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by 샌디


결국 떨어졌다.


딱 한 달 전의 일이다. 그날은 일주일에 두어 번 남짓하게 있는 학원 수업을 듣기 위해 버스를 타려고 집을 나서던 날이었다.

선망하던 기업의 채용절차 몇 단계를 무사히 마치고 최종면접까지 마쳤던 나는, 지지부진하다 할 만큼 늘어졌던 과거 절차를 떠올리며 이번에도 오랜 기간 동안 기대감 반, 불안함 반으로 시간을 보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치 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지 않은 존재야,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내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불합격 메일을 받아버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 넘게 걸리던 매 단계와는 다르게, 이 통보는 최종 면접을 본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받아버린 결과였다.


온갖 나쁜 잡념을 애써 무시하며 학원을 마치곤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여니, 역시나 매일같이 잠에 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채 방에 들어가 옷을 벗으며 잘 채비를 하는 나의 소리가 들리자 엄마는 그제야 잠자리에 들었다.

안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을 때만 찾는 서랍 속 수면보조제 3알을 겨우 먹은 채 책장에 있던 책 중 가장 눈이 가는 책 한 권을 골라 앉았다. 그러자 책장을 넘길수록 시야가 뿌예지더니 하루 종일 참아왔던 눈물이 갑자기 미친 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애써 무시하던 행거 위, 엄마가 최종면접을 잘 보라며 나 몰래 새로 사 왔던 정장이 눈에 또렷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 거대한 고통은 정체되어 있다가 이완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법이다. 예컨대 별안간 부모의 초상을 치르게 된 사람이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는, 현관에 놓인 부모의 낡고 오래된 신발 한 짝을 보고 비로소 주저앉아 통곡하게 되는 상황 같은 것일까. 아마 그런 것이리라 -




친구를 만나고 술을 먹어도 슬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며칠간은 다시 최종면접을 보고 있거나 합격 메일을 받는 꿈까지 꿀 정도였다.


문득 답답함에 서울의 야경이 보고 싶었다. 등산로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집을 비운 나를 찾는 엄마의 카톡을 보자 한동안 새벽까지 술을 먹고 들어오느라 며칠째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전하고 싶지 않았던 소식이었지만 얼굴을 보고 말한다면 또 눈물이 터져 나올 거 같아 차마 쓰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다.


“엄마. 미안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도 한동안 오지 않던 엄마의 답장은, 한 문장씩 1분의 간격을 두고 오기 시작했다.


”네가 속상하지 뭐.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

“야간에 등산 가면 옷은 따뜻하게 입고 갔어? 발은 안 아프려나? “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히 다녀와. “

“등산 가서 속상한 거 다 풀고 내려오면 괜찮을 거야^^“

“저녁 따뜻하고 든든한 걸로 먹구. 감기 걸리지 않게….“

.

.


전화대신 오는 띄엄띄엄한 카톡은 엄마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휴대폰을 잡고 내내 고민한 흔적들이었다. 아마 나의 단출한 문장에서 느껴진 모양이었다. 혼자 슬픔을 삭히고 있다는 것을, 되묻지 말고 그저 걱정해줘야 한다는 것을.

엄마는 오늘도 나의 슬픔을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퇴근 만원 버스에서 또다시 어린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올라가서 마주했던 인왕산의 야경


등산을 마치고는 남자친구와 막걸리 한 잔을 나눴다.

안 봐도 합격이라며 내 몫까지 이미 몇 차례 설레발을 쳤던 터라 기대감을 줬던 게 도리어 몇 배의 미안함과 무안함으로 다가왔다.

풀 죽은 모습으로 주변을 실망시킨 것 같아 속상하다는 이런저런 이야길 털어놓자, 남자친구는 본인만의 우스꽝스러운 농담으로 가벼운 위로를 건넸다.


남자친구는 한 때 몇 년간의 공시 생활을 했었다. 나를 막 만날 무렵, 그는 어렵다는 전문직 1차 시험을 한 번에 붙곤 최종 전형과도 같던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아마 지금 내 나이쯤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남자친구는 그 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우울하다거나 힘들다는 이야길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땐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지 싶은 순간들에 난 그가 조금 오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렸던 나는 그게 얼마나 단단한 멘탈로 자신을 부여잡고 있었던 것인지 알지 못했다. 30대에 몇 년을 투자하며 무언가에 도전하는 게 얼마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남자친구가 딱 한 번 무너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한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나와, 불안에 떨며 가채점을 함께 하던 순간이었다. 남자친구는 "어떡하지"라는 말을 반복하며 아무 말도 듣지 못하는 듯 보였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내년에 다시 준비하면 되지"였을 뿐이었다.


멈출 줄 모르는 고공행진은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예측불허의 불안을 동반한다. 그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추락의 아픔은 작게는 몇 배, 크게는 몇 십배가 된다. 예상보다 너무 잘 풀리던 채용 절차, 첫 해였지만 단번에 붙었던 1차 시험은 우리를 기대하게 했고 반대로 실망하게 했다.

물론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을 불안감을 다스리며 준비하는 것만큼 나의 이번 취준 생활은 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정량적으로 비교해 봐도 나의 6개월이란 시간은 그의 시간에 비해 긴 시간이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똑같이 아팠던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기대하며 나를 지원해 준 소중한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는 죄책감이었다. 그게 사실은 나를 동정하는 일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지원해주는 가족, 옆에 있는 연인, 분명 미안하겠지만 이기적이어야 해. 모든 사람 다 신경 쓰지 말고 너한테만 집중해."


'6개월 쉰 거 그게 뭐 별거냐'는 얘기보다, '나도 알아, 힘들지. 하지만 괜찮아'라는 그 따뜻한 위로가 그 어떤 말보다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유연하지만 단단한 남자친구만의 위로법은 나를 우울에서 빠르게 건져내 주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 내 방 침대엔 먼저 잠에 든 엄마가 켜둔 따뜻한 전기장판이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남자친구가 “안 가길 잘했다”며 보내는 그 회사의 떨어진 주가창과 이슈 뉴스가 나를 피식 웃게 만든다.

가끔씩 그날 혼자 산에 올라와 핸드폰 한 번을 보지 않은 채 허망한 표정으로 몇십 분 동안 하염없이 야경만 바라보고 있던 다른 한 여성분이 생각난다. 그저 운동 삼아 올라온 건지, 아님 유난히 예뻤던 그날의 서울 풍경을 보기 위해 올라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바위에 앉아 쌀쌀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녀를 그날 조용히 응원했다. 이 산을 오를 땐 우리 힘들었던 심신도 내려갈 땐 조금 가뿐하게 가져가자고 말이다.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는 각자만의 방법이 있다. 긴말 없이 뒤에서 한결같은 응원을 보내는 엄마와 무겁지 않게 유쾌한 위로를 건네는 남자친구의 방식이 있는 것처럼. 서로의 슬픔을 공부하는 이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나의 불안감을 꼭꼭 씹어 삼켜 조금 더 소화시킨다.


- 그 과정에서 남이 해줄 수 있는 일과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예컨대 '희망을 훼방 놓기'는 남이 해줄 수 있는 일이다. 뭔가 잔뜩 어질러야 거기 공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듯이, 누가 내 희망을 훼방 놓으면 문득 내게는 희망이 있었구나 하면서 실연을 극복하게 된다는 것. 혹은 자신의 열등한 육체를 저주하다가도 누군가로부터 주먹이 날아오면 몸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차리듯이. 그러니까 징징대는 그의 생을 한 대 툭 쳐주라는 것. 넌 네 생이 싫어? 그럼 내가 망가뜨려줄까?

여기까지가 남이 해줄 수 있는 일,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말이야.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면 여전히 뭔가 남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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