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제가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의사들에 대해 다루던 도중 잠깐 언급한 바가 있었던 내용이 바로 ‘아이기나(Aegina) 섬에서 전염병과 싸우던 의사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비디우스(Ovid, 기원전 43년 ~기원후 17년)라는 로마 제국 시대의 시인이 만든 작품인 <변신이야기(Metaorpnoses)> 7권에 담겨있습니다. 비록 환자와 의사들 모두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적인 내용이었지만, 질병에 대항해 싸우던 의사들의 모습이 잠시나마 언급되었기에 저에게는 굉장히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스(Iliad)에 따르면, 그리스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아킬레스건의 어원인 그 영웅)가 트로이 전쟁에 참여할 때 데려갔던 병사들이 뮈르미돈(Myrmidon-각주 1) 족이라고 잠시 언급되는데, 뮈르미돈이란 ‘개미 사람(ant-men)’이란 의미가 있으며, 그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오비디우스가 기술한 내용이 바로 오늘의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루칸토니오 준티가 1497년 베네치아에서 출판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위키피디아.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속에서 이 뮈르미돈족은 정말 개미가 인간으로 변신한 존재들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개미 사람들이 탄생하기에 앞서 아이기나 섬의 모든 주민들이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전염병의 원인은 신화 시대 이야기답게 조금은 황당한데, 이 섬의 이름인 아이기나가 바로 제우스가 희롱했던 님프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기나는 강의 신인 아소포스의 딸인데, 제우스가 그녀를 섬(그 섬의 이름을 아이기나로 명명)으로 납치하였고, 그 사이에서 아이아코스(Aeacus)라는 아들이 태어나자 그 섬의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각주 2).
실제 아이기나(애기나) 섬의 위치. 아테네와 마주 보는 위치에 놓인 섬입니다.
어쨌든 헤라는 자신의 분노를 아이기나도 아닌, 아이기나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투사하게 되는데(이래서 작명이 중요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그 섬에 유행병(Epidemic)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신화 속 질병은(각주 3), 변신이야기 속의 묘사를 그대로 참고하자면, 여름(무더위)부터 발생하였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병원체(헤라의 분노?)가 섬으로 들어왔으며, 처음엔 야생 동물들(들짐승, 새, 뱀)이 병에 걸려 죽어갔고 그 다음엔 가축(양, 소, 말, 개), 그리고 사람들(가축을 다루던 농부들이 먼저 감염)의 순서로 감염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어가며 내뿜는 숨결과 죽은 후 썩어가는 사체들에 접촉하게 되는 과정(동물을 치우든, 사람들의 시체를 매장하든 간에)에서 전염병이 더욱 멀리 퍼뜨려진다고 하였습니다.
병의 증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고열: 먼저 내부 장기가 뜨거워지고 피부가 붉어지고 숨결이 뜨거워집니다./땅도 그들의 열기를 식혀주지 못합니다. (2) 혀의 염증? + 림프선 비대?: 혀는 거칠고 열로 부어 오릅니다. (3) 호흡곤란 증상: 입술은 갈라지고 마른 숨으로 바싹바싹 말리며 헐떡이며 무거운 공기를 빨아들입니다. (4) 피부의 지각과민 증상?(각주-4): 병자는 침대나 어떤 이불도 용납하지 못하고 맨땅에 엎드려 눕습니다. (5) 전신 쇠약: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서 있기에는 너무 약하고… 서 있을 힘이 없으면 땅바닥에 굴러다닙니다. (6) 환자와 가깝게 접촉할수록 병에 걸리기 쉬움: 집이 그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좁은 공간에 함께 있는 상황) 가산을 버리고,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건물 자체를 비난합니다. *** 여기서 의사들이 환자들과 함께 희생되는 것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의사들이 병자들에게 가까이 있을수록, 사심 없이 돌볼수록 운명(병에 감염되어 죽음)을 더 빨리 맞이하고, 회복의 희망이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죽음에서만 병이 끝나는 것을 볼 때, 의사들은 그들의 운명에 굴복합니다. (7) 정신착란 증상: 반쯤 죽은 채로 거리를 헤매어 다니고… 땅에서 울부짖고…
그리고 이 전염병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도 존엄하게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시체는 모조리 태워지고, 결국 화장할 장작조차 부족해진 비참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부모와 자식의 영혼이 모두 방황한다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 병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인수공통감염(zoonosis)이자 접촉성 감염의 특성, 고열/호흡곤란/피부지각과민/전신쇠약/정신착란 증상, 그리고 매우 높은 전염력과 치사율을 보이는 무시무시한 질병이 아이기나 섬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최후에는 이 섬의 왕인 아이아코스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아이아코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기도를 올리자(저 나무에 있는 개미들처럼 많은 백성들이 다시 생겨나게 해주소서), 제우스는 그를 위해 그 개미들을 모두 사람으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원래 모습인 개미라는 이름을 붙여 뮈르미돈이라 부르게 된 것이죠. 신이 내린 전염병에 의해 발생한 커다란 비극이 개미들의 변신이라는 신비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희망’의 이야기란 결말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이아코스 왕의 소원대로 개미들이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 17세기 작품. 출처- http://www.maicar.com/GML/Aeacus.html
일리아스 속에 등장한 뮈르미돈 족의 이름을 토대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써내려간 오비디우스의 능력이 놀라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과연 오비디우스는 이러한 전염병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본인이 직접 경험한 질환의 모습들 혹은 역사 속의 기록들을 참고한 후 여기에 신의 분노라는 측면을 더해 섬의 주민들이 절멸하는 극한 상황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문헌들을 찾아보던 중, 오비디우스가 참고했을만한 전염병의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아테네 대역병(The Plague of Athens)’ 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 중 하나이자,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에서 404년) 시기에 스파르타와 대립하던 델로스 동맹의 맹주이기도 했던 아테네는, 기원전 430년부터 수년 간에 결쳐 도시를 강타한 대역병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을 잃고 유능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Pericles, 기원전 495년경 ~ 429년)까지 사망하며 결국 폴리스의 힘 자체가 약화되고 말았습니다.
페리클레스의 흉상.
이 역병에 대한 설명은 당시를 살았던 역사가이자, 본인도 그 병에 걸렸다 회복했다고 하는 투키디데스(Thucydides, 기원전 460년?~기원전 400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사람이고, 의사도 아니었기에 그의 기술에는 한계점이 있지만(각주 5), 환자들에게 고열, 고름이 동반되는 피부 발진, 설사 등의 증상이 있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과 고대인들의 사체에서 얻은 병원균의 DNA 분석 결과 등을 토대로, 현재는 이 때 아테네에 발생한 전염병이 티푸스(Typhus), 천연두(Smallpox), 혹은 아르보바이러스(Arbovirus) 감염증 등이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각주 6). 사실 이 질환들의 경우는 현대에는 적절한 격리를 통한 감염 관리, 항생제 치료, 대증 치료 등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이 되는 질환들이죠.
병의 증상만 보면 차이점도 있지만(아테네 역병에만 있는 설사, 피부 병변 등에 대한 묘사) 아테네를 강타한 대역병의 상황은 여러모로 오비디우스가 묘사했던, 참혹하기 그지없는 아이기나 유행병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아테네를 덮친 질병이 에티오피아와 이집트를 거쳐 퍼진 것으로 생각된다는 기록이, 남쪽에서부터 온 바람에 의해 병이 퍼진 것 같다는 아이기나 섬의 전염병의 시작 부분의 묘사와 흡사하고, 전멸까진 아니지만 도시 인구의 1/4~1/3이 사망(추정 사망자가 75,000명에서 100,000명)하여 화장하는 연기가 자욱했다는 아테네의 모습 역시 아이기나 섬의 상황과 흡사합니다.
아테네에도 새와 동물들이 환자들의 시체를 뜯어먹은 후 그들도 죽었다거나 다른 동물의 사체를주로 먹는 맹금류가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기에 이 당시의 질병이 인수공통감염 가능성이 높고, 아이기나 섬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죽어가던 상황과 닮아 있습니다.
또한 아테네에서도 환자 치료에 적극적이던 의사들이 더 빨리 감염되어 숨졌고, 환자를 많이 접할 수밖에 없던 의사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는 기록이 있어, 아이기나 섬의 의사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얇은 린넨 옷조차 견디지 못해 다 벗어버린 채 여기저기를 헤매어 다니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테네 역병 환자들에 대한 묘사 역시 아이기나 섬의 환자들이 보였던 증상과 상당히 비슷하게 보입니다.
아테네의 대역병 상황을 묘사한 그림. Michiel Sweerts’ Plague in an Ancient City (circa 1652). Wikimedia
오비디우스가 자신의 작품에 투키디데스의 역사서를 참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아니기에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위와 같은 다양한 공통점을 관찰할 수 있으며, 투키디데스의 기록이 오비디우스의 작품보다 수백년 앞서는 점, 그리고 오비디우스가 젊은 시절 아테네에 유학한 경험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아테네 대역병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아이기나 섬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란 추측을 해보게 됩니다(위치 상으로도 아테네와 가까운 아이기나 섬을 보며 상상력을 발휘?).
사실 상, 변신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아이기나 섬의 전염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긴 어렵습니다. 이 신화적인 이야기를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완벽한 질병 묘사가 들어간 텍스트라고 보기도 어렵고요. 그러나 고대의 작품 속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전염병에 의한 공포와 고통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고, 이 질병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료진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에도 이 이야기를 읽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 훗날 또 다른 창작자가 우리 시대의 범유행병(Pandemic)인 COVID-19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해보면서, 미래에는 이러한 감염병들을 획기적으로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들이 개발되어 우리 시대의 범유행이 그저 전설로 치부될 행복한 시대가 오기를 바라봅니다.
<<각주>> 1. 개미의 특성을 고려해서인지, 현대에는 뮈르미돈이 “강력한 사람의 추종자 또는 부하, 맹목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전설에 따라서는 에우로파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중의 한 명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3. Ovid, Bk VII(변신이야기 7권):501-613 Aeacus tells of the plague at Aegina 4. Piotr K Krajewski, Jacek C Szepietowski, Joanna Maj. Cutaneous hyperesthesia: A novel manifestation of COVID-19. Brain Behav Immun. 2020 Jul;87:188. -> 실제로 COVID-19와 같은 바이러스성 질환 감염 환자에게서 이러한 피부감각과민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보고된 바가 있습니다. 5. Dumortier J. Le Vocabulaire Medical d’Eschyle et les & Eacute; crits Hippocratiques. Paris, France: Les Belles Letters; 1975. -> 이 시대에는 의학 용어라는 것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6. Robert J. Littman, The Plague of Athens: Epidemiology and Paleopathology. MOUNT SINAI JOURNAL OF MEDICINE 76:456–467, 2009 456 7. https://www.google.com/amp/s/theconversation.com/amp/thucydides-and-the-plague-of-athens-what-it-can-teach-us-now-133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