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해설과 감상

- 죽음은 적막을 원한다

by 한현수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이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7』(조선일보 연재, 2008)



존재의 주도권은 죽음에게

화자는 어느 겨울, 누군가의 죽음과 관련된 일로 ‘문의(文義)마을'에 갑니다. 이 작품은 화자가 그곳에서 죽음과 관련된 풍경들을 목격하며 겪고, 느끼고, 깨달은 바를 적은 시입니다.

이 시에서 존재의 주도권은 철저히 죽음에게 있습니다. 존재란 본래 ‘없음’에서 잠시 형체를 갖추고 ‘있음’으로 머물다가, 다시 ‘없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없음’이란 소멸이고, 죽음이며, 본질적인 적막입니다.

그렇게 삶은 죽음의 바탕 위에서 잠시 이질적인 ‘살아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가 결국 다시 죽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은 처음과 끝이 죽음에 맞닿아 있고 그만큼 삶과 죽음은 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삶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애써 잊고 지냅니다. 죽음, 적막이 존재의 근원이자 바탕이며, 바로 지금 나와 점 하나로 맞닿아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그 서늘한 진실을 말입니다.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삶과 죽음의 불편한 만남 - 가까스로

화자는 죽음과 관련된 일로 겨울 문의에 갑니다. '거기까지 닿은 길'은 화자가 걸어 온 '삶의 길'일 텐데, 그 길은 거기서 다른 '몇 갈래의 길'과 만납니다. 삶의 길 끝과 연결된 길들이니 이는 아마 '죽음의 길'일 것입니다. 삶은 서로 부대끼며 하나로 뭉쳐(닿은 길) 가지만, 죽음은 그런 일들이 끝나 홀로(저마다) 적막한 산속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니 '몇 갈래의 길'로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과의 만남은 '가까스로'입니다. 삶은 결국 죽음과 만나게 되지만, 그 만남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삶이 잠시 이질적인 상태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늘 소란하고 불편하고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가까스로'입니다.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죽음이 원하는 것 - 적막

화자는 죽음의 본질과 관련해 생각해 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소멸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적막이고, 그래서 자기처럼 모든 길들(삶의 길, 죽음의 길.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 과정)이 다 적막하기를 바랍니다.

죽음은 삶과,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 과정(아마도 장례의식과 같은)이 너무 소란하고 불편합니다. '마른 소리로' '귀를 닫고'에서는, 나이 든 노인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못마땅해 '에헴~' 하고 마른 기침(마른 소리)을 하며 소리가 들리지 않는(귀를 닫고) 곳으로 자리를 옮겨 버리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렇게 죽음은 소란을 피해 적막의 길들(추운 쪽의 길들)로 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삶의 무심과 망각

그러나 산 사람들(삶)은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죽어서 죽음으로의 소란한 이행 과정이 끝나면, 다 잊고 일상(잠든 마을)으로 돌아가(길에서 돌아가) 다시 어수선한 삶의 자취를 만들어 냅니다(재를 날리고). 그리고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 데도 무심한 채로(팔짱 끼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화자는 탄식합니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은 덮습니다. 가립니다. 보이지 않게 합니다. '눈'은 그래서 망각이며, 무관심이며, 몰인식입니다. 사람들은 죽음과 그 적막함을 잊고,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삶과 밀착된 접점을 가진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눈 때문입니다.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죽음의 주도권 - 사절하다

1연이 길과 마을의 전경으로 삶과 죽음의 일반적 모습을 표현했다면, 2연은 '한 죽음'이 삶의 길에서 죽음의 길로 이행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이제 가장 난해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사절하다가 한 죽음을 받아 가면서. 인기척을 듣고 뒤돌아 본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비유해 봅니다. 친구(삶의 세계)가 귀한 나(죽음의 세계)의 물건(존재)을 빌려 가서는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아 직접 찾으러 간 상황입니다. 친구는 물건을 내어 주면서 미안한 마음에 택시비라도 쥐여주려 하며 호들갑을 떱니다. 말하자면 죽음으로 가는 길을 번잡하게 만드는 장례 같은 절차들입니다.

나는 다시는 엮이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그 호의를 거절합니다(사절하다가). 그러고는 돈을 쥐여주려는 친구의 손목을 꽉 붙잡아 제지하고(삶을 꽉 껴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내 물건을 낚아채(한 죽음을 받는) 나와 버립니다. 자리를 뜨면서도 혹시 친구가 또다시 소란을 피우며 따라오지는 않는지(인기척을 듣고) 확인을 합니다(뒤를 돌아다 본다).

남들에게는 엄숙한 의식이겠지만, 삶과 죽음의 관계를 통찰하고 있는 화자의 눈에는 그것이 죽음을 귀찮게 하는 ‘소란’일 뿐입니다. 화자에게는 소란을 뿌리치고 떠나는 죽음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보았다).



모든 것이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눈으로 덮이는 것들

세상은 낮습니다. 눈이 내려 덮을 수 있습니다. 삶은 존재와 죽음의 본질을 꿰뚫어 볼 만큼 영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이 덮여 가려지만 그 모습대로만 보고 근원을 보지 못합니다. 본 것은 잊어 버립니다. 본래 죽음은 삶이 돌을 던져 몰아낼 수도 없는 데다가, 아예 눈 덮여 보이지도 않는 곳에다 대고 막연한 불편함으로 가끔씩 돌만 던지다 맙니다.

화자는 겨울의 문의를 지목하지만 사실은 세상에 대고 말합니다. 눈(망각. 무관심. 몰인식)이 그렇게 죽음의 본모습을 가리고 존재의 본질을 가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설명이 아니라 ‘동작’으로 보여 주는 죽음

이 작품은 죽음을 교훈이나 위로로 정리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개념으로 설명하는 대신, '바란다', '닫고', '받고', '사절하고', '듣고', '가서', '뒤돌아본다' 같은 동작과 태도로 형상화합니다. 1연에서 죽음은 적막을 지향하는 성격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2연에서 그 성격은 '한 목숨의 끝(한 죽음)' 앞에서 구체적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또 이 시는 큰 소리나 웅변 대신 '마른 소리'와 '인기척' 같은 미세한 신호를 통해, 독자가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죽음의 성격을 체감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의 눈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죽음과 길과 삶의 실상을 함께 덮어 윤곽을 흐리게 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죽음을 말하면서도, 결국 삶의 자리까지 서늘하게 흔들어 놓습니다. 죽음은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니라, 삶의 길들과 '가까스로' 맞닿아 있는, 너무 가까운 현실이라는 사실을, 질문의 형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평 노트] 나는 이 작품을 이렇게 다시 읽었습니다.

1. 정적인 풍경 묘사에서 ‘동적인 드라마’로

기존의 해설이 화자가 문의 마을을 바라보며 느낀 정적인 풍경과 내면의 깨달음에 머물렀다면, 나는 이 시를 생동감 넘치는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죽음은 배경 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귀를 닫고, 삶을 껴안고, 사절하고, 뒤를 돌아보는 구체적 행동을 보여줍니다. 소란을 피우는 삶과 이를 떨쳐내고 떠나려는 죽음 사이의 팽팽한 실랑이를 포착하였습니다.

2. 물리적 거리를 넘어선 ‘불편한 마찰’로서의 ‘가까스로’

기존의 해설들은 ‘가까스로’라는 시어를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인접해 있다는 물리적·운명적 거리감의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까스로’를 성질이 다른 세계가 서로 섞이지 못해 발생하는 ‘불편한 마찰음’으로 읽었습니다. 삶은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상태에서 불편하게 만나고 부대낍니다. 죽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늘 소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바로 이 ‘가까스로’ 유지되는 관계의 불협화음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3. 관념을 걷어내고 ‘성격’을 부여한 죽음

‘사절하다’라는 난해한 구절을 해석하면서, 나는 죽음을 막연한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성격을 가진 인격체로 형상화했습니다. 특히 ‘물건을 회수해가는 주인’의 비유를 통해, 죽음을 삶이 잠시 빌려 쓴 생명을 단호하게 돌려받는 과정으로 묘사했습니다. 삶이 미안함이나 아쉬움으로 내미는 소란스러운 형식(택시비)조차 ‘됐으니 그만하라’며 뿌리치는 죽음은,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챙겨 떠나는 능동적이고 냉철한 주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4. 화해와 포용이 아닌, ‘망각과 은폐’로서의 눈

보통 해설에서는 ‘눈’을 대상을 덮어 경계를 지우고 하나로 만드는 화해와 포용의 상징으로 읽습니다. 하지만 나는 눈을 철저히 부정적인 기제, 즉 ‘망각’과 ‘무관심’, '몰인식'으로 보았습니다.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림으로써 산 자들은 죽음의 서늘한 실존을 보지 못하게 되고, 그 적막한 본질을 잊은 채 다시 일상의 안온함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눈은 삶과 죽음을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진실을 가려버림으로써 삶을 기만하는 장치인 것입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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