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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유리창I' 해설과 감상

-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by 느티나무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아갔구나!



이 시는 먼저 세상을 떠난 어린 자식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이미지를 통해 절제된 감각으로 그린 작품이다. 유리창은 내부와 외부를 물리적으로 차단하면서도 안과 밖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화자와 대상의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서로를 연결시켜 준다. 생사의 경계에서 화자와 죽은 아이의 찰나적 만남을 매개해 주는 것은 이러한 유리의 속성으로 인해 가능하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시, 특히 낯선 시를 감상할 때 맨 처음에 해야 할 일은, 시적 화자가 대면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시의 창작 동기가 되는 이 핵심 상황을 제재(題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추운 밤 입김이 서리는 유리창(유리) 앞에 서 있습니다. 유리에 서리는 입김은 새처럼 파닥이다 사라지고, 화자는 이 사라진(날아갔구나) 새에서 죽은(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너'(늬)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너의 죽음'이 이 작품의 핵심 상황 곧 제재인 것입니다.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죽은 '너'를 생각하는 화자의 손과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허망하고 서글픈 심정에 기운 없이(열없이) 유리창을 향해 입김을 불어 봅니다. 찬 유리창에 입김이 서리고, 주변부터 지워지며 모양이 변하는 입김 자국은 마치 길든 새가 날개를 파닥이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차고 슬픈 것'은 새의 모습으로 보이는 입김이겠지만, 그 입김을 '차고' 또 '슬프게' 느끼게 하는 것은 화자의 심정입니다. '차고'는 '죽음'을, '슬픈'은 그 죽음의 안타까움을 연상시킵니다. 사람의 손에 길든 새처럼 파닥거리다 사라지는 새의 모습 속에서, 작고(새) 병든(언) 너의 마지막 몸짓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유리창에서 너의 영상인 새(입김)가 사라집니다. 화자는 열심히 유리를 닦으며 창문 저편으로 날아간 새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오직 컴컴한 어둠뿐입니다.

어둠(밤)은 일단 화자의 허탈감과 상실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리창을 사이에 둔 저편의 세상, 곧 '너'가 가버린 죽음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밤'을 아무리 밀어 내려 해도 다시 와 해안에 부딪치는 물결로 표현한 데에서, 불가항력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망감이 느껴집니다.

바로 그 때, 어둠 저 편에 보석 같은 작은 별이 반짝 합니다. 순간 화자에게 그 별이 다른 세계에 가서 자리잡은 '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힌다'에서 밤의 저편에서 찾고 있던 '너가 이제 별이 되었다' 곧 '이제 다른 세계로 가 버렸다'는 깨달음의 충격이 느껴집니다. '보석'에는 '너'에 대한 화자의 소중함과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물 먹은 별'입니다. 화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들어온 별이 눈물로 인해 어지럽게 산란하는 순간의 모습이 '반짝'입니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화자는 홀로 밤에 유리를 닦는 심정을,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고 함으로써 복합적 감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외로운'은, 유리창에 서리는 입김을 통해 '너'의 죽음을 생각하고 창밖 밤의 세계를 보며 만날 수 없는 둘 사이의 거리를 느끼는 데서 오는 감정입니다. '황홀한'은, 그러면서도 입김이나 별을 통해서나마 '너'를 만나 볼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유리'는 '너'와 화자의 세계 사이의 단절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만남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아갔구나!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의 '고운'을 통해 '너'가 어리고 여린 사람이라는 것을, '폐혈관'을 통해 죽음의 원인을, '찢어진'을 통해 '죽기 전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회상 가운데 참고 있었던 화자의 슬픔이 '아아'라는 낮지만 깊숙한 탄식을 통해 표출됩니다. 화자는 '늬(너)'라는 대명사로 죽은 이를 직접 가리켜 절제했던 감정을 어느 정도 노출하면서, '산(山)ㅅ새처럼'이라는 표현으로 지금까지의 '너=새'라는 비유를 정리하면서 잠시 화자의 곁에 머물다가 훌쩍 떠나버린 '너'에 대한 슬프고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모든 해설이 '늬(너)'를 '아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너'로 지칭될 뿐더러 죽은 이를 여리고 어린 모습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의 정보만으로는 '늬'를 '아들'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늬'가 폐렴으로 죽은 시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의 지인이 작품 밖의 어느 글에서 밝힌 내용이랍니다.

문학작품은 하나의 독립된 완결체입니다. 그래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작품 속에 들어 있어야 하고, 그 정보를 통해서만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작가의 전기적 사실이나 사회 상황 등 작품 외적 정보를 가지고 미루어 짐작하여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작가론 같은 학술 작업에서는 모르겠지만 한 작품의 감상으로서는 위험한 일인 듯합니다.

내가 쓰는 글들에서는, 작품 밖 사실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자제하고 작품 자체의 해석과 감상에만 치중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네이버블로그 현대시 전문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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