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해설과 감상

- 민족 분단에서 사회 분열까지

by 한현수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라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6. 조선일보] -



불의 시대에서 물의 시대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서정적인 재회의 노래이지만, 그 안에는 대립과 갈등의 사회 상황을 넘어서고자 하는 공동체의 염원이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현재의 만남을 ‘불’로 규정합니다. 불은 서로를 태워 없애는 파괴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전쟁의 참상이나 극단적 사회 분열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숯이 된 뼈’라는 형상은 이런 갈등과 대립의 현장에서 남겨진 깊은 상흔과 소외를 시각화한 것일 듯합니다. 또, ‘만리 밖’이라는 거리감은 그렇게 생긴 심리적·사회적 단절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화자가 소모적인 갈등의 시대(불)를 지나 공존과 수용의 시대(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경계 없는 공존의 회복

물은 인위적인 경계가 없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나면 하나가 되는 성질을 가집니다. '가문 어느 집'은 소통이 단절되어 정서적으로 황폐해진 사회의 단면을 상징할 것입니다. 내리는 비가 물이 되어 흐르면 삭막한 세상에는 다시 온기가 돌고 상처는 치유될 것입니다. 나무와 어울려 흐르는 물의 모습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라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낮은 곳을 흘러 바다로

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소외된 이들을 보듬습니다.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는' 행위는 갈등의 이면에서 상처받고 잊힌 존재들을 위로하는 몸짓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닿게 되는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는 어떠한 혐오나 폭력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인간애의 회복, 혹은 진정한 화합의 세계를 상징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불의 현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는 구절은 여전히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대립하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분단된 민족의 대립뿐 아니라 상대를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 보는 요즘의 사회적 증오와 분노가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는 이런 갈등 속에 타버린(한국전쟁, 사회분열) 인간의 존엄성을 뜻하고, 그 탄 뼈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는' 모습은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의 아픔을 발견하고 연민을 느끼기 시작하는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단절된 그대에게

화자는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에게 말을 겁니다. '그대'는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이웃이나 사회적 타자를 의미합니다.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는 요청은 소모적인 대결을 멈추고 화해의 시대를 열자는 선언입니다.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는 갈등의 열기가 사그라드는 정화의 음성이고,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은 인간이 만든 편견과 차별이 사라진 자리, 즉 온전한 소통이 회복된 미래를 연상시킵니다.



대립의 미학을 통해 구현된 보편적 화해의 윤리

이 작품은 개인적인 서정의 그릇 안에, 민족적 비극과 현대 사회의 분열이라는 보편적 민족 문제로 해석할 수 있는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물’과 ‘불’이라는 원형적 대비가 과거의 전쟁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겪는 파편화된 갈등을 치유할 보편적인 논리까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뜨거운 증오(불)로는 결코 서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스스로를 낮추고 흐르는 물의 자세만이 공동체의 상처를 씻어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시는 삭막한 현실 위에서 핀 서정의 꽃처럼, 상처 많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고 보듬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고귀한 ‘공존의 윤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표 시기를 생각하면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작품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회적 분열이라는 요즘의 우리 사회적 상황을 대입하니 마치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말을 거는 듯 생생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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