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펙트 체크'와 '사실'만으론 '탈진실의 정치'를 해독할 수 없다
2018년 3월 23일
존 킨(John Keane)
시드니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이 글은 ‘시드니 민주주의 네트워크(Sydney Democracy Network)’와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이 공동으로 펼치는 지구적 기획인 ‘민주주의의 미래(Democracy Futures)’가 편집한 ‘혁명 및 반혁명 시리즈’의 일부다. 이 기획을 통해 우리는 21세기 민주주의가 직면한 많은 도전들을 참신한 아이디어들로 마주하고자 한다.
또한, 이 글은 시드니 대학교의 전략 연구 기획인 “탈진실 기획(Post-Truth Initiative)” 시리즈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글은 더 컨버세이션에 실린 대부분의 글보다 훨씬 길기에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즐기시길 부탁드린다!
우리는 의사소통이 넘쳐나는(communicative abundance) 미완의 혁명기를 살고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지털 기기들과 정보의 흐름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가능케 하는 거의 모든 기관을 느리지만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빚어내고 있다.
저렴한 내장형 마이크로프로세서 덕분에,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알고리즘 내장형 장치들 및 정보 시스템들로 문자와 음향 및 영상들을 디지털 형식으로 간결하게 통합해 쉽게 저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재생과 휴대 또한 간편해졌다.
의사소통이 넘쳐나는 덕분에 지구적 네트워크 안의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편하고 저렴하게 실시간이든 아니면 나중에든 원하는 시간에 여러 사용자에게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민주주의와 타락한 미디어 (Democracy and Media Decadence)』라는 책에서 나는 이 혁명의 윤곽을 살펴봤다. 나는 그중에서도 새로운 정보 플랫폼과 왕성한 황색언론(muckraking), 그리고 국경을 넘나드는 대중들이 무슨 이유로 우리 시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회적, 정치적 트렌드가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넘쳐나는 의사소통이라는 미완의 혁명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모순들과 퇴폐적인 카운터 트랜드들(counter-trends)1에 의해 질질 끌려다닐 것이라고 나는 이 책을 통해 예측했다. 이러한 골칫거리 같은 트렌드들 중 하나는 세계가 “탈진실” 정치를 향해 표류하리라는 것이다.
정확히 탈진실(post-truth)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역설적이게도 탈진실은 우리 시대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이지만 가장 잘 정의되어 있지 않은 인터넷상 밈(meme)과 같은 용어 중 하나다. 영어권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옥스포드 영어 사전의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탈진실의 뜻풀이를 인용한다. 탈진실이란 "감정과 개인적 믿음에 호소하는" 미디어의 홍수를 이용해 "객관적인 사실"을 공개적 묻어버리는 것으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중국어과 스페인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hòu zhēnxiāng(后真相)과 posverdad에 대한 이야기가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독일어권에서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postfaktisch(post-factual 탈사실)란 용어는 탈진실과 거의 같은 의미를 포괄한다. 탈사실은 독일어학회(Gesellschaft für Deutsche Sprache(GfdS))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로, '사회·정치적 논의들'이 점점 '사실보다는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을 가리킨다.
여기에 덧붙여 독일어학회(GfdS)는 탈사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구의 훨씬 더 많은 계층들이 사실을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고, 심지어 명백한 거짓말을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진실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진실로 느껴지는 것'에 대한 표현이 '탈사실 시대'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너무 빨리 입소문이 난 용어는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 더 또렷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바로 이 용어로 인해 벌어진 지구적 현상으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탈진실"을 진실의 반대말이 아니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지만, 어떻게 정의하건 이보다는 더 복잡하다. 탈진실은 많은 것을 포괄하는 옴니버스 용어로 더 잘 설명되는데, 살마군디 (salmagundi)2처럼 서로 다르지만 상호 연결된 현상의 조합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커뮤니케이션 용어다.
공적 생활(public life)에서 탈진실이 가진 골치 아픈 위력은 탈진실의 하이브리드적 특성, 즉 사람들의 기대를 거슬러 이를 듣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식으로 서로 다른 요소들을 조합하는 데서 비롯된다.
탈진실은 재조합적 특성이 있다. 우선, 탈진실은 옛날식 거짓말을 포함하는 의사소통의 한 유형으로, 화자가 자신의 마음의 눈에 품고 있는 인상 및 확신과는 어울릴 수 없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쟁이들은 다음과 같은 연금술을 시도한다: 거짓말을 지어낼 때 거짓말쟁이들은 그 거짓말의 효과를 위해 그 자신들조차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일부러 말한다.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는 캘리포니아에 가뭄이 한 번도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자신의 취임식에 보슬비가 내렸음에도 날씨가 맑았다고 주장한다.
흔히들 헛소리로 취급하는 것들도 탈진실에서는 공적 담론의 형태로 다뤄진다. 진실성에 대한 우려를 없애버리고 이를 다른 것으로 바꿔버리는 의사소통으로 이뤄져 있다. 헛소리는 영양가 없는 언어적 배설물이며, 쓸데없는 대화다.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뻔뻔스럽게 믿고, 입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탈진실은 또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고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고안된, 그리고 공적 생활과 전통적 정치라는 배경음을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속한 익살과 이런저런 화려한 얘기들에 의존한다. 탈진실을 장식하고 있는 구성 요소들에는 농담과 과시(誇示), 말도 안 되는 순간들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마린 르펜Marine Le Pen이 유럽 연합을 "거대한 감옥"으로 묘사한 것처럼) 영리한 재담, 현학, 및 의도된 과장들이 포함된다.
탈진실의 의사소통에는 거친 말투들이 많다. 빌 클린턴(Bill Clinton), 펠리페 곤잘레스(Felipe González)3, 토니 블레어(Tony Blair) 등 역대 정치인들의 달콤한 말과 미소와는 눈에 띄게 대비된다. 탈진실의 언어에는 그로테스크함이 넘쳐난다. 헤이르트 빌더르스(Geert Wilders)4가 모스크를 "증오의 궁전"이라 불렀던 것처럼, 이들의 언어는 문제를 일으키는데 특화되어 있다.
충격적이게도 이들은 "진실"의 중요성에 대해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에게 진실은 일반적으로 자기 확신적인 발언을 의미하므로, 진실성은 불한당들을 끌어들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진실성엔 마치 개 호루라기와 같이, 같은 패거리를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있다. 허리케인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정신적 충격을 안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재민들로 가득 찬 휴스턴 아스트로돔(Huston Astrodome)에 갓 선출된 대통령이 들어와 "와줘서 고맙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이들의 언어적 취향은 솔직히 별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사소한 일을 골치 아프도록 따지거나 어떤 일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뉴욕 주재 이스라엘 총영사 다니 다얀(Dani Dayan)도 이런 일에 적임자지만, 얼버무리기의 천재는 확실히 헝가리 오르반(Orbán) 정부의 대변인인 졸탄 코바치스(Zoltán Kovács)다. 헝가리가 투옥한 난민들에 대한 잔인한 학대와 시민 자경단의 "순찰 사냥", 그리고 국경수비대의 작전에 대한 기자들의 법의학적 질문을 받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즐겨 말했다:
당신이 여기서 그려내고자 노력하는 바는 전혀 있지도 않은, 엄청난 단순화일 뿐이다. 다음 질문.
그리고 이게 전부였다.
침묵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탈진실의 성과는 탈진실이 만들어내는 침묵에 달려 있다. 이는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가 했던 말을 생각나게 한다:
… 무엇보다도 침묵 속에서 말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먼저 헤아리지 않고서는 언어라는 거대한 실재를 이해할 수 없다.
탈진실적 의사소통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채 말하지 않고 남겨진 것들에 기뻐한다. 그들의 허세와 엄포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만 고안된 것들이 아니다.
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를 원하지 않거나 (예를 들어 점증하는 부의 불평등, 민주주의의 군사화 및 인간이 아닌 다른 종들의 급속한 죽음), 잠재적으로 탈진실의 정치 스타일과 본질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가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침묵은 탈진실적 의사소통으로 빚어진 결과물 또는 "잔재"가 아니다. 텍스트와 징후들이 받쳐주는 단어를 사용하는 탈진실적 의사소통의 매 순간들은 말하지 않은 것, 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탈진실의 전사들은 탈진실적 의사소통의 성과를 위해 침묵을 각주처럼 사용한다: 탈진실적 의사소통에서 말로 뺏어진 것은 침묵이라는 깊은 물 위에 이는 거품과 파도와 같다.
바로 이런 이유로 "가짜 뉴스", "대안적 사실" 및 사라진 "증거"에 대한 "속보" 보도에 언론인과 논객들이 지금과 같이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대중을 현혹시킬 소지가 있다.
뉴스 속보에 대한 이들의 과도한 집착은 부지불식간에 이들을 탈진실의 푸들로 만들고, 속보 보다 덜 직접적이고 덜 분명한, 즉 간헐적 리듬을 통해 나타나는 “보다 느린” 사건들과 깊은 제도적 추세에 대해서는 침묵하도록 만든다.
거짓말, 헛소리, 익살과 침묵을 닥치는 대로 사용해 만든 총천연색 외투를 걸친 호전적인 정치의 일종으로 탈진실을 취급하는 것은 탈진실이 가진 보드빌적 특징을 잡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탈진실을 정치인, 언론인, 홍보 기관, 싱크 탱크 및 기타 참여자들이 이끄는 공개 공연으로 생각하면, 이는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보드빌 공연을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한 정치 버라이어티 쇼다.
구식 보드빌에는 차력사와 가수, 무용수와 드러머, 음유시인과 마술사, 곡예사와 운동선수, 코미디언과 서커스 동물들이 등장했다. 버라이어티 쇼였다. 탈진실도 이와 똑같은 쇼다. 기존의 공연 스타일과는 반대로, 이 공연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즐겁게 하려고 고안된 대중적인 볼거리다.
그러나 탈진실은 오락 또는 상품의 생산과 수동적 소비로 매개되는 "억지 짜 맞추기의 기술(art of contrivance)" 또는 "환영(幻影)을 통한 독재(dictatorship of illusion)"를 넘어선다.
탈진실의 계보는 부분적으로는 기업 광고와 시장 중심의 엔터테인먼트 세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철저하게 정치적인 특성을 보인다. 권력자의 손에서, 또는 권력의 사다리를 오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의 손에서 탈진실 현상은 정치적 조작의 새로운 무기로 기능한다.
탈진실은 단순히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그런다거나, 친구 편을 들기 위한, 또는 정치적 적을 상대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탈진실은 이보다 더 불길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과 찰스 보이어(Charles Boyer)가 주연을 맡은 조지 큐커(George Cukor) 감독의 수상작 “가스등(Gaslight)”에서 가져온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용어는 여기서 권력 의지를 위한 무기로 정의된다. 공인들은 조직적으로 국민 사이에 의심과 혼란의 씨앗을 뿌릴 목적으로 시민들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거짓말과 헛소리, 저속한 농담과 침묵을 퍼뜨리려 노력한다.
일반적으로 가스라이팅은 자기도취적이고 공격적인 인물들이 선호하는 전술이며, 이들은 심혈을 기울여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면 뭐든 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자기 의심을 이용해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망침과 동시에 이들의 판단 능력을 파괴해 사람들을 항구적으로 자신들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예를 들어) 가스라이터가 무언가를 말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이들이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을 꿈도 꾸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들의 목표는 점차로 시민들을 단순한 권력의 노리개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이들은 협잡꾼의 전술을 받아들인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른 채, 피해자들은 단념할 뿐만 아니라, 알게 뭐냐 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연스럽게 가스라이터의 마법에 걸려든다.
마닐라에서 약 575km 떨어진 섬 마을 공동체인 알부에라 시의 시장으로 선출된 롤란도 에스피노사(Rolando Espinosa)의 살인 사건(2016년 11월)에 의해 촉발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와 두테르테의 전 오른팔, 가스라이터인 에르네스토 아벨라(Ernesto Abella)의 이중 행동을 생각해 보자.
기자들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두테르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매우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살해당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겠다. 경찰은 에스피노사가 체포에 저항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경찰의 이야기를 믿겠다. 왜냐하면 (경찰은) 내 지휘 하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에스피노사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총에 맞았다.
두테르테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에 나는 살육자로 남을지도 모른다. 이는 여러분께 달려있다.
그런 다음:
나는 여러분께 보여줄게 없으니 사법적 절차에 기대지 않고 처형 한다. (왜 그러냐면) 나는 남들에게 뽐낼만한 어떤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이 발언의 의도된 의미들은 (온화하게 표현하면) 숨은 뜻이 있어 보였고, 너무 신비롭게 불투명해서 아벨라가 가진 능력을 뽐낼 수 있도록 하는 신호 역할을 했다: 두테르테가 결코 하지도 않은 이런 저런 말들을 방송을 통해 들었다는 사람들은 비사야(Bisaya) 말을 사용하는 두테르테의 말을 타갈로그어(Tagalog)로 번역하면서 오역이 발생했고, 말라카냥(Malacañang) 기자 회견에서 두테르테의 의도는 전적으로 선하고 진실한 반면, 그의 정적들은 고집불통의 위선자들일뿐만 두꺼비와 같은 바보들이라고 단언했다.
아벨라는 두테르테가 "부스러기"가 아닌 "뼈가 제거된 고기"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냥 말씀드리면"과 "다른 방식으로 말씀 드리면"과 같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문구로 무장한 그는 자신의 임무를 지도자의 "문장을 완성하는 것", "진정한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살인 사건에 대해 아벨라는 "이는 ...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과 메시지 스타일의 문제"라고 말했다. 아벨라는 이에 덧붙여:
이는 그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한 메시지 스타일이다. 그는 이 문제 (마약 위협)에 대해 진지하다. 하지만 이는 어느 누구도 부패하지 않고 범죄에 연루되지 않도록 만들고자하는 그의 진지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두서없는 수사법은 사람들을 구슬리고 넋을 빼놓으려고 고안된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탈진실을 비판하는 이들이 정치적 허위, 넌센스, 익살, 침묵과 같은 보드빌 쇼의 위험한 매력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가짜 뉴스"와 "대안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로 버무려진 정치적 거짓말과 질 나쁜 태도는 사악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 사이의 개방적이고 다원적 의사소통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탈진실의 비판자들은 강조한다.
이들의 탈진실에 대한 불만은 요란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높은 도덕적 어조로 종종 표현된다. 현존하는 민주주의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의 종말은 탈진실에서 시작됐다고 여겨진다.
새롭게 출현한 "탈진실 시대"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얘기들이 존재한다. 적지 않은 비평가들이 탈진실의 확산을 새로운 “전체주의”의 전조라고 경고한다. 다른 비평가들은 포퓰리즘 독재 또는 "파시즘 아류" 정부라 말한다.
탈진실에 대한 이러한 묘사들은 의심스러울 수 있으며, 가스라이팅 정부를 향해 표류하는 현재의 역사적 새로움(originality)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둘러대고, 혼을 빼놓게 만들고, 침묵을 공학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로서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정치에서 거짓말은 오래된 기술이다. 플라톤의 숭고한 거짓말(noble lie)6, 마키아벨리의 성공적인 왕자는 "훌륭한 사기꾼이자 위선자"여야 한다는 권고, 또는 해리 트루먼이 리처드 닉슨에 대해 아래와 같이 한 묘사를 생각해 보자:
[닉슨은] ……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짓말쟁이다. 그는 한 입으로 두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할 것이다.
몇몇 것들은 변치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가스라이팅 트렌드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들이 있다. 이들 각각은 미완의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문자와 음향 그리고 영상의 디지털 혼·융합과 아주 쉬운 복제의 출현, 그리고 실시간으로 정보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갈 수 있는 네트워크 용이성의 증가는 퇴폐적인 탈진실의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의사소통의 새로운 기술들 및 도구들은 퇴폐적인 탈진실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의사소통의 새로운 기술들 및 도구들은 민주주의 정치 체제 내부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이르기까지 퇴폐적인 탈진실의 생산과 빠른 순환 및 흡수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 이상의 소스로부터 콘텐츠를 재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로 표현되는 서비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포토샵 손질을 한 자료들과 매시업(meshups)7, 웹 애플리케이션, 및 웹 페이지들을 생각해 보자. 자신의 첫 번째 대통령 선거 캠페인 광고에서 트럼프는 멕시코 국경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민자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사진은 모로코에서 북아프리카의 멜리야로 건너가는 이주민들의 이미지였다.
그런 다음 클론존(Clone Zone)과 나우디스(NowThis)8와 같은 도구와 사이트를 사용하여 구축된 WTOE 5 News9와 같은 판타지 뉴스 사이트 및 사칭 뉴스 사이트(abc.com.co와 같은 URL 사용하는)에 올려진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를 지지해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와 같은 기사를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가짜 뉴스를 공유할 수 있는 뉴스 플랫폼은 아주 적은 돈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마케도니아 청소년들과 성령팔이에 열심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통해 조회 수 조작이 가능하며,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밈의 발판이 되고, “미국 최고의 뉴스 소스”라 자랑하는 The Onion과 같은 페러디 계정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 덧붙여 영웅을 찬양하고 상대편을 불쾌하게 만드는 걸 전문으로 하는 팬클럽 잡지(fanzine)와 같은 플랫폼, 백악관 기자실을 처음 출입하는 플랫폼, 극우파 가짜 뉴스 Gateway Pundit, 극우 친트럼프 가짜 뉴스 사이트인 One American News Network, Newsmax, 보수 음모론 사이트인 LifeZette 및 우파 백인우월주의 사이트인 Daily Caller와 같은 플랫폼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일간지들이 초창기부터 가십, 소문, 거짓말을 실었다고 주장한다. 오슨 웰스(Orson Welles)10는 라디오를 통해서도 사기를 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텔레비전은 조작된 환상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국가 무기였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진실과 탈진실의 문제에서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동력과 이 동력이 만들어낸 새로운 효과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방식을 과소평가한다.
가장 분명한 것은 디지털 통신 혁명이 시·공간이라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기에 가스라이터가 만들어내는 거짓말, 헛소리, 익살, 침묵이라는 원재료가 전 세계로 그 범위를 넓혀갈 수 있다는 것이다.
탈진실은 널리 퍼져나간다: 거기에는 국경도 없다. 예를 들어, 영국,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와 같이 먼 나라에 사는 많은 무슬림들도 "가짜 뉴스" 공격 프로젝트의, 그리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프로젝트의 표적들 중 하나가 자신들임을 알고 있다.
이것 말고도 탈진실에는 또 다른 새로운 사실도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탈진실 담론이 너무 깊숙이 침투해 있는 까닭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적 영역이라 부르는 것조차 더 이상 사적 영역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타자기 시절이나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윈스톤(Winston)11과 같이, 빅 브러더가 볼 수 없는 구석 테이블에 숨어 낙서라도 하며 전체 권력에 저항하던 지점으로 기능했던 사적 영역은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나 균형추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정보를 수집하고 퍼뜨리는 디지털 로봇인 소위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은 일상생활을 탈진실의 식민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탈진실의 지리적 발자취 또한 굉장히 넓어 앞으로 전체주의화 할 것임이 확실하다.
게다가 여기에는 우리 시대에만 찾아볼 수 있는 새로운 면도 존재한다: 포퓰리스트 지도자들과 정당들 그리고 정부에 의해 행해지는 탈진실 의사소통의 생산 및 확산이 그것이다. 역사가 남긴 기록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반복되는 자가면역 질환이라는 오래된 규칙에서 우리 시대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포퓰리즘이 가져온 오늘날 정치적 혼란은 선거 민주주의의 제도적 쇠퇴와 정치인, 정당 및 "정치"에 대한 대중의 점증하는 불만에 힘입어 촉발되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기업 권력의 영향력 증가, 사회적 불평등 심화, 검은 돈에 중독된 선거와 같은 반민주적 도전에 민주주의적 제도들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으며, 이러한 실패는 퇴폐(decadence)를 낳고, 이렇게 강화된 퇴폐는 “국민 주권”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 지도자들과 정당 및 정부에 호화로운 선물임을 입증하고 있다.
포퓰리스트 인물들은,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 노르베르트 호퍼(Norbert Hofer)12 및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13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대개 자신들을 특대형 사이즈로 생각하는 보드빌 캐릭터들이다. 이들은 탈진실의 상인들이자, 신뢰의 착취자들이며, 통신 혁명을 편취한 신용 사기범들이다.
약이 올라있고, 무력하며, 도날드 위니콧(DW Winnicott)14의 말처럼 더 이상 사회의 품에 “안겨있지” 않다고 느끼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향해, 이들은 대중 반란을 촉구함으로써 멀티미디어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다: 굴욕감을 느끼고 좌절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더 나은 미래와 존엄을 약속하는 선동가들에게 기꺼이 달려든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지도자를 갈망하거나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유산에 굴복했기에 선동가들의 이러한 약속에 빠지지 않는다. 탈진실 현상의 가장 이상하고 당혹스러운 특징들 중 하나는, 탈진실 현상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불러일으켜 사람들을 자발적인 예속 상태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넘쳐나는 의사소통과 탈진실의 확산이 가져온 가장 놀라운 장기적 효과는 오만한 진실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진실에 대한 현대적 의심을 더욱 확고히 다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무심코 진실이라 부르는 것들의 근거를 향해 언제나 달려드는 탈진실의 비판자들에겐 탈진실의 정치가 "진실에 작별을 고하는" 당사자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진실이라는 용어는 잘 정의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비평가들의 애착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슨 이유로 그토록 많은 학자, 언론인 또는 대중 평론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탈진실 정치의 무의식적 공범자 또는 적극적인 하수인이라 비난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들은 '증거'와 '사실'에 기초한 '진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가 에워싸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따라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에 차 말한다. 지금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되찾는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은 탈진실의 해독제라고 이들은 답한다. 진실은 관찰 가능한 것이다. 진실은 "현실"에 해당하는 것들을 어떻게든 묘사하는 것이며, 이를 말하거나 글로 쓰거나 시각화하는 것이다.
진실의 투사들은 진실을 일치(adequation)로 이해하며, 이를 다음과 같이 유명하게 표현한 폴란드계 미국인 수학자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를 이따금 인용한다: “눈이 하얗다”(“p”)라는 진술은 눈이 하얀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if and only if) 에만(“p는 p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참이다”) 참이다. 이는 언어를 컨베이어 벨트로, 관찰자 외부에 있는 "실재(reality)"를 기록하기 위한 매개체로 보는 것이다.
진실에 대한 엄격한 정통 버전은 증거(evidence)는 증거이고, 실재(reality)는 실제(real)하며, "원초적 사실(brutal fact)"은 이에 대한 사람의 태도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철학자들만 이런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인, 변호사, 몇몇 학자들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환경 운동가 및 데이터 과학자들도 이러한 진실 거래에 참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는 단어인 진실의 신봉자들은 실재(reality)가 저 너머 그들 주변의 모든 곳에, 팔이 닿을 수 있는 범위 안 또는 밖에 존재한다고, 따라서 예를 들면 데이터의 형태와 같은 재기술(redescription)을 통해 재기술을 통해 파악하고 포착할 수 있다고 습관적으로 가정한다.
이러한 “객관성(objectivity)” 개념은 세상으로부터 탈진실이라는 데카당스를 제거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의 진실이라는 개념 전체를 다시 그려내지 못하고 실패한다. 탈진실과 진실, 이 둘을 동시에 의심하지 못하고, 이 둘을 서로에 대한 적이 아닌 동반자로 보지 못하는 것은 진실에 대한 새로운 지형도 및 역사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진실의 지형도는 진실을 찾아 그리고 진실을 따라 살고자 하는 행위들의 공간적 차원을 강조한다. 장소에 따라 진실로 간주되는 것들은 다르다.
프랑스 르네상스 작가 몽테뉴는 피레네산맥 한쪽에서의 진실이 다른 쪽에서는 거짓이라고 말했다. 푸코(Foucault) 또한 병원과 감옥에서 진실 말하기(le dire-vrai)의 탄생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이 점을 반복한다.
여러 도시들이 지식이라 여기는 것들을 (살라망카학파 Escuela de Salamanca, 시카고학파 Chicago School of Economics, 코펜하겐학파 Copenhagen School) 빚어내는 방식에 대한 학문적 연구 또한 동일한 방향을 가리킨다.
진실의 지형도는 그 사회가 어떤 사회건 주어진 시간과 똑같이 중요하다. 호주 중부의 피찬챠챠라족(Pitjantjatjara)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제 이야기”를 가리킬 때 뮬라(mula), 뮬라-뮬라니(mula-mulani), 뮬라파(mulapa)와 같은 어군의 토착어를 사용한다. 이 토착어군에는 "오랜 세월"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화자와 청자 사이의 동의를 구한다는 의미 또한 새겨져 있다.
진실에 대해 피찬챠챠라족이 말하는 경우,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전통의 정당성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그들은 주류 백인 사회가 일반적으로 잊어버린 것, 즉 진실과 신뢰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진실의 새로운 지형도는 진실과 전혀 관련이 없거나, 거의 관련 없는 삶의 공간도 있음을, 그리고 있다손 치더라도 진실을 언급하는 것이 부적절하거나 (언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만일 누군가가 시위대 앞에 서서 2+2=4라 외친다면 이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야유를 받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는 강간할 여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미얀마군 순찰대를 문 앞에서 맞닥트린 로힝야족 아버지가 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했을 때 닥쳐올 위험을 피하고자 식구 중에 딸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음을 주목한다.
진실로 간주되는 것들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에 따라서도 다르다. 진실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진실은 처음부터 올곧게 진실이었던 적이 없다. 진실로 간주되는 것들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진실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지만, 오늘날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언제나 그래왔던 건 아니라는 (당연한 결론)도 보여준다.
"드러냄(disclosure)" 또는 "감추지 않음(un-concealedness)"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되는 알레테이아(aletheia)로 진실을 표현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진리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복음 14:6)이라는 그리고 진실을 말해 악마를 부끄럽게 만들라는 기독교적 진리관과는 분명히 다르다.
근대 초기, 유럽은 종교적 "진리"의 의미를 놓고 벌인 격렬한 투쟁과 종교적 관용의 요구, 그리고 신비주의, 가톨릭 교리인 내심의 유보(mental reservation), 개신교 결의론(casuistry) 등과 같은 진리의 신봉자들에 의한 속임수 전술 구사와 같은 특징을 보인다.
1520년 “기독교 국가의 개혁을 위해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An Open Letter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Concerning the Reform of the Christian Estate”)에서 루터는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인 교황에 대한 폭발적이고 영향력 있는 공격을 통해 기독교인들 사이의 공개적 진실 공방을 아우른다. 이 진실 공방은 우리가 진실을 알지 못함으로 신께 감사해야 한다는 레싱(Lessing)의 권고에까지 이른다 (“각자 진리라 여기는 것을 말하게 하고, 진리 그 자체로 신께 찬양받게 하라 Sage jeder, was ihm Wahrheit dünkt, und die Wahrheit selbst sei Gott empfohlen”). 그리고 토크빌(Tocqueville)은 노예와 여성을 “선천적으로(natural)” 열등하게 여기는 이른바 공적 진리에 대해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현대 민주주의 혁명을 바라본다.
진실에 관한 주장들이 논쟁의 여지가 있고 그 해석들이 변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의심할 여지없이 멀티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새로운 형태의 훈수꾼 민주주의(monitory democracy)의 출현으로 강화된다. 훈수꾼 민주주의는 수많은 중재 플랫폼을 특징으로, 플랫폼 상에서 권력은 공개적으로 추궁당하고 훈수를 듣게 된다.
훈수꾼 민주주의는 공공 영역(public spaces)의 성장을 촉진하며, 이 공공 영역에서는 불확실성, 의심, 회의주의, 아이러니, 겸허함 등이 전제 권력에 맞서 자라난다.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것을 금지해, 사람들이 "나는 내가 안다고 믿는다"라고 말하도록 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권고는 이러한 상황에 적합하다.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그들의 삶을 통해 인식적 다원화되고 이들은 이를 관철시키고자 한다. 탈진실의 정치는 아직까지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이러한 양자적 변화의 어둡고 지저분한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진실에 관한 이야기는 사라지거나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듯이,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는 해에 대해 말한다. 진리의 언어는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와 같은 비유들도 대중의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진실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가 "진실한 정보"로 간주하는 것들도 현명한 시민들에게는 점점 더 "확실한 사실"이나 반박할 수 없는 “증거", 또는 한 덩어리의 “현실(reality)”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민들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 신문, 디지털 플랫폼 및 "전문가들의” 권위로부터 “현실”을 점점 더 캐내려 하지 않는다.
넘쳐나는 의사소통의 시대 그리고 훈수꾼 민주주의 시대의 “현실”은 다원적이고 가변적이다. 권력자들이 퍼뜨리는 거짓말과 익살, 그리고 이와는 다른 형태들의 가스라이팅을 포함하고 있는 “현실”은 언제나 "보고된 현실"로,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산한 "현실"로 이해된다. 다르게 말해, 현실은 메시지들의 송수신의 과정에서 형성되고 재형성된, 그리고 또다시 재형성된 것들로 이해된다.
진실에 대한 이러한 환멸은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와 관련 있다. 훈수꾼 민주주의는 형이상학적 기반에서 해방된 보편 규범으로, 그리고 얽히고설킨 평등, 자유, 다름을 옹호하는 삶의 전체 방식으로 간주된다. 훈수꾼 민주주의는 삶에 대한 다양한 살아있는 해석의 수호자다.
훈수꾼 민주주의의 근본적 독창성은 사람들의 삶이 결코 단순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인간의 모든 것이 시공간이라는 흐르는 모래 위에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통치하고자 하는 어떠한 사람이나 집단도, 그들이 현재 얼마나 많은 "진실"이나 권력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든지 상관없이, 어떤 맥락에서든 영원히 신뢰할 수 없다는 도전적 주장을 내놓는 데 있다.
따라서 "확실성의 환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고, 진실이라는 위장막을 둘러쓴 권력 독점체들을 깨뜨리기 위해 우리가 발명한 최고의 무기는 현재까지는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진리도 정의의 규범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훈수꾼 민주주의의 규범은 자신과 타인의 한계를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민주주의가 역사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meta-historical) 보장해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훈수꾼 민주주의는 진리만 말한다는 독단주의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에게 시달리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진실이 절대 자명하지도 않고, 진실로 여겨지는 것은 해석의 문제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정치적 삶에서 "진실은 전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진실과 탈진실 너머의 세상을 지지한다.
이는 모든 여성과 남성이 "선천적으로" 동등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민주주의가 어떠한 남자나 여자도 그들이 진리를 안다고 주장하며,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사는 지상의 서식지를 영구적으로 다스릴 만큼 충분히 선하지 않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끝)
1) 카운터 트렌드란 변화의 과정에서 한쪽으로의 쏠림이 심하게 나타날 때, 이를 거부하며 나타나는 또 다른 트렌드이다. 예를 들어 웰빙과 슬로우 푸드가 트렌드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나타난 ‘먹방 유튜버 현상’이 카운터 트렌드이다.
2) 각종 고기와 채소가 한 접시에 담겨 나오는 샐러드
3) 스페인 총리 (1982~1996, 스페인 사회노동당)
4) 네덜란드의 정치인. 네덜란드 제3 정당인 자유당의 대표이자 이슬람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 유명함
5) 189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 유행하였던 가벼운 버라이어티 쇼.
6) 플라톤이 『국가』에서 사용한 개념으로, 정치에서 숭고한 거짓말은 종교적인 성격의 신화나 거짓말로 사회의 조화를 유지하거나 의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엘리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전파된다.
7) 매시업(Mashup)은 웹으로 제공하고 있는 정보와 서비스를 융합하여 새로운 소프트웨어나 서비스, 데이터베이스 등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8) 클론존은 사용자가 원하는 내용을 기존 뉴스 웹사이트와 동일한 형식으로 만들어주는 온라인 서비스. 나우디스는 음모론에서부터 반유대주의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인터넷상에 올려주는 뉴스 서비스.
9) 지금은 없어진 사이트지만 가짜 뉴스의 온상
10) 오슨 웰스(1915년 5월 6일 ~ 1985년 10월 10일)는 미국의 배우, 영화 감독, 영화 프로듀서, 각본가이다. 그는 1941년에 자신이 감독, 제작, 각본, 주연한 “시민 케인”, 영국에서 배우로 출연한 “제3의 사나이”, 1938년에 머큐리 극단을 이끌고 제작한 라디오 드라마인 “우주 전쟁”으로 유명하다. 그 중, 우주전쟁은 1938년 10월 30일, 핼러윈 특집으로 미국의 CBS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개되었으며, 수많은 청취자를 실제로 화성인이 침공했다고 믿게 했다고 한다.
11) 『1984』 속 캐릭터로 혁명을 꿈꾸며, 전체주의적 통제와 강제적 억압을 싫어한다.
12) 오스트리아 자유당 소속 극우 정치인인 노르베르트 호퍼는 2013년 마르틴 그라프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국민의회 제3의장으로 재임 중이다.
13) 튀르키예의 대통령. 2014년 튀르키예 역사상 처음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현재까지 재임 중이다.
14) 영국의 소아과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
번역: 손 산 (사회학박사)
사회정책연구소 무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