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묵이 총보다 강하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는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 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 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51』
뒷골목으로 숨어 둔 민주주의
이 시는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불온한 사상이 되고,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죄가 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유신 독재와 긴급조치라는 서슬 퍼런 1970년대의 한복판, 화자는 당당한 광장이 아닌 ‘신새벽 뒷골목’으로 숨어듭니다.
동이 트기 전의 어스름,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만 하는 이 눅눅한 골목은 단순한 시공간적 배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시 민주주의가 처했던 역사의 현주소이자, 숨죽여야만 살 수 있었던 화자의 위태로운 처지를 대변합니다. 이 시의 공개와 확산은 곧 당국의 표적이 되었고, 김지하는 석방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연행·구속됩니다. 그러니 시 속에서 '남몰래 쓴다'는 행위는 그냥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체포를 각오한 실제적 ‘거사’였던 것입니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강요 당한 망각, 그러나 심장은 기억한다
화자는 고백합니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라고,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라고 말입니다. 이 구절은 민주주의에 대한 무관심이나 변절로 읽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요된 망각’입니다. 억압적인 체제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의식(머리)과 행동(발길)은 민주주의를 모르는 척 외면하며 세월을 견뎌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이 멈춘 자리에서 본능이 꿈틀거립니다. '오직 한 가닥' 남은 것은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입니다. 여기서 ‘목마름’은 감상적인 그리움이 아닙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자유와 존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의 ‘본능적 갈증’입니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잊혔을지 몰라도, 삶의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육체에 각인되어 있기에 화자는 도둑처럼 숨어서라도 그 이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직 동트지 않는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 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 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소리로 증언하는 공포
여기서는 시각적 묘사가 사라지고, 오직 소리만이 날카롭게 감각을 자극합니다.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비명 소리….' 이 소리들은 1970년대 밤의 풍경을 단번에 불러들입니다. 그것은 일상의 소음이 아닙니다. 누군가 감시당하고 연행되고 고문받는 ‘독재 폭력의 청각적 징후’들입니다. 보이지 않기에 더 공포스러운 이 소리들 속에서, 화자의 가슴에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깊이 깊이 새겨'집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작은 불빛이 선명하게 보이듯, 극한의 두려움이 몰려오는 순간이야말로 민주주의가 가장 '외로운 눈부심'을 발하는 시간임을 시인은 포착해냅니다.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관념을 넘어선 피의 기록
추상적이었던 ‘자유의 추억’은 여기에서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로 바뀝니다. 빼앗긴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적인 결핍이 아니라, 내 친구와 이웃이 피를 흘려야 하는 육체적이며 현실적인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그 참혹함 앞에서 화자의 손과 가슴은 떨립니다. 이 떨림은 단순한 공포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느껴야 할 '치떨리는 노여움', 즉 인간적이며 윤리적인 분노입니다. 화자는 그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글씨를 씁니다. 매끄러운 종이도 영원히 남을 잉크도 아닌, 거친 판자와 가루가 흩날리는 백묵. 서툰 솜씨로 꾹꾹 눌러 쓴 이 행위는 세련된 예술 활동이 아니라, 벼랑 끝에 몰린 자의 절박한 절규입니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숨죽인 흐느낌에서 터져 나오는 영혼의 주문
화자는 결국 '숨죽여 흐느끼며' 이름을 씁니다. 큰 소리로 울 수도 없는 시대의 억압이 이 짧은 행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흐느낌은 나약한 체념이 아닙니다. 이어진 행에서 세 번 반복되는 '타는 목마름으로'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점층적인 상승입니다.
첫 번째가 본능적 갈증이라면, 두 번째는 시대를 향한 분노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기어이 자유를 되찾겠다는 영혼의 맹세이자 주문(呪文)일 것입니다. 시인은 이 반복을 통해 개인의 울분을 거대한 역사의 외침으로 확장해 나갑니다.
지워질수록 더 뜨겁게 타오르는 노래
나무판자에 쓴 백묵 글씨는 비바람에 금세 지워질 것입니다. 화자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의 위대함은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습니다.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죄가 되는 시대, '숨죽여 흐느끼며' 남기는 이 미약한 기록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저항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반복되는 '타는 목마름으로'는 점층적으로 고조되며, 개인의 흐느낌이 집단의 함성으로 번져 나갈 것을 예감하게 합니다. 실제로 이 시는 1980년대 초중반, 이성연이 곡을 붙인 민중가요가 되어 대학가를 중심으로 구전 확산됩니다.
또한 1982년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는 배포·출간 직후 판매금지와 압수 조치를 겪습니다.
시인이 뒷골목에서 숨죽여 쓴 이름은 결국 지워지지 않았고, 시대의 어둠을 뚫고 나와 역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