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로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들
"너는 스트레스를 진짜 안 받는 것 같아."
말로만 듣던 아홉수라는 게 정말 있던가, 나의 퇴사 시점 즈음 나의 친구들 혹은 비슷한 연령대의 지인들이 하나둘씩 줄지은 퇴사를 하기 시작했다. 퇴사의 이유는 제각기 달랐지만 놀라운 공통점은 하나같이 이직이 아닌 "무계획 퇴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무계획 퇴사 : 퇴사 이후의 계획이나 진로를 명확히 정하지 않은 것)
처음엔 다들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는 투의 말투였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그리고 몇 달이 지나자 친구들은 하나둘 자신의 앞날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그토록 다시 가고 싶지 않다던 회사원의 삶으로 돌아가기도, 몇몇은 점점 가벼워지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터놓으면서 "어떻게든 살겠지"하며 자신들의 고민을 공감 못하는 듯한 나의 낙관적인 태도를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허나, 사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고민 없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불안하고 초조한 생각이 들더라도 매몰되지 않고자 하는 작은 노력들 덕분에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고 매일을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불온전한 백수의 삶에서도 나를 나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지 글로 한 번 정리해 보았다.
1. 인간관계 정리하기 -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부정적인 사람과 멀리
나에게 부정적인 생각과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과의 거리를 늘렸다.
내가 좋은 에너지를 갖고 있을 때 그것을 나눠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 또한 끊임없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살고 있는 지금, 내 안에 남기고자 하는 긍정적인 힘조차 빼앗아버리는 사람들은 현재의 나에게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하루종일 부정적인 이야기를 나누거나, 나를 까내리는 이야기를 듣거나, 상대의 푸념에 내 에너지를 쓰다 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이상한 공허함이 생겼다.)
반대로 나에게 더욱 긍정의 힘을 불어넣는 사람들이 있다. 잡념이 많아질 때면 가끔씩 매우 긍정적인 나의 주위 사람들을 떠올리며 한번 더 배우려고 노력한다.
- 퇴사 이후, 내가 아는 최고의 긍정걸인 Y님과 단둘이 캠핑을 가게 되었다. Y님 또한 나와 비슷한 시기에 퇴사 후 구직 중이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난항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쯥. 다들 인재를 못 알아보고 말이야."라고 말하며, "우리 다음 달까지 안되면 쿠팡이나 같이 뛸래? 대신 새벽에 뛰자."라고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Y님은 전에도 약 1년간의 구직기간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생활비를 위해 새벽 쿠팡 알바를 뛴 적이 여러 번 있다고 했다. (새벽인 이유는 당연히 보수가 더 높으니까.) 초조하진 않았냐, 라고 묻는 질문에 "난 내가 대체 얼마나 잘되려고 이러나, 싶던데?" 라고 대답하는 그녀. 그리고 그것이 허투루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 모두가 아는 대기업으로 또 한 번의 이직을 성공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꽤나 능력 있고 감각 있는, 그리고 사람들 대다수가 좋아하는 일잘러였다. 결국 이 메타인지 높은 유근본의 미친 자기 확신은 내가 실패할 때마다 떠올리는 태도가 됐다. "왜 또 실패했지? 나 도대체 얼마나 잘되려고?!"
2. 나와의 농밀한 시간 즐기기 - 내가 좋아하는 것 스스로 찾아주기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잘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주말에는 어떻게든 사람을 만나 평일에 쌓인 업무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고, 혼자 보내는 시간엔 대체 무엇을 하면 즐거운지 주위에 수백 번 물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반타의적, 반자의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리다 보니 자연스레 "나와 알차게 노는 방법"을 스스로 계속 묻게 되고, 그 밀도가 점차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 커피가 맛있는 카페 탐방을 해보자
- 나는 회고를 좋아한다 > 생각이 많을 땐 글을 써보자
-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 독립영화관을 찾아가 보자
나에겐 예전부터 속해있던 영화동아리가 있는데, 추천작이나 신작 리뷰 등으로 단톡방이 활성화될 때 해당 작품을 미루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혼자만의 취미이기도 하다. 덕분에 내 인생에서 OTT 구독 이래 가장 뽕(?)을 뽑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고 말이다.
3. 일상의 루틴 만들기 - 건강한 습관이 주는 힘
퇴사를 하다는 건 곧 매일같이 출근하여 일하던 시간만큼 24시간 중 9시간 이상의 공백이 내 일상에 매일 생겨버린다는 것이다. 이 시간을 최대한 잘 채워나가기 위한 나만의 건강한 습관들을 몇 가지 지키려고 하는데 실제로 이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되고 있다.
- 아침에 일어나서 식물에 물 주기 : 식물테라피를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퇴사 한 달 뒤 방울토마토 씨앗을 심었다. 약 4개월 동안 무럭무럭 잘 자라 지금은 열매가 맺혔는데 매일 커가는 식물을 직접 보며 가꾼다는 건 자기 효능감을 높여준다.
-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운동하기 : 숨 찰 정도로 움직이고 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러닝 5km, 실내사이클 1시간, 가끔씩은 등산을 가거나 이것마저도 못할 땐 20층 가까이 되는 우리 집까지 계단을 오른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 건강한 식습관 유지하기 : 이전 회사 대표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8~9kg 정도를 감량하고 나타나신 적이 있다. 비결을 물어보니 [야채 - 단백질 - 탄수화물로 식사순서를 바꾼 것] + [헬스를 시작한 것]이 그 이유라고 하였다. 알고 보니 이것은 혈당관리 식사법으로 전부터 유명하였고, 나 또한 1) 매 식사마다 야채를 곁들이고, 2) 식사순서를 바꾸니,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아도 살이 미친 듯이 빠져 퇴사 이전 대비 7~8kg 정도를 감량하게 되었다. (나의 경우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 손발 저림이 심하고, 밤에 다리에 쥐가 나 통잠을 잘 자지 못했는데 이것도 말끔히 사라졌다.)
4. 진로탐색 하기 - 퇴사의 궁극적인 목적을 잊지 말자
쉬면서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책들을 조금씩 찾아 읽었다. 크게는 디자인, 인간심리, 재테크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디자인, 좀 더 깊게는 BX 디자인에 대해 흥미를 느껴 더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가장 유명하다는 학원을 끊었다. 퇴사를 하며 스스로 한 약속 중에 한 가지는, 앞으로의 커리어 관련하여 궁금하거나 배워보고 싶은 게 있으면 돈을 아끼지 말자, 대신 이것을 대충 하지 말고 진짜 전문가처럼 딥다이브해서 해보자, 였다.
회사에 가는 것처럼 하루 4시간 - 많게는 10시간까지, 포트폴리오 작업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다. 약속이 있을 때면 노트북을 항상 들고 다녔고, 어떻게든 짬을 내어 조금씩이라도 작업을 하려고 노력했다. 일주일에 약 두 번 정도 그동안의 작업물을 공유하고 피드백받는데, 이렇게 열심히 했음에도 방향성이 어긋나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땐 학원에 너무 가기 싫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으려 형편없는 작업물이 나와도 꾸역꾸역 과제를 제시간에 제출했고, 학원도 한 번도 지각하거나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집 앞 스터디카페에 50시간짜리 회원권을 끊어놨는데 다른 카페들과 번갈아 가며 다녔음에도 한 달 만에 전부 소진했으니, 정말 이 일을 돈 받고 하는 사람처럼 경험해 봤다고 나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덕분에 이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나는 조금은 판단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배워가는 단계라 나의 부족함이 느껴질 땐 머리가 아프다가도, 노트북을 켜 작업에 들어가면 10시간을 넘게 일어나지 않고 작업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잘하고 싶다고 느꼈고, 칭찬을 받으면 그 무엇보다 큰 뿌듯함도 느껴졌다. 이 일을 하고 싶구나, 스스로 느꼈다.
- 최근 고등학교 친구 K의 고민을 들었다. 나보다 한 달 더 먼저 퇴사한 K는 기존의 직무와 새로운 진로 사이에서 계속 고민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의견을 구하는 그녀에게, 나는 이렇다 할 이야기 대신 나의 현재 상황과 마음 가짐에 대해 얘기했다. "추진력이 좋다, 너는."
그러던 중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불안해서 넣었던 이력서인데... 다음 주에 면접오라나 봐." 전화를 끊은 K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며칠 뒤 문득 그녀의 면접 결과가 궁금하여 연락을 해보았다. 내가 보았던 K는 새로운 것에 대한 리스크를 더 크게 생각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아마 나도 모르게 그녀가 당연히 면접에 응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조금 의외였고, 나는 카톡을 보며 조금 오묘한 기분을 느끼기도, 조금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글만 읽는다면 마치 갓생 백수의 일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날들도 다수 존재한다. 때론 밤낮이 바뀌어 오후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기도, 전날의 과음 때문에 반나절을 숙취로 버리기도, 스크린타임을 18시간 찍을 만큼 하루 종일 생산성 없는 콘텐츠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무너짐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다. 하루 몇 시간을 실패했다고, 혹은 몇 날 며칠을 실패했다고 내 삶이 전부 무너지는 건 결코 아니니까.
나의 강점은 회복 탄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울하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스스로의 우울을 상쇄시키기도, 불안하면 "일단 해."라는 마인드로 무작정 무언갈 시작하기도 한다. 이렇게 천천히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 그리고 만약 넘어져도 점점 더 빨리 일어나는 방법을 깨닫는 과정, 나는 그걸 “갓생 백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라고 정의하고 싶다.