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박인환 '세월이 가면' 해설과 감상

- 사랑은 가도, 잔상(殘像)은 어쩔 수가 없다

by 느티나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이건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야. 1956년에 쓰였고, 유고처럼 전해지는 대표작이지. 시집 제목은 〈목마와 숙녀>로 알려져 있어.

특히 “사랑은 가고 / 과거는 남는 것”이라는 축이, 잊힌 이름과 남아 있는 감각(눈동자·입술)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내면서 ‘기억의 지속’과 ‘사랑의 소멸’을 부드럽지만 아프게 대비해. 이 작품은 이후 노래(박인희의 ‘세월이 가면’)로도 널리 사랑받았고,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쓰였다는 전언도 있어 작품의 여운을 더 크게 해.

- 챗 지피티 -



화자의 사랑은 이미 끝났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슬픔도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과거의 몇 장면과 감각들은 아직도 화자를 붙잡습니다. 잊으려고는 하지만 그 차갑고 아픈 잔상들은 버려지지 않고 오히려 간직하고 싶기까지 합니다. 차라리 이 나약한 자신을 품기로 합니다.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화자는 자신의 상황을 점차 일반적 사랑의 과정으로 보편화하면서 마음을 정리해 나가려고 합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이렇게 기억과 감각이 생생한데 화자가 그 사람의 이름을 잊었을 리가 없습니다.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과의 모든 관계들이 한꺼번에 밀려 와 너무 아프게 되니까, 일부러 이름을 지우고 '눈동자, 입술'과 같은 구체적이고 파편적인 감각만 남겨 두려는 것입니다. 떠오르는 기억을 어쩔 수는 없지만, 절제를 통해 화자의 아픈 일들을 아름다운 이미지로 바꾸어 기억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는 듯합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그 사람과 함께 하던 저 가로등 그늘에서의 시간이 떠오릅니다. 반복적으로 소환되는(~ㄹ 때도) 장면인 만큼, 이 이미지가 과거를 불러오는 매개체가 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차갑고 쓸쓸한 분위기, 희미한 빛과 어둠으로 보면, 어쩌면 이 때는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이별의 순간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화자는 자신의 실연을 자연의 소멸 법칙으로 말합니다. 낙엽이 떨어져 흙이 되고,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도 덮어 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끝을 비난이나 원망 없이 자연의 법칙으로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보편화가 바로 화자가 자신을 치유하는 방식인 듯합니다.

그러나 '사라진다 해도'라는 양보적 표현에서 보듯, 화자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잔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4연은 1연을 변주한 수미상관입니다. 1연의 진술을 다시 끌어오면서, '서늘한 가슴'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견디지 못할 만큼의 아픔은 아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도 남게 된 차갑고도 또렷한 통증을 말할 것입니다.

'있건만'에서는 완전히 잊고 싶은 마음과 간직된 기억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름은 끊었지만(이름은 잊었지만), 눈, 입술과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파편들은 어쩔 수 없이 남아 화자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추억을 미화하거나 삭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가져올 그 사람의 이름을 내려놓고, 사랑이 남긴 아름다움의 조각들만 차갑게 품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실연의 체험을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다'는 사랑의 일반적 과정으로 정리합니다. 역설, 반복, 일반화 같은 장치가 그 과정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이런 정리가 과거의 상처를 중심에서 옆자리로 옮기고, 화자의 삶을 지속하게 할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김종삼 '묵화(墨畵)' 해설과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