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즈문 밤 그리움이 빚어 올린 님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각 시행은 7 · 5조를 기반으로 한 3음보의 율격 구조를 가진 것으로 율독(律讀)이 가능하다. 그만큼 이 시는 우리 고유의 민요나 시조 같은 전통적 시가형식과의 상관성을 짙게 나타낸다. 그것은 곧 이 시의 근저에 동양적 형식미와 정신세계가 잠겨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해석의 열쇠 구실을 하는 것은 님의 눈썹과 새의 관계이다. 겨울 하늘의 투영하고 삽상한 공간에 시의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님의 눈썹을 천날 밤의 꿈으로 씻어서 걸어 놓았다고 진술한다. 그랬더니 추운 겨울밤을 나는 새도 자신의 지극한 정성을 알아보았는지 그 눈썹의 모양과 비슷한 모습으로 피해가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정신과 정신의 마주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간절함은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는 겨울새에게까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불교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킨다. 이 짧은 시 한편에도 시인의 불교적 사유가 은밀히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이 시의 ‘우리 님’은 한때 현실에 또렷하게 존재했던 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서로 거리가 멀어지면서, 화자가 자기의 마음속에서 그 님의 모습을 수없이 회상하고 다듬다가, 결국 현실의 님과 이상으로 정제된 님이 하나로 겹쳐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 ‘즈믄 밤의 꿈’,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와 같은 표현들은, 현실에 있던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긴 시간 동안 내면에서 씻기고 닦이며 이상의 님과 합쳐진 뒤, 마침내 단순한 추억을 넘어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이라는 우주적 존재가 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내 마음 속 우리 님’이라는 표현에는 이미 몇 가지 뉘앙스가 겹쳐 있습니다. 우선 님은 지금 곁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한때 현실에서 함께했으나 지금은 떨어져 있는 존재입니다. 몸으로 만날 수 없는 님이 이제는 기억과 그리움, 상상을 통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님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고운 눈썹’은 님의 얼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부분만을 떼어 내어 강조한 표현입니다. 현실에서 보았던 님의 모습 전체가 아니라, 화자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 정제된 아름다움이 한 지점에 응축되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즈믄’은 ‘천(千)’의 옛말이지만 여기서는 수없이 많은 밤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그리움과 사색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말입니다. 화자는 그 긴 시간 동안 사랑과 욕망, 상상력이 작동하는 내면의 작업(꿈)을 통해 님을 생각하며, 실제의 잡티와 상처의 흔적들을 지워 내어 님의 형상을 '맑게 씻'었습니다. 그렇게 님은 점점 더 투명하고 깨끗한 이상적 형상으로 가다듬어졌을 것입니다.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화자는 지금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초승달이 보이고 문득 그 매끄럽게 아름다운 모습이 자기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님의 눈썹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자의 님은 화자의 내면을 떠나 '하늘'로 옮겨집니다.
‘심어 놨다’는 말은, 눈썹을 단순히 옮겨 둔 것이 아니라 나무와 같은 생명체처럼 계속 살아 있을 무엇으로 대우한다는 말입니다. 님이 개인적 연정의 대상에서, 수많은 밤의 꿈을 통해 정화된 뒤, 하늘에 옮겨 심어진 초승달로 모습을 바꾸면서, 화자에게 하나의 세계로 자리 잡게 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동지 섣달’은 한겨울, 그중에서도 가장 추운 때를 가리킵니다. 모든 것이 얼어붙고 생명이 움추러드는 시기입니다. 그런 계절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서운 새’는, 이 혹독한 현실을 뚫고 살아가는 거친 생명력과 현실 세계의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실의 차가운 계절과, 그 위에 자리한 님의 상징,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생명이 한 장면에 포개져 있는 것이지요. 이 장면은 이제 님이 단지 화자의 마음 속에만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한겨울의 자연과도 관계 맺는 우주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그걸'은 단순히 님의 눈썹이 아닙니다. 앞에서 묘사된 과정—내 마음 속 님, 즈믄 밤의 꿈, 정화와 이상화, 하늘에 심기—을 다 가리킬 것입니다. 그 옆을 새가 지나갑니다. '시늉하며'는 그 눈썹 모양을 흉내 내듯 따라 날아가는 모습, '비끼어 가네'는 정면으로 가로지르지 않고 비켜 지나가는 경외의 태도입니다. 현실의 생명도 그 이상을 흉내 내고는 싶지만, 결국 그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하고 그 곁을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화자의 님은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그야말로 유니버스한 아름다움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현실의 님이 있었을 테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님은 화자의 꿈과 기억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며 '맑게 씻긴 형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회상이 쌓이다 보니, 현실의 님과 이상의 님이 화자의 내면에서 점점 더 구별되지 않게 되었고, 결국 시 속에 등장하는 ‘우리 님’은 현실과 이상이 하나로 합쳐진 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님은 다시 초승달과 합쳐지면서 우주적 존재가 됩니다.
이런 과정이 7·5조/3음보의 전통적 형식 속에 몇 줄 안 되는 이미지들로 조용하지만 밀도 있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그리움이 어떻게 시간 속에서 변형되고, 현실의 님과 이상의 님이 어떻게 하나로 포개져 가는지를 섬세하게 보여 주는 서정시입니다. 높은 미적 완성도와 해석의 깊이를 함께 지니고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