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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Nov 11. 2022

의사와 주술사의 경계에 있던 멜람푸스 이야기(1)

프로이투스 왕의 딸들을 치료한 멜람푸스


아스클레피오스와 같은 의술의 신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치유’의 능력을 보여줬던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멜람푸스(Melampus)로,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아이의 발을 햇볕 아래 내놨다가 까맣게 탔기에 ‘검은 발’이란 뜻의 멜람푸스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1).


멜람푸스는 그 이력이 상당히 특이한데, 그의 직계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홍수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부부였던 ‘데우칼리온(Deucalion)’과 ‘피라(Pyrrha)’가 나옵니다(2). 데우칼리온이 티탄 신족인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이며, 피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기에, 멜람푸스의 가계는 티탄 신족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우칼리온과 피라.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이후, 신탁에 따라 자신들의 등 너머로 돌을 던져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는 모습입니다. Giovanni Maria Bottalla, 1653년



멜람푸스는 디오니소스 신앙을 그리스에 소개한 자로도 알려져 있으며(일종의 전도사),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집트에서 일종의 예언 능력을 배워왔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리스 신화의 배경인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 기원 전 1750년 ~ 1050년 사이) 시대에도 이집트는 이미 크게 번성하던 왕국이며 뛰어난 문명을 이루고 있었기에, 이집트인들에게서 여러가지 신비해 보이는 선진 문물을 받아왔다는 설정이 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멜람푸스는 티탄 신족에서 이어지는 아주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이며 당시 선진국인 이집트에서 다양한 지식을 배워왔고, 디오니소스 신앙을 그리스에 알리는 역할도 했던, 일종의 지식인 겸 종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멜람푸스의 치료 능력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는, 아르고스(Argos)를 다스리던 왕인 프로이투스(Proetus) 왕의 딸들의 병을 낫게 해준 것입니다.

당시 디오니소스 신앙은 그 신도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광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던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멜람푸스가 디오니소스의 신앙을 아르고스에 전파하려고 했을 때, 프로이투스 왕과 그의 세 딸들(리시페, 이피노에, 이피아나사)은 매우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 제의 중에 경험할 수 있는 광기에 빠진 어머니와 이모(아가베와 이노)에게 멧돼지로 오인받아 죽게 되는 테베의 왕 펜테우스.



그런데 멜람푸스가 아르고스에 당도했을 때쯤, 마치 디오니소스가 이들의 태도에 분노해서 벌을 내린 것처럼 프로이투스의 세 딸들이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소가 되었다고 믿게 되어, 괴성을 지르며 들판을 헤매어 다녔습니다. 또한 그들의 겉모습도 이상하게 변했는데,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처럼 되었으며, 피부는 하얗게 질린 것처럼 보였고, 몸 여기저기에 고름이 흐르는 상처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강한 성욕에 사로 잡혀 숲에 있는 양치기들과 성관계를 맺는 모습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딸들의 이상 행동에 놀란 프로이투스 왕은 자신의 딸들을 치료해 주는 사람에게 왕국의 1/3을 주겠다고 선언했고, 이 때 멜람푸스가 나서게 됩니다. 처음에는 디오니소스 신앙을 퍼뜨리려는 멜람푸스가 탐탁치 않았기에, 프로이투스 왕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었지만 자신의 딸들의 광기가 계속되고 그 증상이 다른 여성들에게도 발생하기 시작하자 결국 멜람푸스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멜람푸스는 왕국의 2/3를 요구하였고, 별 다른 방법이 없던 프로이투스 왕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왕의 약속을 받아낸 멜람푸스는 숲을 헤매고 다니는 세 공주를 추적해 사로잡았는데, 이 과정에서 첫째인 리시페는 사망했으나 나머지 두 딸들의 광기는 신성한 목욕과 ‘Helleborus niger’라는 약초를 이용하여 치료했다고 합니다.



Helleborus nigger의 모습. 크리스마스 로즈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식물입니다.



무사히 치료된 공주들과 함께 돌아온 멜람푸스는, 프로이투스 왕과 나눴던 약속대로 왕국의 2/3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멜렘푸스와 그의 남동생이 공주들과 혼인하게 되었기에, 최종적으로는 아르고스 왕국 전체를 물려받아 다스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멜람푸스가 보여준 기적 같은 치료 능력 덕분에 그가 섬기던 디오니소스 신앙도 순조롭게 아르고스 전역으로 전파되었고요.



그럼 이 이야기 속에서 공주들, 그리고 왕국에 살던 여성들에게 퍼진 광기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신화적으로 생각하면, 디오니소스가 그의 권능으로 퍼뜨린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녀들이 경험한 증상들과 기괴한 광기가 퍼지던 양상을 토대로 분석해보면 재미있는 가설을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오니소스 신앙을 퍼뜨리기 위해 멜람푸스가, 아르고스에 발생한 대규모 ‘맥각 중독(Ergotism)’ 상황을 이용했을 가능성입니다.


맥각 중독은 맥각균(Claviceps purpurea-곰팡이의 일종)이 감염된 곡식 등을 섭취하여 발생하게 됩니다. 맥각균은 호밀과 같은 식물의 씨방에 기생하는데, 이 균에 감염된 곡식은 그 크기가 커지고 어두운 색을 띄게 됩니다. 이 감염된 곡식을 섭취하게 되면, 맥각균에서 분비한 알칼로이드에 의해 다양한 독성 증상을 겪을 수 있게 됩니다.



맥각균에 감염된 호밀. 원래 호밀의 모습과 달리 색이 검고 크기가 부풀듯이 커진 부분이 관찰됩니다.



이 알칼로이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에르고타민(Ergotamine)입니다. 현대에는 편두통 증상 치료제를 만들거나 파킨슨병 치료제인 ‘도파민 효현제(Dopamine agonist)’와 같은 약제를 만들 때도 활용되지만, 이 자체에는 혈관 수축이나 자궁 수축 효과가 있어, 혈관 수축 작용에 의해 사지의 저림, 통증, 가려움증, 피부 괴사 등이 일어날 수도 있고, 자궁 수축에 의한 유산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3).

또한 맥각 알칼로이드에 의한 신경독성으로 두통, 어지럼증, 환각, 경련이 일어날 수 있고, 심하게는 혼수 상태에도 이를 수 있습니다(3,4). 이 외에도 소화기계 증상인 복통이나 구토, 설사 등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게다가 에르고타민이 탈모를 일으킬 수도 있어서, 공주들이 겪었던 여러 가지 정신병적 증상, 피부 손상, 머리카락 소실 등이 맥각 중독의 증상과 어느 정도 잘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맥각 중독 증상은 고대 이집트에서도 알려져 있었다고 하며(5), 디오니소스 신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엘레우시스 비의(신자들에게만 참여가 허락되는 비밀스런 의식으로 대지와 농경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종교)에서 체험하는 황홀경을 일으킬 때 맥각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6). 그러므로 이집트에서 지식을 배우고 디오니소스 신앙을 가지고 있던 멜람푸스는 맥각 중독 증상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엘레우시스 비의를 묘사한 작품. 기원전 4세기.



멜람푸스는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맥각 중독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더 이상 맥각에 감염된 곡식 및 그것을 재료로 만든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도록 하고(공주들을 잡아 가두는 형식으로) 그 독성이 빠지길 기다리며, 신성한 목욕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미 발생한 상처를 치료하고 혈관 수축에 의한 사지 저림 증상 등을 완화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남아 있을 광기와 우울감을 Helleborus niger라는 약초를 사용하여 추가적으로 호전시킨 것으로 생각됩니다(7).


아르고스의 공주들을 치료하는 멜람푸스의 모습.



물론 맥각 중독이란 것이 성별이나 나이를 가려 발생하진 않으므로, 세 명의 공주들 뿐만 아니라 아르고스에 사는 여성들에게 전염되듯 광기가 나타났다는 점은, 이야기 속 광기의 원인이 ‘맥각’이 아닌 다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아르고스에 사는 남성이나 어린이들이 유독 맥각균에 감염된 곡식을 덜 섭취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가설을 더 제시해본다면, 공주들에게 발생한 광기와 탈모, 피부 병변 등은 맥각 중독 증상이 맞으나, 다른 여성들에게 발생한 광기는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Mass hysteria)’에 의한 증상일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집단 히스테리는 ‘불안 요인 있는 상황에서 그 상황을 공유하는 대규모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명백한 전염성 해리 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8). 이 집단 히스테리는 불안이 퍼지는 형태와 이상한 운동 증상이 발생하는 형태(중세에 발생했던 ‘댄싱 플래그(Dancing plague)’와 같은)로 나뉘어지는데, 이번 코로나 판데믹 때 질병 감염에 대한 불안과 공포감이 전세계적으로 팽배하던 상황도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집단 히스테리를 표현한 사진(좌)과 1518년에 유럽에서 발생했던 댄싱 플래그 상황을 묘사한 그림(우).



신화 속 아르고스에서는 공주들이 끔찍한 광기에 사로잡혔고, 이것이 디오니소스 신의 분노와 관계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가능성이 높고(그들이 신앙을 거부하고 있었으므로), 디오니소스가 일으키는 광기는 주로 여성들에게 발생(위에 나온 펜테우스의 비극처럼)한다는 이야기도 암암리에 퍼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공주들처럼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여성들 사이에 이상한 심리 상태와 행동이 퍼져나가 결국은 프로이투스 왕이 왕국의 2/3를 내놓으라는 멜람푸스의 요구에 굴복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가 공주들이 모두 치료되고 멜람푸스에 의해 디오니소스 신앙이 퍼지게 되자(신께서 아르고스를 용서했다는 말을 곁들이지 않았을까요?), 집단 히스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게 된 것이죠.



머나먼 옛날부터 전해지는 신화 속 에피소드이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저의 능력으로 아르곳 여인들이 겪었던 증상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도 신화를 좀 더 재밌게 읽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신비한 지식과 능력의 소유자인 멜람푸스의 활약은 다음 편에 또 이어집니다.






<각주>
1.     Melano- 혹은 Melam-은 ‘검다’를 의미하며(동물에 피부에 존재하는 검은 색 혹은 짙은 갈색 색소를 멜라닌-Melanin-이라고 부르죠), 여기에 발을 의미하는 단어인 ‘pus’가 합쳐진 이름입니다. ‘부푼 발’이란 뜻의 오이디푸스와 비슷한 작명인 셈이죠.
2.     데우칼리온과 피라 사이에서 그리스인들의 공통 조상으로 여겨지는 헬렌(Hellen, 그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헬라인이라고 칭했습니다)이 태어났는데, 멜람푸스의 아버지인 아미타온(Amythaon)이 헬렌의 증손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3.     Wanda M. Haschek, Val R., et al., Beasley General Toxicologic Pathology, in Handbook of Toxicologic Pathology (Second Edition), 2002
4.     에르고타민 성분과 비슷하게 합성된 약물 중 하나가 바로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로, 강력한 환각 효과가 있어서 위험합니다.
5.     M. Satin, History, Science and Methods, in Encyclopedia of Food Safety, 2014
6.     Paul L. Schiff, Jr., Ergot and Its Alkaloids. Am J Pharm Educ. 2006 Oct 15; 70(5): 98.
7.     V. Kishor Kumar and K. G. Lalitha, Pharmacognostical and Phytochemical Studies of Helleborus niger L Root, Anc Sci Life. 2017 Jan-Mar; 36(3): 151–158.
8.     Michael Sharpe, Jane Walker, et al., Neurotic, stress-related and somatoform disorders, Companion to Psychiatric Studies (Eighth Editio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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