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학번의 연애생활
낀 세대라는 말은 선배 세대에 대한 도리와 책임감은 이미 다 했음에 반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때가 왔어도 후배 세대로부터의 대접은 받지 못한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부모님을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으로부터 부양을 받지 못하는 첫 세대가 낀 세대의 대표사례다. 그렇다면 X세대는 낀 세대일까? 현재 50세 안팎에서 중간 값을 이루는 그들의 생물학적 나이와 이에 걸맞은 대한민국 사회구조 속 그들의 지위나 역할을 본다면 그럴 수 도 있을 듯하다. 앞서 얘기한 부모님 부양에 대한 부분도 현재가 인구구조 전환의 시기인 만큼 그렇게 볼 수 도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 나이또래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임이 가장 많아지는 시기기도 하고 이는 X세대뿐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인류적 현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부 낀 세대 적인 색깔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X세대는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세대다. 주요 변화의 변곡점에서 가장 앞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X세대도 문화적으로 낀 세대의 전형을 보여주는 분야가 하나 있는데 그건 말하기는 남사스럽지만 10대 학창 시절 남녀 간의 애정문제였다.
아무리 교복자율화, 두발자율화, 남녀공학의 시대를 보냈더라도 청소년기 남녀 간 이성교제는 1980년대까지는 사회적으로 금기 시 하는 분위기였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의 문화는 사라졌지만 일단 학생은 공부 잘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고 그러다 보니 그런 시기에 이성교제를 한다는 것은 날라리로서의 커밍아웃임은 물론 불효자, 비행청소년의 상징이기도 했다. 80년대 초반 티나터너형 빗자루머리로 인기를 끌었던 가수 윤시내가 갑자기 전향하여 1983년 ‘공부합시다’란 노래로 가요톱텐 1위를 한 적이 있었다. 가사가 지금 보면 가히 청소년보호법에 저촉될 만하다.
‘턱 고이고 앉아 무얼 생각하고 있니, 빨간 옷에 청바지 입고 산에 갈 생각 하니? 눈 깜빡이고 앉아 무얼 생각하고 있니, 하얀 신발 챙모자 쓰고 바다 갈 생각 하니? 안돼 안돼 그러면 안돼 안돼 그러면, 낼모레면 시험기간이야 그러면 안돼, 선생님의 화난 얼굴이 무섭지도 않니? 네 눈앞에 노트가 있잖니 열심히 공부하세!’
당시엔 음반발매 시 의무였던 건전가요 트랙에 싣기에도 민망한 이런 가사의 노래가 가요톱텐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니 그건 그 가사의 레토릭을 80년대 중고생들은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 수 없다. 바다야 멀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빨간 옷에 청바지 입고 근교 산에 가는 행위가 그렇게 탈선행동인 것이며, 그것이 적발되었을 때 그 행위의 잘잘못 여부를 떠나 일단 선생님이 화부터 낸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관점에선 말도 안 되는 인권유린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회분위기를 연애분야의 낀 세대인 X세대는 10대 시절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3학년 동안 한 반에 여자친구가 있다는 친구가 정말 한 두 명 있을까 말까였다. 내가 글의 도입부에서 얘기한 독서실의 고2 그녀도 일방적 짝사랑이지 사귄 것은 전혀 아니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최소 90년대까지의 한국교육은 10대 중고등학교시절까지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심하게 속박하고 대학생이 된 다음엔 방임에 가까울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는, 한마디로 개인자유에 대한 완급조절이 되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자연발생적인 호르몬을 억누르며 10대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생이 된 88꿈나무들은 대학생이 되어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이성과의 만남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1학년의 미팅은 소개팅보다는 단체미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지 매일 풀만 먹던 놈이 갑자기 고기를 먹으면 배탈이 나는 것처럼 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소개팅을 소화시킬 수 있는 인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단체미팅의 경우 스케일도 커서 공대 무슨과와 여대 무슨 과의 인원이 거의 다 투입되는 블록버스터급 ‘과팅’이 오히려 많이 성사되었다. 소개팅의 경우 007팅 같은 특수목적팅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고는 들었으나, 글쎄 그 범용성의 한계로 주위에서 하는 친구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특별했던 것이라면 88학번이 마지막이 된 문무대팅 정도가 아닐까 한다. 군복무 시 45일 혜택을 주는 문무대 입소 때엔 여자들 편지 받는 것이 낙이라며 -고작 1주일 동안 입소하면서도- 문무대 입소 전에 과팅 위주의 미팅을 하곤 했었다.
정규미팅은 아니지만 만남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고팅’도 꽤 인기를 끌었다. 어원이 ‘고고팅’ 즉 디스코텍의 모태인 고고장에서 비롯된 것을 보면 역사적 정통성이 담보되는 미팅의 형태였다. 요즘은 이 문화마저도 거의 없어진 것 같은데 ‘일일호프’, ‘일일찻집’ 같은 개념이었다. 디스코텍의 영업개시 시간이 빨라야 오후 5 시인점을 감안하여, 주말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학과나 서클(동아리)에서 업주와 계약하고 각자의 인맥을 동원하여 입장티켓을 파는 공유경제나 타임셰어 같은 수익모델이었다. 꼭 돈을 벌기 위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서클구성원의 물, 인맥에 따라 꽤 짭짤한 수익을 거두는 곳도 있었다. 디스코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강남역의 월팝, 브이존, 보스터치, 그리고 이태원의 비바체가 가장 인기 있는 베뉴였다. 신촌로타리의 콜로세움이나 우산속에서도 진행되긴 했으나 신촌의 디스코텍은 테이블 주문이 아닌 음료권이 주 비즈니스모델이다 보니 고팅과의 변별력이 떨어져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남학생의 애정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여자가 1학년이면 금값이고 남자가 1학년이면 똥값이다. 신입생 남자들이 만날 수 있는 여자는 같은 신입생이거나 끽해야 재수생, 날라리 고3 등에 국한되지만, 신입생 여자들은 동급생 남자들은 당연하고 3, 4학년 복학생 오빠들의 전폭적인 귀여움을 받으며 상한가에 거래된다. 연애경험이 없을수록 가오를 더 중시하는 문화는 시대를 관통한다. 1학년 남학생들은 고액 과외알바를 하지 않는 이상 용돈은 궁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당시 더치페이는 완전히 사귀기 전 까지는 어려운 일이라 경제사정에 따른 연애 난이도도 분명 존재했다. 특히 짝사랑하고 있던 서클 인기녀 여학생이 잘 나가는 복학생 오빠들의 빨간 르망이나 흰색 엑셀 자가용을 얻어 타는 모습을 목도하는 신입생 남자들의 가슴은 찢어졌었다.
1988년 서울의 카페 메뉴들 중에선 파르페가 제일 비싼 메뉴였는데 꼭 미팅 나가면 제일 못생긴 애들이 파르페를 시키고 이쁜 애들은 그냥 커피 마신다는 속설이 남학생들에게 있었다. 또 소개팅 나가면 소개팅 주선자 애들 중 파르페 먹으면서 안 가고 죽 때리고 있는 진상들이 있어 이 역시 많은 남학생들의 원성을 사곤 했었다. 미팅이 잘 되어 마음에 드는 이성이 생기면 학보를 보냈다. 여학생들의 경우 어느 대학에서 온 학보인지가 친구들에게 '으쓱' 하는 포인트이다 보니 소위 명문대 학보를 받는 것은 상대남자가 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귀엽게 봐줄 만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애 숙맥에 비주얼 꽝이지만 명문대에 다니는 남학생들의 경우 자신의 유일한 강점을 최대한 어필하기 위해 스팸메일 보내듯 학보를 보내기도 했었다. 카톡은 당연하고 삐삐도 없는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공강시간에 과사무실 가서 학보를 기다리는 아날로그적 낭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