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장인 커리어로서 가장 열심히 일할 나이인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까지 국내 대기업 계열사 중 하나인 엔터테인먼트/미디어 회사를 다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기가 스마트폰이 나오고 SNS가 본격화 되고 무엇보다 싸이 강남스타일의 등장으로 K컬쳐가 본격적으로 전세계에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때였다. 이미 그 회사를 떠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OB모임은 활성화되어 과거의 동료들과 자주 모임을 가진다. OB 멤버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근황토크를 하게 마련인데 아무래도 엔터테인먼트 출신들이 많은 만큼 사내불륜의 최신사례들과 동료들의 이혼유무 등 남녀상열지사 업데이트를 먼저 한다. 그리고 나서 과거 동료들의 최근 직장현황을 들어보는데 들을 때 마다 재미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2010년 이후 나랑 비슷한 연차의 동료들이 회사의 본부장이나 임원들로 승진하기 시작하는데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비록 회사는 다른 곳으로 이직했더라도 아직 그 분야 정점의 위치에 있는 동료들이 많다는 것이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젊고 글로벌화된 인력의 공급이 상당히 많은 분야다 보니 세대교체가 빈번히 일어나는 산업이지만 특이하게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생인 그들은 이미 10여년 이상 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내 OB 동료들이 일하는 엔터테인먼트/미디어 분야의 경영진 뿐 아니라 실제 아티스트 세계로 시야를 옮긴다면 그 독주경향은 더 심하다. 나중에 별도로 다루겠지만 예능,음악,드라마,영화 등 전방위 분야에서 거의 20년 이상 장기집권 하고 있는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의 X세대는 향후 그들이 환갑의 나이인 60이 되더라도 그 정점에서 물러날 기세가 보이질 않을 정도로 왕성한 활약 중에 있다.
이 분야에서 롱런이 즐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간의 정체성과 감수성이 형성되는 10대 시절, 그들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운 좋은 조기교육은 그들이 본격적인 직업인으로 사회에 진출했을 때인 199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시장의 퍼스트무버로 자리 잡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천재들의 시대라고 불리는 르네상스 시대는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같은 인류 역사상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탄생시켰다. 천재들이 특정시기에 몰려서 탄생하는 건 생물학적 우연일 수도 있으나 후세 학자들은 그 원인을 금융으로 부를 쌓은 메디치 가문이 이 시기에 젊은 예술가들에게 전적인 후원을 했다는 걸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인간은 먹고 살 걱정이 없어져야 비로소 예술이나 철학 같은 비생산적이지만 창조의 영역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15세기 등장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지식의 전파속도를 급속도로 높였다. 암흑의 시대인 중세 막바지에 나타난 금속활자는 지금으로 보자면 20세기말 인터넷의 등장과도 맞먹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정보화 시대를 가져온 것이다. 재정적인 안정에 서적보급 확대라는 환경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등장한 이들은 르네상스 천재예술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고 현재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명성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1980년대를 청소년기로 보낸 이들의 상황이 르네상스 예술가의 상황과 유사하다면 이는 지나친 비약일까? 보릿고개를 넘어 새마을운동 시대를 관통하며 반 만년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배곯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낸 1960년대 말~1970년대 초반 세대는 그들의 청소년기에 폭발하기 시작하는 대중문화를 마치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에 대한민국 대중문화계에 일어났던 몇 가지 사건들을 열거해 보자. 정치적으론 5공 신군부의 3S(Sports, Screen, Sex) 정책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 전세계에서 비롯된 문화적 변혁의 시기에 정부의 정책이 소 뒷걸음 치듯 맞아 떨어져 대한민국 대중문화계 역시 엄청난 변화를 맞게 된다. 1981년에 북한보다 몇 년 늦었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컬러TV 방영을 시작했고 이는 곧 가정용 VHS 비디오 보급으로도 연결된다. 기존의 흑백 티비는 동영상의 ‘스토리 텔링과 정보’만을 전달하는 측면이 강했다면 컬러티비는 비로소 ‘영상미’ ‘미장센’ 같은 시각적인 감성 전달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비디오 보급 역시 영상시청 방식을 이전까지 방송사 송출에만 의지한 수동적인 방식에서 처음으로 on demand 방식으로 바꾼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요즘은 유튜브나 OTT 덕분에 클릭 한 번으로 전세계 영상을 다 볼 수 있는 시대지만 비디오가 처음 보급된 시기엔 내가 원하는 영화를 내가 원하는 시간에 비디오가게에서 빌려서 볼 수 있다는 자체로만으로도 엄청난 변화였다. 여기에 가요톱텐이나 AFKN의 Soul Train 같은 음악프로그램을 녹화할 수도 있고 책받침 스타 이상아의 오뚜기 마요네즈 CF를 녹화해서 같은 반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기까지 했다.
1982년에 프로야구가 개막했고 1983년에 프로축구가 개막했다. 2024년 역대 최소경기 800만 관중을 돌파한 프로야구의 열풍은 88학번이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할 시점에 시작되었다. 1970년대 고교야구도 확실한 지역연고를 바탕으로 했기에 그 인기도가 지금의 프로야구에 못지 않았으나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고교야구는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로 이어지는 일년에 네 번의 시즈널한 체제로 운영된 반면, 프로야구는 3월말에 개막하여 10월말 코리안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일주일에 몇 번 휴식을 제외한 거의 매일 경기가 진행되는 형태였다. 그러다 보니 출근길 지하철 역 매점의 스포츠신문 톱기사들은 그 전날 게임결과로 도배가 되었고 이는 프로야구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상으로 들어오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각 대회 별 1년에 4번의 우승팀이 결정되는 고교야구와는 달리 1년 전체 리그 경기를 통해 그 해 단 한 팀의 우승팀을 결정하는 코리안시리즈도 프로야구인기의 큰 몫을 담당했다. 창단팀으로 등장하여 3년간의 리그기간 동안 타팀들의 승점자판기 및 각종 기록들의 희생양이 되었던 삼미슈퍼스타즈와 그 뒤를 이어 허구연 감독의 강렬한 기억만 남기고 전설의 섬 이어도처럼 잠시 프로야구 역사에 등장했다 사라진 청보핀토스도 80년대 프로야구 팬들이 기억하는 추억들이다. 1980년대를 관통하며 90년대 까지 이어진 삼성 라이온즈의 불운과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IMF 이전까지 한국프로야구를 호령했던 해태 타이거즈도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 인기에 한 몫 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80년대 대중문화 변혁의 가장 큰 동력은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인 변화의 물결에 휩싸였던 음악분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