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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쿠로스 Aug 16. 2024

두발 자유화도 한 몫 하다

두발 자유화도 한 몫 하다


교복자율화 말고 두발자유화가 주는 임팩트도 꽤 컸다. 교복은 청소년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국민학교때는 어느정도 교복입은 모습이 기대 되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발의 경우는 달랐다. 남학생은 머리를 빡빡 밀어야 하고 여학생의 경우 귀밑 단발로 획일화 하는 것은 졸업을 앞 둔 국민학생들로는 싫은 감정을 넘어 두렵기까지 한 일이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고 얼굴의 완성은 헤어란 말이 있듯이 헤어스타일이 주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다. 아무리 나이키와 조다쉬로 청소년 패션의 완성이 이루어지더라도 빡빡머리로는 한계가 존재했다. 


1993년 군대를 제대한 난 미국에 어학연수를 갔었는데 거기서 만난 일본친구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 1993년은 일본이 프로축구리그인 J리그를 출범시켜 화제를 몰고 온 해였다. 야구가 국기인 만큼 프로야구의 실력이나 인기가 넘사벽이었던 일본이 드디어 축구에까지 관심을 높여 프로축구가 출범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 프로축구의 인기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높고 일부 선수는 팬덤까지 불러오고 있어 한국에 까지 화제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같은 일본 J리그 인기에 대해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일본친구가 독특한 분석을 내놨다. 그에 의하면 일본 프로축구의 인기는 선수들의 헤어스타일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로야구는 선수들이 늘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에 헤어스타일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얼굴 조차도 명확히 보이지 않는데 축구는 선수들의 얼굴이 정확히 보이는데다 파마,염색,장발 등 다양한 개성의 헤어스타일까지 돋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평소 축구에 관심 없던 여자 팬들까지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보다 몇 년 이른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시기 아시아의 삼손 김주성 선수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헤어스타일로 인기를 끈 것을 보면 난 그 일본친구의 주장이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발자유화가 되다 보니 머리에 무스, 젤, 스프레이 같은 헤어제품을 일찍 접할 수 있기도 했다. 물론 교칙으로 제품사용은 금지되어 있어서 주로 날라리 고등학생들이 주말에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제품의 용처에 익숙했기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자주 이용했던 것 같다. 당시 남자들의 일상에서 헤어제품이란 40대 이상이 되어서야 올백스타일을 하는 사람들만이 ‘포마드’를 이용할 정도로 굉장한 레어템이었는데, 두발자유화 이후 무스나 젤 같은 제품이 젊은 층에서도 익숙해 지며 그 저변이 넓어진 것이다. 머리는 길렀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도 생겼으나 사실 헤어의 스타일링은 10대 청소년이 자신의 손으로 깔끔하게 하긴 여간 어려운 기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1987년, 한국 남자 청소년들의 심장을 강타한 홍콩영화 영웅본색에서 장국영이 드디어 젊은남성들 헤어의 준거스타일을 제시했다. 당시 아무리 두발자유화가 되었어도 옆머리와 뒷머리는 바리깡으로 짧게 정리하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옆과 뒤를 짧게 치고도 앞머리의 풍성함을 제품의 도움을 받아 스타일링 할 수 있다는 것을 장국영이 보여준 것이다. 앞머리를 어느 방향으로 내리고 이마를 어느 정도 까느냐에 따라 스타일의 변주도 자유로워 획일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급속도로 발전한 80년대 대중문화계에서도 남자연예인의 헤어스타일만큼은 난공불락의 분야였다. 이용과 김범룡의 아줌마 뽀글 파마에 가까운 헤어스타일이나 가왕 조용필 마저도 그보다는 좀 세련된 핀컬파마에 만족해야 했다. 물론 이런 쟝르의 최고봉인 WBC 세계챔피언 장정구 빠마의 강렬한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시기에 나타난 장국영 머리는 80년대 후반의 세련된 남성 헤어스타일을 평정하기 충분했다. 비슷한 시기 에어울프 머리와 맥가이버 머리도 잠시 화제가 되긴 했으나 장국영 머리의 아성을 넘진 못했다. 에어울프 머리는 장국영 머리의 미제 버전 정도였고 맥가이버 머리는 차라리 조금 더 길러 테리우스 머리가 되는 편이 나았기에 두 헤어스타일 모두 니치마켓만 형성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88학번은 70년대 청바지 통기타 세대처럼 단순히 머리를 ‘기른다는 것’이 ‘멋낸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는 시기를 뛰어 넘어 진정 제품과 개인의 손기술에 의해서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첫 세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얼굴과 키와 같은 생물학적 요인 말고, 한 인간의 외모를 평가하는 또다른 관리의 영역인 패션과 헤어 두 가지 면에서 청소년기부터 관심을 가져온 88학번들은 그들이 중년에 들어가고 또 세월이 흘러 당시의 그들과 같은 10대 자녀를 두면서 기존 세대와는 또다른 소비와 지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그 당시 그렇게 누렸기에 또는 누리지 못했기에, 자식들에게는 남들이 다하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주고 싶지 않아 기꺼이 학부모로서 자발적인 등골 브레이커의 길을 걷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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