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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Oct 13. 2022

빨강머리 앤이 소녀에서 어른이 되는 순간

매튜 아저씨의 죽음을 통한 유년기와의 이별


‘빨강머리 앤(원제는 Anne of Green Gables)’은 1908년에 출판된 책으로, 소설 속의 주인공인 사랑스러운 소녀 앤(앤 셜리, Anne Shirley)은 캐나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 1874~1942)’에 의해 탄생하였습니다.

빨강머리앤의 초판본 표지(좌)와 작가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1935년에 촬영한 사진(우).



이 소설은 작가가 본인의 고향이기도 한 ‘프린스 에드워드 섬(Prince Edward Island-캐나다에서 가장 작은 주)’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그 섬에 존재하는 사촌의 집인 ‘초록색 지붕집’도 등장시켜 만든(관광 홈페이지에도 등장:  https://www.tourismpei.com/what-to-do/anne-of-green-gables) 작품이기도 합니다.

지도 상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붉은 원 안). 캐나다에서 가장 작은 주입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다 보면 현실감 넘치는 묘사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많고,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에이번리(Avonlea, 실제로는 캐번디시라는 도시가 배경)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 줍니다.

특히 앤이 사랑하는 초록색 지붕집과 짚 앞의 눈의 여왕님(벚나무), 빛나는 호수를 직접 눈에 담고, ‘환희의 흰 길(사과나무 길)’과 자작나무 길을 거닐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실제로도 수많은 팬들이 ‘성지 순례’ 하듯이 저 섬을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프린스 에드워드 섬과 초록색 지붕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초록색 지붕집과 집 앞에 있는 하얀 벚나무인 눈의 여왕님(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의 모습(1979년 애니메이션 속 이미지).



많은 분들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세계명작극장, 1979년, 닛폰 애니메이션)을 접하신 적이 있을 것이며, 특유의 동화 속 삽화 같은 그림체와 서정적인 분위기 덕분에 ‘빨강머리 앤’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경우도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는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이라는 주제가와 함께 기억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인 다이애나(오른쪽)와 함께 있는 앤의 모습.



소설이든 애니메이션이든, 고아지만 밝은 성격과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소녀 앤이, 커스버트 남매(오빠 매튜/여동생 마릴라)가 사는 집에 입양되어, 다이애나라는 소중한 친구를 사귀고, 학교를 다니며 총명함을 뽐내고, 길버트 브라이스라는 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들을 보여줍니다.

앤을 입양해준 커스버트 가의 풍경(좌)과 앤에게 처음에는 머리카락을 놀리며 장난을 치다가 비호감이 되었던 길버트의 모습(우).



앤 특유의 호기심 많고 자존심이 강하며 또한 꿈꾸는 듯한 태도들로 인해, 여러가지 소소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자신의 이름 끝에 꼭 ‘E’를 붙여달라고 강조하고, 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이려다가 망친다거나, 자신을 홍당무라고 놀린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려치기도 하고, ‘샬롯의 아가씨’ 흉내를 내보려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 한다던지…), 전반적으로는 자신을 입양한 커스버트 남매와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고 평온하면서도 아름다운 시골마을 에이번리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잔잔하게 그려집니다.



고아의 신분으로 낯선 동네에서 살게 된 앤이 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타고난 성격이 밝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애정과 지지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 중에서는 그녀를 입양한 커스버트 남매, 특히 그 중에서도 매튜 커스버트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앤을 만나서 에이번리로 데려오는 역할을 맡은 매튜의 모습. 선량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아저씨로 그려집니다.



조용하고 수줍지만(동네 여성들과 대화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친절하고 선량한 성격을 지닌 매튜는, 입양을 통해 만난 앤에게 진정한 가족의 사랑을 보여준 훌륭한 어른이기도 합니다.

원래 커스버트 남매는 농장일을 도와줄 남자아이를 입양하려 했으나 소개인의 착오로 여자아이인 앤이 오게 되었고, 이에 마릴라는 앤을 돌려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매튜는 자신을 입양해줄 사람들과의 새 삶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앤의 마음을 알았기에 아이를 돌려보내기를 반대합니다. 사실 매튜의 조용한 성격을 볼 때, 자기 주장이 상당히 강한 여동생 마릴라의 뜻에 반대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고, 게다가 자신의 일을 도와줄 수 없는 여자아이를 거둔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는 손해이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매튜는 아이의 꿈을 짓밟기 싫었던 다정한 어른이었기에 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외롭고 힘들게 살아왔던 앤에게 ‘아버지의 사랑’이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2017년판 드라마 속의 앤과 커스버트 남매.



앤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마릴라를 대신하여 종종 간식을 사다주기도 하고, 앤이 너무나도 입고 싶어하던 부푼(퍼프) 소매 드레스를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민한 앤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결국 퀸 학원이라는 고등교육기관에 수석 입학하게 되는 과정에서 계속 응원해주었으며, 남자아이 대신 자신이 와서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앤에게 ‘너는 자랑스러운 내 딸’이라는 말을 하며 앤과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량하고 다정한 매튜가 갑자기 죽게 되면서앤은 초록색 지붕집의 소녀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약간은 동화 같은 느낌도 나던 소설의 분위기가 좀 더 무겁고 진중해지는 방향으로 바뀌는 분기점이 ‘매튜의 사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속 매튜의 장례식.



매튜는 앤이 퀸 학원을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날, 자신의 전재산을 맡겨 놓은 은행의 파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됩니다. 앤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직전에, 게다가 입양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랑으로 진정한 가족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훈훈한 장면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매튜가 사망하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앤과 독자들 모두를 슬픔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매튜가 심장 상태가 좋지 않다는 언급은 작품 안에서도 종종 나옵니다. 매튜가 가슴에 답답함과 통증이 있다가 나아졌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고, 매튜의 심장이 약해서 마릴라가 그 치료용으로 딸기술을 담가 놓았다(실제적으로는 심혈관 질환에 술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만…)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앤의 친구 다이애나가 술인 줄 모르고 마셔서 만취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매튜의 심장 문제를 위해 마릴라가 만들어놓은 딸기 술을 마셔버리는 다이애나.



아마도 매튜는 워낙 심혈관질환(Cardiovascular disease, CVD), 좀 더 정확히는 허혈성 심장 질환(Ischemic heart disease-심장에 혈류를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막혀서 발생하는 병)을 앓고 있었으나, 19세기(1880년대 배경)의 의학 수준에서는 특별한 예방이나 치료 조치를 받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망 당시 65세 정도의 나이, 그리고 평소 피고 있던 담배가 심혈관질환의 위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중간에 잠시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던 사건 역시 급성심근경색(acute myocardial infraction) 증상이 나타났다가 운 좋게 호전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품 속에서 종종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그려지는 매튜.



매튜가 기저에 고혈압이나 당뇨병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19세기에는 심혈관 질환의 위험 요인인 고혈압이나 당뇨병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기에 그와 같은 질병을 진단받는 내용도 없습니다.

당시에는 혈압이나 혈당이 정상인지를 정확히 측정할 방법도 없었고(최초의 현대적 형태의 혈압계는 1881년에(1), 혈당 측정기는 1960년대 정도에 만들어졌습니다(2)), 그에 대해 알았다고 한들 높은 혈압을 정상으로 만들거나 혈당을 떨어뜨리는 효과적인 치료법도 개발되지 않았었으니까요.

1881년에 최초의 혈압계를 발명했던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의사인 Samuel Siegfried Karl Ritter von Basch(좌). 20세기 초의 혈압계(우).




특히 심혈관 질환의 가장 강력한 위험 요인인 혈압 같은 경우는, 소설 속 매튜의 다음 세대 정도라 볼 수 있는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1882-1945)조차도 제대로 조절 받지 못해 심부전, 신부전, 뇌경색 등이 발생했고, 결국에는 63세 나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3).

1944년도에 촬영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진.



1950년대에 들어와서야 현재도 사용되는 이뇨제 계통의 혈압 강하제가 고혈압 환자에게 쓰이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안정제를 처방하거나 염분과 지방을 덜 섭취하는 식이 조절 등이 고혈압의 치료 방법으로 적용되었습니다(3,4).


매튜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으로 생각되는 허혈성 심질환에 대해서는, 1870년대에 니트로글리세린(nigroglycerin, NTG, 혈관 확장 및 심근으로의 혈류 공급 증가 효과)을 사용하는 방법이 제시되긴 했었습니다(5).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의 상용화는 20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에, 매튜의 경우에는 심근경색 증상이 나타났을 때 이 약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아스피린이 심근경색 발생 위험도를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1950년대에 들어와서야 알려지기 시작했기에 매튜가 살던 시절에는 2차 예방을 위한 방법도 사용해볼 수 없었겠죠(6).

허혈성 심장질환과 관계된 중요한 약들인 니트로글리세린(좌-혀밑으로 넣어 복용)과 아스피린(우).



이러한 상태에서 은행 파산 소식은 매튜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며, 그의 심장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갑작스럽고 강력한 스트레스는 심박동수와 혈압을 높이고, 전체적인 신체의 산소요구량이 늘어나게 만들며,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하며, 관상동맥의 수축을 일으켜 심근경색이 일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7).

은행 파산 소식이 담긴 신문을 읽고 흉통을 느끼는 매튜.



이렇게 소설 안과 밖의 상황들을 살펴보았을 때, 수많은 요인들이 합쳐져 매튜에게 심장 마비를 일으켰고 끝내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른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현대 의학을 공부한 의사의 관점으로 보면, 매튜가 19세기에 살고 있었기에 그의 죽음을 막을 여러 기회를 놓친 것이라 생각이 들어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매튜가 21세기에 살고 있었다면,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 고혈압, 당뇨, 혹은 고지질혈증 등의 심혈관질환 발생의 위험 요인은 없는지도 미리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심장 마비 증상이 있었을 때도 바로 병원에 가서 여러가지 검사(심전도, 심근효소 검사, 심장 초음파 검사, 심혈관 조영술 검사 등등)를 받고, 심근 손상 정도 및 관상 동맥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처치(약물 치료, 스텐트 시술 등)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죠.

관상동맥조영술을 통해 관찰되는 심장혈관의 모습.



이후에도 2차 예방을 위해 항혈소판제제(아스피린과 같은)를 처방받고, 혈압/혈당/지질 관리, 스트레스 관리, 여러가지 위험 요인을 피하는 방법 등에 대한 교육 역시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앤이라는 소녀의 아름다운 세계를 지켜주던, 가장 다정한 사람이 ‘어른의 질병’으로 떠나게 된다는 설명이 참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아이들의 꿈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세상의 풍파를 견뎌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충격으로 사망하는, ‘어른이기에 겪게되는 모습’을 매튜가 보여준 셈이니까요.


매튜의 사망은 작품 속에 잊히지 않을 슬픔을 남겼지만, 우리의 주인공 앤은 슬픔과 절망 속에 주저 앉지 않습니다. 대학 진학은 포기해야 했으나, 에이번리의 학교에 교사로 취칙하고 남아있는 가족인 마릴라와 함께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또 다른 고아들을 돌보아 주고, 자신의 친부모의 흔적도 찾아가고, 의사가 된 길버트와 결혼하여 많은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지혜롭고 다정한 어른이 되어 살아갑니다. 매튜가 주었던 조건 없는 사랑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전해주게 되는 것이죠.

매튜를 떠나보낸 후 마릴라와 의지하며 슬픔을 이겨내는 앤(좌), 훗날 길버트와 사랑에 빠지는 앤의 모습(우).



이런 면에서 빨강머리 앤은 현실적이지만, 매우 다정한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년기의 끝에서 다정한 매튜 아저씨와의 이별은 있지만, 그가 주었던 사랑이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니까요.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참고문헌>
1.     Booth, J (1977). A short history of blood pressure measurement.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70 (11): 793–9.
2.     Clarke SF, Foster JR. A history of blood glucose meters and their role in self-monitoring of diabetes mellitus. Br J Biomed Sci. 2012;69(2):83-93.
3.     Bruenn HG: Clinical notes on the illness and death of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 Ann Int Med 1970;72:579–591.
4.     Marvin Moser, Evolution of the Treatment of Hypertension From the 1940s to JNC V. American Journal of Hypertension, Volume 10, Issue S1, March 1997, Pages 2S–8S
5.     N Marsh, A Marsh. A short history of nitroglycerine and nitric oxide in pharmacology and physiology. Clin Exp Pharmacol Physiol. 2000 Apr;27(4):313-9. doi: 10.1046/j.1440-1681.2000.03240.x.
6.     Miner J, Hoffines A. The discovery of aspirin's antithrombotic effects. Tex Heart Inst J. 2007;34(2):179–86.
7.     Janet M. Torpy, et al. Acute Emotional Stress and the Heart JAMA. 2007;298(3):360. doi:10.1001/jama.286.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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