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음악
지금도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완성도와 장르의 다양성을 최고로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승훈과 서태지로 시작해서 김건모, 박진영으로 90년대 중반의 정점을 찍은 후, H.O.T,젝스키스, 핑클,SES 등 1세대 아이돌 시대를 거쳐 조성모로 마무리된 90년대의 한국대중음악사. 그 같은 골든제네레이션이 가능 했던 원동력은 198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20대가 되어 대중음악 창작의 세계로 본격 진입했기 때문이었다.
1981년 미국에선 MTV가 최초로 전파를 타기 시작했고 한국에선 조용필이 가왕의 자리에 등극했다. 그리고 1983년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로 전 세계를 강타했다. 1980년대 초반 한국 및 미국에서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들은 그 이후 진행되는 음악업계의 패러다임을 한 번씩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된다. MTV가 전파를 탄 바로 그 해 올리비아 뉴튼존의 Physical이 빌보드 10주 연속 1위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올리비아 누님의 섹시한 에어로빅 장면을 기대했던 한국 남학생들에게 40대 배불뚝이 미국아저씨들의 헐벗은 몸만 보게 되는 배신감을 주긴 했으나, 어쨌든 Physical 뮤비는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며 2년 전 버글스가 Video Killed the radio star로 예언한 것처럼 MTV라는 플랫폼을 매개로 보는 음악의 시대를 본격 열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 마이클잭슨은 Billie Jean의 문워크 댄싱과 Thriller의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로 보는 음악을 통한 슈퍼스타의 OSMU(One source multi use) 모델을 전 세계에 제시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MTV에서 유튜브로 플랫폼이 진화하고 슈퍼스타에서 기획형 아이돌로 아티스트 모델이 바뀌었으나 1980년대 초 음악계에 나타난 이 같은 지평의 변화는 그 코어의 변동 없이 현재까지 유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초 이상하게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있던 Wanted의 둘리스와 Hello Mr. Monkey의 아라베스크, Sexy Music의 놀란스를 KBS 100분 쇼를 통해 보며 어리둥절했던 88꿈나무들은 드디어 그들의 중학생 시절 등장한 마이클잭슨을 통해 전 세계 팝의 주류와 싱크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용필이 오빠가 80년을 평정하는 바람에 가요를 듣는 재미는 좀 덜했으나 대신 군웅할거 하는 해외 뮤지션의 음악을 듣는 것은 80년대 청소년기의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남학생들은 빌보드차트를 40위까진 기본적으로 외우며 한국에 발매되지 않은 빽판을 사기 위해 세운상가를 기웃거렸으며, 여학생들은 이홍렬과 이성미가 진행하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 토요일 특집으로 종종 했던 듀란듀란 대 컬쳐클럽의 대결을 들으며 죤 테일러와 보이조지의 매력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다.
조용필 외엔 대안이 없어 팝송에 절대 열세를 보이던 국내가요 때문에 80년대 청소년들은 영일레븐, 젊음의 행진, 가요톱텐, 쇼2000 같은 쇼프로그램을 통해 가요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피 끓는 10대 남학생들은 메탈리카, 본조비 같은 헤비메탈과 락에도 관심을 주고 있었고 이는 80년 중반 이후 시나위, 부활, 백두산 같은 한국형 헤비메탈 밴드의 탄생으로도 이어졌다. 그러던 가요가 다시 주류의 반열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1986년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발표되면서부터였다. “삐리삐리”하는 파랑새 외엔 별다른 히트곡이 없다고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서 이종환에게 늘 쫑코를 먹던 이문세가, 이영훈이라는 걸출한 작곡가를 만나 발라드란 장르를 앞세워 한국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꿔버린 것이다. 88학번이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5년 별밤지기를 시작한 이문세는 ‘밤의 문교부 장관’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청소년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혹자는 이 같은 별밤지기의 후광이 이문세 노래 인기의 비결이라고도 했지만 사실 이영훈이 작곡한 노래들은 한 편의 작품으로도 훌륭한 것이었다. 이영훈은 클래식을 방불케 하는 음악적 세련됨은 물론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듯 한 서정적인 가사까지 선보이며 한국가요를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요즘이야 J Pop이라 불리는 일본노래들이 국내 케이블 티브이 방송에서 일본어 원곡으로도 불리는 시대가 되었지만 1980년대는 방송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 일본음악을 듣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시대였다. 하지만 어둠의 루트로 극소수만 몰래 듣던 마이너 현상이라고 하기엔 80년대 J pop이 이후 한국가요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지금은 유튜브 과거 자료를 통해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신예 작곡가들은 일본음악을 은연중에, 때로는 과감하게 대놓고 베꼈다. 그것은 지금의 잣대로 보면 표절에 다름없는 행위였다. 당시 일본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80년대 일본음악은 동시대 한국가요에 비해 수준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이들은 소수였고 심지어 불법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 시기도 아니었고 유튜브 같은 글로벌 플랫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부만 아는 일본노래를 살짝 튜닝하여 대중에게 발표하고 싶은 마음이 젊은 작곡가들에겐 -하지 말아야 할 일이긴 하나 -피하기 어려운 유혹일 수도 있었을 듯하다.
최근 인기 있는 MBN 한일탑텐쇼의 일본커버곡 중 80년대 초반에 발표된 ‘긴기라기니 사리게나쿠’가 유튜브 조회 600만 뷰를 넘은 건 당시 이 노래가 한국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롤라장에서 시작하여 테이프로 녹음되며 급속히 확산한 이 노래는, 반일감정이라는 반감을 넘어 매국노, 친일파 정도의 사회적 낙인이 존재했던 80년대 초반 한국에서 일본가사 원곡 그대로 인기를 끈 특출 난 곡이었다. 아웃라이어 같았던 긴기라기니의 성공 이후 일본음악은 음악업계 또는 디스코텍 등을 통해 야금야금 확산되기 시작했다. 안전지대, 사잔 올스타즈, 체커스, 튜브 같은 밴드 뮤직은 물론 푸른산호초의 성자누나 마츠다 세이코와 그녀의 라이벌 명채누나인 나카모리 아키나 같은 여성 뮤지션, 라우드니스, X재팬 같은 락밴드, 그리고 소년대, 소녀대, 히카루겐지로 대표되는 아이돌까지, 그 다양한 장르의 세련된 음악들은 비록 어둠의 경로지만 점차 마니아층을 형성하기 충분했다. MTV, 마이클잭슨, 조용필, 이문세에 J pop까지, 이런 음악들을 10대의 감수성으로 빨아들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80년대의 일부 청소년들 중 훗날 음악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들은 그 포텐을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터트릴 수 있었다.
2024년 현재, 한국 아이돌로 데뷔하는 것이 꿈이라는 일본 청소년들이 한국 음악기획사 연습생으로 줄을 서고, 일본어로 개사하지 않고 한국어로 부르는 노래가 일본 오리콘 차트를 점령하고 있으며, 도쿄돔을 연일 매진시키는 한국 아이돌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격세지감에 놀랄 때가 많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있는 백범 김구의 나의 소원에서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를 가지는 것이 백범의 가장 큰 소원이라는 대목이 기억난다. 1980년대 청소년들은 소니 워크맨을 끼고 J pop을 듣고 있기도 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삼성 티브이나 갤럭시폰을 통해 BTS와 뉴진스에 열광하는 일본팬들을 볼 수 있으며, 그렇다면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의 꿈이 이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문화의 힘을 가능하게 한 것은 80년대의 엄청난 변화물결을 체내에 그대로 흡수한 X세대의 역할도 일정 부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