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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초혼(招魂)' 해설과 감상

- 삶과 죽음의 사이

by 느티나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이 작품의 시적 출발은 우리의 전통적 장례의식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고복의식(皐復儀式)을 빌어 이루어지고 있다. 민간에서는 흔히 초혼(招魂)이라고 불리우는 이 고복의식은 이미 죽음으로 인하여 떠난 혼을 다시 불러 들여 죽은 사람을 살려내려는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을 의식화한 것으로서, 임종한 직후 북쪽을 향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행위가 중심을 이룬다. 이 작품은 고복의식을 하나의 모티브로 사용하여 사랑하는 님과 화자 사이에 놓인 엄청난 단절의 거리를 우선적으로 인식하고, 이어서 그러한 단절의 거리를 좁혀 보려는 화자의 뜨거운 소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 권영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고복 의식에서 죽은 이를 부르는 행위가 '초혼'입니다. 이 작품이 실제의 고복 의식을 형상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허탈, 절망감으로 절규하는 화자의 심정은 고복 의식 때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초혼'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1연 - 임의 부재를 절감한 화자의 절규

사랑하는 이는 더 이상 이승에 없습니다. 화자가 부르는 이름은 주인 없는 소리가 되어 허공에 흩어집니다. 그럼에도 사랑의 강도는 약해질 듯싶지 않습니다. 화자는 ‘—이여’를 반복하여 응답 없는 부름을 청각적으로 새기다가, '부르다 내가 죽을' 만큼의 절박한 심정을 드러냅니다. 1연 각 행이 ‘ㅅ·ㅎ·ㅂ’ 음으로 시작되면 마찰·파열음의 급한 호흡을 만들면서, 절규의 리듬을 강화해 주고 있습니다.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2연 -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안타까움

화자의 슬픔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서 오는 충격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간직할 만큼 깊은 사랑이지만, 마지막으로 꼭 전하고 싶던 그 한 마디를 끝내 밝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자책이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감추어 온 자신의 사랑은 이제 영원히 화자의 가슴 속에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이 더 슬프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3연 - 영원한 이별이 남긴 허탈과 좌절

‘서산마루에 걸린 해’는 낮과 밤의 경계, 곧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슬피 우는 사슴의 무리'는 화자의 정서가 투영된 상징물입니다. 전통 시가나 한시에서 연약·고독·상실의 이미지로 등장해 온 소재입니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은 고독의 상징이자, 자기 힘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을 담고 있습니다. ‘서산, 사슴, 슬피, 산’의 ‘ㅅ’ 소리는 절규의 날카로운 호흡과 맞물립니다.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4연 - 삶과 죽음 사이의 절망적 거리

깊은 좌절과 허탈 속에서 화자는 여전히 죽은 이의 이름을 외칩니다. 허공으로 퍼지는 그 소리는 어떤 장애물도 '비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임의 세계에까지 이를 수는 없습니다. 임이 있는 죽음의 세계 '하늘'과 화자가 서 있는 '땅' 곧 삶의 세계와의 거리는, 목소리의 크기로 극복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5연 - 영원한 비애

그렇더라도 화자는 영원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억하고 사랑하리라고 다짐합니다. '돌'은 화자의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그의 크나큰 한의 응결체입니다.

여기서의 '돌'은 '정읍사'의 배경 설화와 박제상 설화의 망부석 모티프를 환기하면서, 부름의 시간이 결국 그렇게밖에는 귀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반복과 영탄을 이용하여 자신의 슬픔을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표현상의 미숙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서 오는 충격과 슬픔, 안타까움이 너무 큰 것임을 보이기 위해 그것을 절제 없이 표출할 수 있는 초혼이라는 장례 의식을 소재로 이용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한 충격, 그 임을 마지막으로 보내기 직전의 허탈감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이 의식에서는, 감정의 절제와 같은 냉정함이 오히려 비지성적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월의 다른 작품과 달리 여기서는 화자가 남성으로 보이는데, 남성 화자의 이러한 목소리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바탕은 그 배경이 국권을 상실한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이 시에서의 초혼 의식은 국권에 대한 애절한 슬픔과 그리움의 객관적 상관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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