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무리 6 공화국 시작과 대학생활을 같이 한 88학번이지만 당시엔 엄혹한 군사정권의 잔재가 남아있었고 학생문화도 운동권 문화가 주류였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런 시기에도 세칭 ‘날라리’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있었다. 현재 시점에서 날라리란 단어를 검색해 보면 ‘일을 대충대충 하는 사람’ ‘불량학생’ 같은 정의로 되어 있으며 심지어 요즘은 고어처럼 인식되어 잘 쓰이지 않는 단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나는 솔로’의 여성출연자 중 한 명이 한 남성 출연자가 ‘날티’ 나서 좋았다는 표현을 쓴 것을 봤다. 날티가 ‘날라리티’의 축약임을 감안해 보면 그녀는 날티를 남성의 비주얼을 평가할 때 긍정적인 의미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보던 난 대학생활이 30여 년이 지난 현재에 날라리란 용어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용처에 사용되고 있음에 반가움을 느꼈다.
순전히 개인적인 정의지만 88학번과 X세대 시절 날라리의 의미는 ‘공부나 학생운동보다는 놀거나 멋 부리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규분포 곡선으로 보자면 오른쪽 끝엔 오렌지, 양아치가 있고 왼쪽 끝엔 주사파 운동권이 있으며 정규분포곡선 평균값에 수렴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이들이 날라리였다고 할 수 있다. – 물론 이 중간지점에는 날라리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모범적인 학생들도 있었다. 숫자는 그들이 더 많았을 테지만 글의 주제가 그렇기에 중간지점의 날라리 학생들만 얘기하도록 하겠다 - 훗날 정규분포도의 양 극단에 있던 아웃라이어들은 한쪽은 국회의원 등 정치인으로 다른 한쪽은 엔터테인먼트업계 거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중간에 위치한 대부분의 날라리들은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빠, 엄마가 되고 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날라리들의 대학생 시절, 그렇지 않았던 친구들이나 주위 어른들로부터 ‘너 커서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냐?’란 얘기를 종종 듣곤 했다. 그럴 때면 솔직히 그들도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될 때가 많았다. 불안하지 않은 청춘이 어디 있으랴? 어른들이 보기엔 멋 부리고 놀기만 하는 대학생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겠으나 그들도 미래에 대한 고민은 똑같이 있었으며 실패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한 지 36년이 지난 지금, 나를 포함한 당시의 날라리 친구들은 대학졸업 이후 지금까지 사회에 폐 끼치지 않고 한 명의 시민으로 제 몫을 하며 열심히 살아왔노라고 자부한다. 그러니 이젠 당시의 우리 기쁜 젊은 날들을 회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훈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주홍글씨도 아닌 그 시절 날라리 생활들을.
이제는 검색에도 잘 안 나오는 그 당시의 브랜드, 업소들을 기억함으로 인해 누군가에겐 ‘그땐 그랬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 기억력 감퇴가 노화의 시발점인지라 50대 중반을 지나는 지금이 골든타임의 막바지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현재의 MZ세대들에게도 얘기해 주고 싶다. 한없이 꼰대 같은 50대 부장님 팀장님들도 여러분들과 같은 젊은 시절이 있었으며 더구나 그 당시 문화가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또 그 부장님들도 사원, 대리 시절, ‘요즘 애들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고 싸가지도 너무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음을.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알아 가서 X와 MZ 이 두 세대가, 세대갈등의 주축이 아니라 어쩌면 최고의 궁합이 될 수도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88년 당시 날라리들은 몇 가지 그룹으로 카테고리화할 수 있었다.
강남 8 학군 출신의 학연 및 지연파
초, 중, 고 및 동네 독서실까지의 학연 및 지연을 바탕으로 숫적으로 가장 우위를 점했다. 유흥활동지역이 자신들의 주거지에서 가까운 만큼 “우리 동네”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과학고등학교는 생기기 전이고 외국어 고등학교 두 곳은 80년대 존재했으나 지금 같은 특목고의 위상은 아니어서 80년대 8 학군 중학교 출신 중 일반고가 아닌 외고를 택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 진학 시 특목고를 우선 지원하고(혹은 조기 유학) 특목고 진학에 실패한 학생들이 8 학군 일반고에 진학하는 지금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8 학군 절대 우위의 시절이 80년대였다. 숙명여고, 진선여고와 같은 8 학군 소속인 정신여고와 영동여고는 학교 위치가 삼성교 지나서 행정구역상 강동구(88년도부터 송파구로 변경)에 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도 같은 중학교 출신 남학생들에게 차별 아닌 차별을 받아 분노하기도 했다. 88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남구, 서초구로 나뉘기 전인 강남구 8 학군이야 말로 가장 순수혈통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졸업한 지 4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8 학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호남향우회나 해병대 전우회 못지않은 결속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성북동, 평창동, 동부이촌동 등 이른바 부촌파
동네가 동네니 만큼 ‘누구누구 아들, 딸’ ‘어느 그룹 자식들’이 많았다. 대중교통의 불편함을 자가운전으로 커버하며 오히려 12번 좌석버스 타고 다니는 8 학군 아이들을 우습게 봤다. 훗날 좋은 학교 나오고 대기업에 입사한 8 학군 아이들은 이 부촌파 동년배들을 오너로 모시며 충성을 맹세하기도 한다.
여의도파
8 학군과는 같은 시대 개발된 신흥 아파트 단지이나, 숫적인 열세와 지역적 한계로 인하여 메이저로서의 위치는 점하지 못하고 날라리계의 6두품으로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여의도중, 고 동문이라는 끈끈함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자부심은 대단했으며 90년대 신흥 명문고인 외국어 고등학교가 부상하기 이전인 80년대 그와 유사한 위상을 보여줬다.
지방유지파
가끔씩 걸출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이병철 회장의 메기론의 메기역할을 날라리계에서 담당했으며 숫적 우위만 믿고 까부는 8 학군 아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때도 있었다. 특히 강남 아파트나 마포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나 홀로 집에’ 족들은 당시엔 보기 드문 개인아지트 보유로 인해 진정한 선수의 길을 걷기도 했다.
정원외파
어릴 때 부모님 따라 외국에서 살다가 고등학생 때 귀국하여 정원 외로 주로 SKY 및 E여대 들어간 아이들을 말한다. 학교에서나 특히 유흥가에서 자기들끼리 대화 시 영어를 사용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점심시간마다 연세대학교 천막식당 한편에 진을 치다고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원어민 수준의 영어회화를 청취할 수도 있었다. 훗날 아리랑 TV 개국과 함께 이들의 재능이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예체능파(여학생에 국한)
서울 소재 두 곳의 유명 예고 출신은 물론 종합대학의 웬만한 예체능학과 여학생들이 포함된다. 예체능의 특성상 이들은 외모의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져 있음은 물론 부모님들도 중산층 이상의 재력으로 이들의 날라리 활동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인기 있는 서클 들에서 이들은 연애 생태계교란종 및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를 점하곤 해 다른 참한 여학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졸업 후 예지원 같은 신부수업 사관학교의 주 고객이 되었고 결혼시장에 조기 진출하여 공부만 하던 순진한 남학생들과의 결혼으로 퐁퐁남 시조새들을 양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