답습하여 1986년의 탑건을 감상했던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이번에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전편을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1986년과 2022년이란 긴 세월의 간극을, 여전히 종횡무진 날뛰는 야생마 같은 조종사, 매버릭이 등장하여 이어줍니다. 

1986년도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 매버릭의 오토바이 질주 장면.


1986년에 말간 청년의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F-14를 조종하고, 전투기가 날아오르는 활주로를 오토바이로 질주하며, 멋진 우정과 사랑도 나누고,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도 하며, 자신에게 닥친 슬픔과 시련을 넘어 승리를 거머쥐는 역할을 했던 매버릭은 2022년에도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늘어난 세월의 흔적만큼 단순히 혼자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1986년의 자신만큼 젊고 당당한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1986년 탑건 속에 등장했던, 최고의 친구 구스(goose)와 연인 찰리.


1986년 작품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친구를 잃고 자신의 과오에 대하 반성하며, 결국에는 아이스맨과도 서로 인정하는 좀 저 성숙한 파일럿이 되었다면, 이제는 젊은 맹수 같은 조종사들을 자신을 따르게 만들고 또한 자신을 능가하는 조종사로 만들어주기 위해(그리고 비행에서 안전히 귀환하게 만들어주려는) 어른이자 스승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전보다는 차분하지만 여전히 멋진 조종사 매버릭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일 것입니다. 

노련미가 넘치는 교관이 되어 돌아온 매버릭.


젊은 시절의 매버릭을 떠올리게 하는 수많은 젊은 조종사들의 모습도 압권입니다. 저마다의 콜사인으로 불리우며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 특히 1987년 영화와 마찬가지로 모래사장에서 비치발리볼을 하며 즐거워하는 장면은 젊음의 문법이란 세월을 넘어서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란 생각이 들게 만들어줍니다.


특히 1986년 영화 속에서 사망하며 모두를 안타깝게 만들었던 구스의 아들(콜사인은 루스터)이 그를 닮은 모습으로 또 다시 최고의 조종사가 되지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친구의 아들을 바라보는 매버릭의 걱정, 대견함, 미안함, 그리고 스승이자 선배 조종사로서의 책임감과 같은 복잡하고도 애틋한 감정이 저희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1986년 탑건 속에서 비치발리볼을 하던 매버릭과 그의 라이벌인 아이스맨(좌측). 2022년 탑건 속에서 라이벌 포지션인 행맨(우측 상단)과 루스터(우측 하단, 구스의 아들). 


이 외에도 4성 장군이 되었으나 여전히 대령인 매버릭과 우정을 나누고 지지해주는 아이스맨의 등장(이 부분이 저에겐 은근히 감동적이었던...)과,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다시 한 번 매버릭을 구해주는 아름다운 전투기 F-14 톰캣의 모습 등… 전설적인 영화의 후속편이 갖춰야할 모든 미덕을 다 지닌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아름답고 정겨운 전투기인 F-14 톰캣.


이러한 탑건을 보면 생각나는 문학장르가 있는데, 바로 ‘중세 기사도 문학’입니다. 걸출한 능력을 지닌 기사가 명마에 올라타 적과 싸우고 용과 같은 괴물도 물리치며, 귀부인을 구출하고 자신이 모시는 위대한 주군에게 그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담긴 전통적인 기사도 문학의 클리셰가 20세기와 21세기에 만들어진 탑건 안에서도 건재해 보인다고 느낀다면 저만의 착각일까요? (제 개인적으로 매버릭과 가장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기사는 롤랑과 란슬롯입니다.) 

샤를 마뉴의 기사이자 롤랑의 노래의 주인공인 롤랑(좌)과 아서왕 이야기 속의 유명한 기사 란슬롯(우).


저는 첫 장면에서 신형 전투기를 타고 마하 10의 속도를 돌파하는 매버릭의 모습에서, 판타지 작품 속의 ‘용기사’가 현대 배경으로 재해석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전투기에 탑승하여 조종에 익숙해지는 과정 자체가 말이나 판타지 속 용과 같은, 생물의 등에 올라타 그들을 길들이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세 시대에 ‘기사’라는 직책이 귀했던 이유는 ‘말’이라고 하는 생물을 기르고 훈련시킬 재력이 있어야하며, 말에 올라타서 적과 싸울 정도의 기술과 체력을 고루 갖춰야하는 고도의 전문직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말이라는 생물이 생각보다 겁도 많고 통제가 어려워 말에 타는 과정에서 말발굽에 치이거나 낙마하여 크게 다치거나 사망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으니… 생명을 담보로 한 극한의 전문직이라고 볼 수 있죠.

이는 현대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겪는 어려움과도 닮아 있습니다. 전투기와 조종사 훈련 비용이야 국가가 부담한다고 하지만, 전투기 조종에 익숙해지기 위해 견뎌야하는 교육 과정과 그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 자체는 오롯이 전투기 조종사의 몫이니까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21세기의 기사인 전투기 조종사들이 겪는 육체적 위기 상황에 대해서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의사의 입장이어서인지, [탑건: 매버릭]의 수많은 멋진 비행 장면들 중에서도 특히 제 눈에 들어왔던 장면이 바로 ‘페이백’이라는 조종사의 비행 훈련 장면입니다. 제가 언급한 전투기 조종사의 육체적 위기 상황이 잘 나타나게 되는 장면입니다. 


[탑건: 매버릭]에서 그들이 다뤄야하는 작전은 극한의 비행 환경을 견뎌내야하는 험한 지형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작전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무사히 완수하기 위해, 매버릭은 그의 제자들에게 여러가지 고강도 훈련을 제시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고속으로 비행고도를 낮추는 훈련이었는데, 이 훈련에서 가장 위험한 점은 엄청난 중력 가속도가 조종사에게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고속의 전투기를 몰다 보면(이와 비슷한 상황이 우주선의 비행사), 조종사는 엄청난 중력 가속도(g)를 경험하게 되고 이로 인한 의식 소실(black out 혹은 Loss of Consciousness)이 일어나 본인의 생명과 전투기를 모두 잃어버릴 수 있는 위기 상황에 처할 수 있게 됩니다. 중력가속도에 의해 의식 소실이 일어나는 기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높은 중력가속도가 신체에 가해지면 혈액은 신체의 하부로 몰리게 되고, 흉강 내 압력이 유지되지 못해 심장이 운동할 공간이 좁아져 뇌로 충분한 혈액이 공급되기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의식이 끊기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g-suit (혹은 anti-g suit)입니다. 현대 배경의 전투기 조종사가 나오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상이죠. 


그리고 전투기를 타기 전에 항공생리훈련이라고 하는, 6~7G(지상 중력의 6~7배)에 달하는 압력에서 견디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조종사나 예비 조종사들이 신체 여기저기의 실핏줄이 터지고 의식을 잃는 경험(G-LOC, G-force induced Loss Of Consciousness)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G-suit 뿐만 아니라, anti-G straining maneuver (AGSM, 중력 가속도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일종의 특수 호흡법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이 호흡법을 시행할 때 ‘hook (훅)’ 혹은 ‘K (크)’와 같은 소리를 내야하기 때문에 ‘Hook maneuver’라고도 불리는데, 이 방법을 통해 기도의 성대 사이에 있는 틈인 성문(glottis)를 막아서 흉곽 내에 심장이 펌프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굉장히 효과적이어서, 이 방법을 시행한 조종사들은 8G의 환경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1).




전투기 내에서 경험하게 되는 엄청난 압력은 현대의 기사인 조종사가, 예전처럼 갑옷만 입고 말에 올라타거나 바로 앞에서 돌격하는 적을 마주하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압박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저 장면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잃고 암전되는 순간이 조종사가 감당해야할 극한의 고독과 공포가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고요. 

전투의 선봉에 서서 돌격했던 중세의 기사(좌)와 현대의 기사와 같은 존재인 전투기 조종사(우).


우리는 탑건을 보며 저마다 여러가지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 안에는 1986년 탑건에 대한 추억, 여전히 건재한 탐 크루즈의 모습에 대한 감탄, 웅장한 전투 비행 장면에 의한 감동, 젊고 패기 넘치는 조종사들이 보여주는 화려함에 대한 열광 등등 다양한 감동 포인트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전투기의 비행 및 조종 장면이 실감나게 잘 촬영된 영화인만큼, 중력가속도와 싸우는 조종사들의 모습에도 주목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중세 시대가 아닌 21세기에도 우리에게 기사도 문학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켜주는, 멋진 조종사들이 펼치는 하늘을 달리는 질주에 함께 참여하는 환상적인 경험을 즐겨 보시길 바랍니다.





<각주>
1.     P E Whitley. Pilot performance of the anti-G straining maneuver: respiratory demands and breathing system effects. Aviat Space Environ Med.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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